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조선업체들, 대러 서방 제재에 결국 러시아 시장 포기]
러시아가 중국 조선업체들에게 호재로 떠오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방의 대(對)러시아 제재에 따른 압박에 굴복해 중국이 결국 러시아 고객들과의 오랜 관계를 끊었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조선업체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산업에까지 확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중러관계는 또다른 변수를 맞게 됐다.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28일, 한 주요 조선사와 중국 매체 보도들을 인용해 “러시아로부터의 수주에서 기회를 보았던 중국 조선업체들은 서방 제재로 인한 압박 속에서 이에 순응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받고 있으며, 이에 중국 동부의 조선소들은 최근 몇 주 동안 러시아 바이어와의 오랜 관계를 단절하고 있다”고 보도해 눈길을 끌었다. 중국으로서는 그동안 우려해 왔던 최악의 일들이 현실이 된 것이다.
실제로 노르웨이에 본사를 둔 에너지 산업 매체인 업스트림(Upstream)에 따르면 “이러한 움직임은 상하이의 위슨뉴에너지(Wison New Energies)를 포함한 5개 중국 기업이 유럽연합(EU)의 제재로 인해 시베리아 북부에 있는 러시아의 북극-LNG 2 프로젝트에서 작업을 중단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은 지 2년 만에 내려진 결론”이라면서 “제재를 회피하려 했지만 이젠 더 이상 피할 길이 없어지면서 결국 철수라는 결정을 내리게 됐다”고 밝혔다.
업스트림은 “이 5개 기업들은 현재 진행 중인 모든 러시아 프로젝트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으며, 위슨뉴에너지도 지난주 비즈니스 인맥 사이트 링크트인에 올린 글에서 “진행 중인 모든 러시아 프로젝트를 중단하기로 결정했고 즉시, 무기한으로 신규 러시아 수주를 중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위슨뉴에너지는 “과거 러시아 파트너들과 구축해 온 좋은 관계에 감사하며 우리가 함께 해온 일을 소중히 여긴다”며 “그러나 회사의 전략적 미래 관점에서 우리는 이 어려운 결정을 했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SCMP는 “몇주 전 해당 5곳 중 하나인 산둥성의 펑라이쥐탈이 러시아와 거래를 이유로 미국 재무부 블랙리스트에 오르자 위슨뉴에너지는 서방 세계를 향해 제재를 준수하겠다는 뜻을 발신한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위슨뉴에너지는 아울러 저장성에 있는 저우산위슨 지분을 매각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저우산위슨은 러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천연가스 생산업체인 노바텍이 감독하는 '북극 LNG-2' 프로젝트를 위한 모듈 구축을 지원해왔다.
이와 관련해 로이터 통신은 “지난 4월, 미국의 제재와 가스 유조선 부족으로 인해 북극-LNG 2 프로젝트의 가스 액화 작업이 중단됐다”고 보도한 바 있다.
[우크라 전쟁 여파, 대 러시아 제재가 부른 파국]
지난 2022년 2월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마저 비틀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이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만난 자리에서 ‘한계가 없는 관계를 추구한다’면서 큰소리를 쳤지만, 결국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국가들의 대 러시아 제재에 발목이 잡히면서 양국간 경제 교류에도 냉기가 감돌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은 지난 24일 러시아산 LNG를 포함한 14차 대러시아 제재를 또다시 단행했다. 제재 대상에 개인 69명과 단체 47곳이 추가됐는데 그중 19곳이 중국 기업이다. 이번 EU의 제재 대상 중 하나는 액화천연가스(LNG)이다.
EU의 제재 조치가 발령되자 중국은 즉각 반발했다. 중국 상무부는 “이는 일방적인 제재이며 기업의 정상적인 영업을 방해하는 부적절한 조치에 해당된다”면서 “이번 제재 대상에서 중국 기업은 전면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경제분석기관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의 쉬톈천 선임 이코노미스트는 “러시아가 중국 조선소들에 거대한 시장으로 떠올랐으나 제재로 인해 그러한 횡재가 무산됐다”면서 “러시아는 조선업에서 한국, 중국, 일본, 그리스 같은 나라에 한참 뒤처진 아주 작은 플레이어”라고 말했다.
