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21-11-05 23:16:57
  • 수정 2021-11-06 18:23:40
기사수정


▲ 노태우 전 대통령 영결식 [사진=뉴시스]


노태우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국내외 언론의 평가가 빛과 그늘의 교차로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 국제사회가 대체로 7: 3의 공과를 부각시킨데 반해 문재인 정권의 인사들과 정치인들은 12.12쿠데타와 5.18학살을 앞세워 폄훼하는 경향을 보여 대조를 이룬다. 이에 국내외 평가의 명암을 조명해 본다.


[르 몽드, “한국헌정의 기초 다지고 보통사람시대 사회분위기 바꾸다”]


세계의 유력 언론매체들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한국 민주화의 장인(匠人)’이라는 타이틀까지 붙이며 공과를 중심으로 대서특필했다. 미 뉴욕타임스는 12.12 군사쿠데타의 역할과 같이 ‘민주주의의 격렬한 전환’을 주도해 1988 서울올림픽의 성공, 소련 중국 등 공산권과 수교, 1991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 등을 큰 업적으로 소개했다.


프랑스 르몽드지도 “한국 민주주의 이행의 장인”이라는 제목으로 “재임동안 한국헌정의 기초를 다지고 최초의 올림픽개최, 구소련과 중국 등 공산권과 수교, 북한과 관계 개선등을 이뤘다”면서 “보통사람 시대를 열어 대통령 풍자를 허용하는 등 독재로 경직되었던 한국사회 분위기를 바꿨다”고 평가했다.


영국의 인디펜던스는 “군사독재 후 한국 첫 대통령”이라 제목을 붙였고, 독일 쥐드 도이체 자이퉁은 “1987년 대선에서 당선”이라는 타이틀로, 중국관영 신화통신은 “북방외교로 소련 중국 동유럽 국가들과 수교를 맺었다”고 보도했다.


미국과 중국은 공식적으로 정부 차원의 조의논평을 냈고, 중국과 일본 등 16개국 정상들도 조의전문을 보냈다. 미 국무부는 ‘네드 프라이스‘ 대변인 명의로 “노태우 대통령의 별세에 대해 한국 국민들에게 깊은 조의를 전한다”는 성명을 냈다. 그러면서 “노태우 대통령은 복잡한 유산을 남겼지만, 그의 재임 중 한국민주주의의 공고화, 유엔가입, 한반도비핵화에 대한 강력한 공약 등이 이루어졌다”고 회고했다.


중국 외교부의 지오리젠 외교부 대변인도 “노태우 선생은 중국의 좋은 친구로 한중수교와 양국관계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면서 애도를 표했다.


[시진핑 주석 등 16개 정상 조전, 장례 후 유족에게 전달 망신자초]


또한 중국, 일본, 베트남, 태국 등 16개 국가원수들이 보낸 조의전문을 청와대와 외교부가 ’숨기고‘ 장례식 후 늑장 전달하면서 외교적 파문이 일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한중수교와 파트너십에 대한 기여를 상기하며 명복을 빈다. 가족에 위로를 보낸다”는 조의문을 보냈으나 정부가 이를 전달하지 않자 주중대사가 항의하는 소동이 있었다. 이 밖에도 일본 베트남 태국의 국가원수들이 보낸 조의문을 청와대는 장례식 끝날 때까지 3일이나 묵혀 망신을 자초했다. 이 사실은 주한중국대사가 상가에 전화를 하면서 밝혀저 외교스캔들로 확산됐다.


문재인 정부가 이렇게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 의도적으로 저평가를 하고 외교적 결례까지 자초한 것은 한마디로 역사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은 12.12쿠데타로 군정을 실시했으나 자신이 6.29민주화선언으로 군정을 폐기해 대통령 직선제 등 의회주의 복원을 실현한 공로를 외국정상들과 언론들이 높이 평가한다. 그런데 문재인정권은 5.18 민주운동 진압 작전 등 과오만 강조하는 반면, 민주화 실현, 공산권 외교, 경제발전과 대북외교의 공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문재인정권의 주요 인사들은 장례를 국가장으로 결정했으면서도, 민주당 송영길 대표 등 고위인사들 다수가 장례식에 불참했고, 더불어 ’노태우 씨‘로 호칭하는 등 고인을 모욕주기에 열중하는 괴상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노태우 시대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일삼는 그들은 정작 집권 5년간 외교망신과 국민 편가르기, 전체주의적 지배로 자유민주체제를 침몰시켰다. 그들은 또한 국제질서의 정통성인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허물고 소득주도, 탈원전, 25차례의 부동산규제, 북한대변인을 자초한 외교 등으로 대한민국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어디 그뿐인가? 대장동형 부동산부패와 국가재정 파탄으로 불평등 고통이 극에 달하고 있고, ‘진보패거리’만 권력과 부를 독점함으로서 국민을 국가와 사회에서 소외시켰다. 586운동세력은 여기에다 태극기 대신 한반도기를 들면서 헌정마저 깔아뭉개버렸다.


