
유럽중앙은행을 이끌어온 크리스틴 라가르드 총재의 전격적인 조기 퇴진 결단은 극단 세력의 득세로 뿌리째 흔들리는 프랑스 정치판을 향한 강력한 복귀 신호탄이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총재는 정례 통화정책회의를 마친 뒤 진행된 내외신 회견을 통해 내년 2월 사령탑 자리에서 내려오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통화정책과 무관한 발언, 표현, 참여의 자유를 갖고 싶다"고 심경을 털어놓았다. 이어 "현재로선 중립적 위치에 편하게 있을 수 없다"면서 "나는 진실에 관심이 있는데, 진실이 너무 자주 훼손되고 모순과 오해를 겪는 경우를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는 고국의 정치 현실에 침묵을 지키지 않겠다는 강한 의중을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재임 기간 내내 라가르드 총재를 둘러싸고 세계경제포럼(WEF) 행이나 내년 4~5월 엘리제궁을 향한 도전설이 파다했다. 그는 프랑스 차기 리더십에 "친유럽적 목소리"가 절실하다는 당위성을 누차 피력하면서도 대선 출사표를 직설적으로 던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블룸버그 통신은 그가 WEF 수장을 맡든 직접 선거전에 뛰어들든 자국 정치 담론의 한가운데로 발을 들이밀 확률이 그 어느 시기보다 농후해졌다고 내다봤다.
프랑스 정가의 시선도 즉각 쏠렸다. 브뤼노 르메르 전 경제재무 장관은 "크리스틴은 프랑스 상황이 막 험악해지고 있다는 걸 안다"며 "능력과 전문성이 있으니 앞으로 몇 주, 몇 달 안에 참여해 모종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힘을 실었다. 반면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의 장필립 탕기 의원은 "그럴 줄 알았다"며 "우리의 방향에 대한 또 한 번의 모욕"이라고 날을 세웠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그의 결단을 존중하며 그간의 유럽 헌신에 사의를 표했다.
칠순에 접어든 국제 금융계 수장의 등판설이 불붙은 배경에는 마크롱 정권 말기 중도 세력의 무기력증과 지리멸렬한 난맥상이 도사리고 있다. 최근 폴리티코와 클러스터17 조사에 따르면 극우 RN의 마린 르펜이 33%, 극좌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의 장뤼크 멜랑숑이 18.5%를 얻어 결선행을 예약한 상태다. 반면 중도 간판인 에두아르 필리프 전 총리는 16%, 중도좌파 라파엘 글뤽스만은 13%에 그치며 양극단 후보에 크게 밀리고 있다.
로이터 통신은 필리프 캠프의 구심력 부족과 마크롱 행정부 2기 누적 피로감, 일촉즉발의 사회 갈등을 위기의 근인으로 짚었다. 파리정치대학의 필리프 모로셰브롤레는 "(중도 진영에서) 계획된 시나리오가 전무해 공황 상태"라며 "이 정도의 대재앙이 닥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가브리엘 아탈 전 총리와의 주도권 다툼까지 겹쳐 중도가 사분오열되자, 일각에서는 장관 시절의 관록과 글로벌 명망을 겸비한 라가르드가 파국을 막을 유일한 통합 대안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