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동 지역의 군사적 긴장 고조가 글로벌 에너지 시장을 강타한 가운데, 미국 행정부가 국내 유가 안정을 위해 국가 예비 유류를 빠른 속도로 소모하고 있다. 미국 에너지부가 공개한 통계 자료를 살펴보면 미국의 전략비축유(SPR) 재고량은 직전 한 주 동안에만 무려 800만 배럴이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그 전주에 기록했던 감소분인 910만 배럴과 비교하면 소폭 줄어든 수치이나, 5월 중순에 관측되었던 사상 최대의 주간 감소 폭인 990만 배럴의 연장선상에서 대규모 방출 기조가 멈추지 않고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연이은 대량 방출의 결과로 현재 미국이 보유한 전략비축유 잔여 재고량은 3억 5,710만 배럴까지 추락했다. 이러한 수치는 지난 2024년 1월 이후 약 2년 반 만에 가장 적은 물량이다. 현 상황에 대해 블룸버그의 에너지·원자재 전문 칼럼니스트인 하비에르 블라스는 자신의 소셜미디어 엑스(X)를 통해 "현재와 같은 방출 속도가 유지된다면 전략비축유는 다음 주 후반 바이든 행정부 당시의 최저 수준 아래로 떨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의 분석대로 현재의 방출 속도가 제어되지 않고 그대로 이어진다면, 미국의 비축유 보유고는 1983년 이후 43년 만에 가장 바닥을 드러내게 된다.
미국 언론은 현재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과거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과 비교해 훨씬 가파른 속도로 석유 비축량을 고갈시키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올해 2월 말 중동에서 본격적인 전쟁이 터진 이후 트럼프 행정부가 시장의 공급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방출한 비축유는 약 5,800만 배럴에 달하는데, 이는 미국 전체 비축량의 14%에 육박하는 거대한 규모다. 과거 바이든 행정부는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했을 당시 유가 폭등을 막기 위해 전략비축유를 시장에 대거 방출했으며, 그 여파로 비축량이 1980년대 이후 40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진 바 있다.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방출 정책이 정치적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24년 대통령 선거 운동을 전개할 당시,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이 2022년 중간선거를 목전에 두고 표심을 잡기 위해 휘발유 가격을 억지로 내리려다 국가의 소중한 전략비축유를 바닥내고 안보 위기를 자초했다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이란과의 전쟁 발발로 자국의 에너지 안보가 다시금 위협받게 되자, 트럼프 대통령 역시 자신이 비판했던 전임 행정부의 대규모 비축유 방출 카드를 한층 더 과감하게 꺼내 들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