[노태우의 최대 공헌, 자유민주주의체제 복귀]


이러한 문재인 정권과는 달리 노태우 전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발전-국가선진화의 자유민주-시장경제체제 위에 국민의 슬기와 지성으로 한국의 민주문명을 앞세워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두목을 설득하는데 성공한 대정치를 펼쳤다.


스페인의 군사독재자 프랑코는 2차 대전의 전화(戰禍)를 피하고 경제발전을 도모해 사후에 EU에 가입해 유럽문명의 일원이 되면서 재평가되었다. 프랑코는 공산당 지배라는 과도 있지만 시장경제 발전의 공적이 오히려 높이 평가되면서 오늘 EU의 자유민주 주도국이 되었다.


프랑스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 계급은 1871년 파리코뮌이 총 봉기한 공산주의혁명을 무자비하게 섬멸함으로서 콤뮌군을 소탕했다. 프랑스 부르주아정부는 20세기 맞아 대사면령을 내리면서 대탕평에 나서 20세기초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다. 20세기 유럽은 자유민주의체제의 화려한 유럽문명건설에 성공했던 것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도 6.29선언으로 대선 직선제 실시, 군사독제 폐기와 민주주의 복귀, 서울올림픽 성공, 남북기본합의서와 남북한 핵폐기선언, 남북동시 유엔가입, 소련과 중국 등 공산권 39개국과 수교한 외교승리, 국민의료보험실시와 토지공개념 도입, 분당과 일산신도시 등 포함 200만호 주택건설과 영종도 국제공항건설, 프랑스 TGV도입으로 한국형 KTX시대를 열었다.


노태우 시대 5년은 경제도약과 자유민주체제 공고화로 선진국의 기반을 닦는데 성공했다. 국가대개조의 방향과 내용은 모두 대한민국의 세계화 문명화작업으로 21세기 국제질서의 정통성인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체제와 일치한 국가방향설정의 대역사였다. 국제사회의 깊은 조의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베를린장벽 붕괴시, 서독-프랑스정상 연쇄회담 유럽대변동 체득]


필자는 노태우 전 대통령과 귀한 인연이 있다. 1989년 12월 중순 서울 청와대 이수정 대변인이 전화를 했다. VIP를 수행해 파리와 서독 본을 방문할 예정인데, 도움이 필요하다는 요청이었다.


노 대통령은 당시 독일 임시수도 본에서 헬무트 콜 서독총리, 파리에서 미테랑 프랑스대통령과 회담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수정 대변인은 서울문리대출신으로 나와 4.19혁명 동지의 절친이였다. 당시 필자는 11월 9일 장벽붕괴취재로 바쁜 나날을 보낼 때였다.


특히 소련을 중심으로 공산진영이 흔들리고 있으며, 대통령은 독일통일이 눈앞에 왔으니 같은 분단국 대통령은 “베를린장벽 방문은 필수”라고 조언했다.


나는 5월 헝가리가 동서유럽간 철의 장벽을 개방한 사건, 프랑스혁명 200주년기념 파리학술대회와 군사퍼레이드, 7월15일 파리의 G7정상회담을 모두 취재 보도했다. 7월 5일 고르비가 파리를 방문하여 프랑스-소련정상회담을 했는데 이 역시 취재해 보도했다. 동구의 민주화, 소련 페레스트로이카, 소련 내부변화주제 토론회와 관련된 기자회견을 했는데 이를 전부 취재한 것이다.


고르비는 소련의 의회민주주의 수용여부, 페레스트로이카 등에 관해 설명했다. 그는 이날 밤 미테랑과 회담에서 G7정상회담 막간 티 타임시간에 참석을 요청했다. 미테랑이 불가능을 답하자 “1000억 달러를 G7이 지원해 달라”고 요청을 했었다. 고르비는 “공산강대국 소련이 붕괴된다면 조용히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국민의 신발과 의류등 생필품 공급이 시급하다”고 설명했다는 것이다.