쉬톈천 이코노미스트는 이어 “조선업에서 러시아의 중국 의존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서방의 제재로 2022년부터 커졌겠지만, 선박은 이중 용도 제품으로 쉽게 분류될 수 있어 이전보다 더 면밀한 조사 대상이 되기 때문에 강화하는 서방 제재는 중국 기업들에 즉각적인 위험이 됐다”면서 “일부 조선소들이 러시아와 관계를 끊는 것은 재정적 곤경에 빠지는 것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상하이해양대 정지 교수도 “많은 중국 조선소가 과잉 생산 역량 탓에 러시아로부터의 주문을 대체하기 어려울 것”이라면서 “러시아를 위한 부품을 만드는 중국 조선소들은 서방이나 다른 곳으로부터도 주문받는 까닭에 이제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를 저울질하며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조선 협력은 지난 5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수교 7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서명된 공동 성명에서 우주 및 항공 산업과 함께 중점적으로 다뤄진 분야 중 하나였다. 그렇게 비중있는 산업임에도 결국 서방의 제재에 꼬리를 내려 버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중국 기업들의 조치는 러시아에겐 큰 충격이다. 6월초 중국관영 경제일보는 러시아 국영 원자력 대기업인 로사톰의 알렉세이 리하체프 대표가 최근 푸틴 대통령에게 “중국과 북극 항로 공동 개발에 대해 브리핑했으며 러시아가 조선, 항만 건설, 물류 협력 분야에서 파트너를 유치할 것이라고 말했다”면서 “이는 양국의 이익에 진정으로 부합되는 공동 프로젝트가 될 것”이라 보도한 바 있다.
신화통신도 지난 6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양국 협력 포럼에서 상하이에 본사를 둔 뉴뉴쉬핑라인이 러시아 국영 원자력공사 로사톰과 하이 아이스급 컨테이너선을 설계 및 건조하고 중국과 러시아 항구를 연결하는 북극 항로를 공동 운영하기 위한 합작 투자를 위한 계약을 체결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중국사회과학원의 루샹 연구원은 “중국의 대러시아 투자가 홍보 부족으로 인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면서 “원칙적으로 제재는 러시아에 진출한 조선업체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겠지만 일부는 여전히 제재를 회피할 방법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조선 데이터 분석업체 클락슨(Clarksons)에 따르면 2023년 전 세계 조선 생산량은 전년 대비 10% 증가한 3,500만 톤으로, 중국이 처음으로 전체 생산량의 50%를 차지하며 한국의 26%와 일본의 14%를 제치고 선두주자로 부상했다.
중국이 이렇게 부상한 것은 한국의 조선업체들이 러시아와 관계를 중단하면서 러시아 고객들이 선박 인도 대금을 지불하지 못해 손실을 보고 있는 탓이라 할 수 있다.
삼성중공업은 러시아 고객과 LNG 선박과 관련하여 법적 분쟁을 벌이고 있으며, 싱가포르 중재법원에서 소송을 심리할 예정이다. 현대중공업은 러시아 고객사를 위해 건조했던 선박을 재판매했지만, 한화 오션은 여전히 새로운 구매자를 찾고 있다.
SCMP에 의하면 한국의 조선업체들은 러시아로부터 수주했던 프로젝트들이 전면 중단되면서 이미 완성해 놓았던 블록들의 새로운 용도를 찾아야 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편, 세계 최대 감시장비 제조업체인 중국 하이크비전(Hikvision·海康威視)이 러시아 시장에서 철수했다. 폐쇄회로(CC) TV 설치 서비스 등을 하는 러시아 보안전문업체 비디오글라즈는 최근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하이크비전의 러시아어 홈페이지 접속이 불가능해졌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하이크비전의 러시아 사업 중단 소식은) 러시아의 군사적 산업기반을 지원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국제기업들을 겨냥한 미국의 세컨더리 보이콧(제3자 제재) 직후 나온 것”이라고 짚었다.
중국 저장성 항저우에 본사를 둔 하이크비전은 CCTV를 비롯한 영상 감시장비를 생산하며, 산하 저가 브랜드인 하이워치(HiWatch)와 함께 2021년 기준 러시아 감시 카메라 시장의 30%가량을 차지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대러제재 고리로 中대형은행까지 압박하는 美]
미국이 러시아와 거래하는 중국 기업들을 압박하는 방법은 그 기업들이 거래하는 금융기관들을 제재 재상에 올리는 방식이다. 이와 관련해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은 지난 6월 13일(현지시간) “나는 중국의 대형 금융 기관들이 (미국의 제재 위반자로) 지정되지 않기 위한 매우 강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대러시아 제재를 조직적으로 위반할 경우 중국 대형은행에 대한 제재도 불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전쟁 개전 이후 중국은 미국의 경고 속에 대러시아 무기 수출은 자제하되, 러시아 방위산업 시스템이 굴러갈 수 있도록 하는 반도체 등 각종 물자 수출은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이를 효과적으로 제어하기 위해 미국은 그 기업들과 거래하는 금융기관을 제재한다는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 대형 시중은행들은 미국의 2차 제재(제재 대상과 거래하는 제3자를 제재하는 것. Secondary Boycott)를 우려하며 중러 거래에 관여하는데 조심스러운 태도를 견지해왔다.
이와 함께 미국 재무부는 지난 6월 12일(현지시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 수행을 돕고 에너지와 광물 개발에 참여하는 한편 기존 제재 회피를 돕고 있는 이유로 개인과 기관 등 300여개 대상을 제재 명단에 추가했다고 밝혔다.
이 명단에는 러시아 뿐 아니라 중국과 튀르키예, 아랍에미리트(UAE)의 개인과 기관도 포함돼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중국과 홍콩 소재 기업 7곳이 명단에 오른 점이다. 또 러시아에 군사장비를 판매한 것으로 의심받는 중국 국영기업도 포함됐다.
미국 재무부는 '세컨더리 보이콧' 범위도 크게 확대했다. 미국은 중국이나 홍콩의 러시아 금융기관 지점과 거래하는 중국 은행들도 혐의가 있을 경우 제재하기로 했다.
미국 재무부와 별도로 미국 상무부도 대러 반도체 수출통제를 강화했다. 이 조치도 러시아에 반도체를 공급하는 중국 업체들을 압박하는 조치로 풀이됐다.
미국 당국의 일련의 조치는 장기화하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중국을 본격적으로 압박하는 수순으로 풀이된다.
이렇게 미국을 비롯한 서방진영의 대 러시아 제재가 더욱 강도를 높이면서 러시아는 전쟁용품 생산에 상당한 차질이 불가피해 보인다. 러시아는 이러한 난제를 타개하기 위해 푸틴이 직접 중국의 시진핑 주석을 만나서 타개책을 논의했지만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했고, 이어 북한과 베트남 등을 방문했지만 뾰쪽한 수를 찾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사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겠다는 푸틴의 구상은 어긋나기 시작했으며 이 때문에 돌연 휴전협상 카드를 꺼내든 것으로 보인다. 진퇴양난에 빠진 푸틴, 과연 그는 이 위기를 어떻게 타개해 나가려 할까?
-중국 푸단대학교 한국연구원 객좌교수
-전 EDUIN News 대표
-전 OUR NEWS 대표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책기획팀장
-전 대통령실 홍보기획비서관
-사단법인 한국가정상담연구소 이사장
-저서: 북한급변사태와 한반도통일, 2012 다시우파다, 선거마케팅, 한국의 정치광고, 국회의원 선거매뉴얼 등 50여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