7월15일 G7정상회담에서 미테랑은 고르비의 1000억 달러 기채요청을 토의했다. 식량과 생필품 공급이 시급하다는 고르비의 고통을 설명했다. 미국의 아버지 부시, 영국의 대처총리, 서독 콜총리등 정상들은 고르비의 요청을 거부했다. 고르비는 빈 손으로 귀국했다.


그 일 이후 G7은 1000억 달러를 출자해서 동구공산권 유사시 원조키로 의결했다. 미테랑의 외교특보 자크 아탈리박사가 유럽개발은행(EBRD)창설을 위해 런던에 파견되었다. 3개월 후인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붕괴되었다. G7정상들은 고르비의 원조요청이 곧 소련 공산주의가 붕괴될 조짐으로 판단했고, 결국 1000억 달러를 소련 등 공산권지원용으로 지출했던 것이다.


물론 1990년 연말연시 노태우대통령의 서독 본-프랑스 파리 방문일정은 ‘한반도의 봄’과 직결되는 사태임을 미리 알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파리-본 방문은 오래전 준비된 회담이었는데 우연찮게도 베를린 장벽붕괴와 타임이 맞아떨어진 정상회담이었다.


12월30일 콜과 회담후 1990년 1월 2일 파리에 도착했다. 노 대통령은 파리 입성시 미테랑이 최고귀빈 대접을 하면서 꽃가마를 태워주었다. 군사정권을 스스로 부정하고 민주화주역이 된 노대통령에 대한 특별대우라고 대통령궁 대변인이 설명했다. 꽃가마는 세계평화나 민주발전에 기여한 최고국가원수가 파리에 입성할 때 베푸는 프랑스의 최고 대우라는 것이다. 한국 민주화는 6.25전쟁에 한국에 파병했던 프랑스 등 구미선진국에게는 최고의 뉴스로, 노태우에 대한 참전국들이 베푸는 한국에 대한 특별대우였다.


[베를린장벽처럼 휴전선개방 건의, “시간이 걸리는 사안” 신중모드]


이수정 대변인의 배려로 나는 노대통령과 단독면담을 했다. 엘리제 대통령궁 옆 영빈관에서 노대통령이 먼저 말했다. 노 대통령과 나는 이러한 대화를 했다.


(노) “베를린장벽을 꼭 가보려 했으나 못 갔어요. 경호실의 반대 때문이지요. 콜 총리가 잘 설명해주어 잘 이해했습니다”


(필자) “동독주민의 서독에 대한 자유여행금지가 장벽붕괴의 원인입니다. 서독과 자유왕래의 욕구에서 나온 장렬한 장벽의 붕괴입니다. ‘우리는 국민이다!’고 구호를 외치며 시위대가 장벽에 쇄도하자 동독경비대가 도주해버린 것입니다. 장벽점령으로 동서독 자유왕래의 길이 곧바로 열렸어요. 찰리 체크포인트에 여권심사 군인이 없어 바로 통과해 동베를린을 취재했습니다. 노대통령께서 귀국하시어 휴전선 개방을 폭탄선언 하시면 휴전선 장벽도 열리지 않겠습니까?”


(노) “그렇게 할 수 있는 환경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아직 시간이 걸립니다”


(필자) “무엇보다 조속히 고르바초프와 회담을 하시어 수교제안을 하면 OK할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7월 파리 방문시 G7정상회담 티타임회의 요청이 거부되자 1000억 달러 기체를 요청했어요. 아마도 공산주의 이후의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 같았습니다. 독일 통일은 곧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동독주민이 ”독일인민은 하나다!“ 구호를 외치며 서독자유왕래가 허용되었으니 곧장 통일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후로도 필자의 설명은 길게 이어졌다.


“G7회담이 미테랑과 콜에게 통독문제와 동구공산권문제를 위임해 장벽붕괴 후 처리를 진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콜이 1주일에 한번 주말마다 파리에 와 비밀회담을 하면서 통독문제와 동구의 민주화-통합문제등을 협의하여 유럽대변동을 요리하고 있습니다. G7과 EU는 긴밀히 대화채널을 열고 통독과 동서구의 통합, 그리고 소련민주화를 위해 지혜를 짜내고 있습니다. 아마도 고르비가 미테랑에게 소련의 변화에 대한 의중을 전한 것 같습니다.”


“동구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소련의 공산권 간섭정책)을 포기하고 해방시키며 동독주둔 40만 소련군철수문제와 냉전종식이 뒤따라 올 것 같습니다. 아마도 유럽대변동의 바람이 한반도에도 미칠 것입니다. 귀국하는 데로 한소정상회담을 개최하여 수교문제와 동구와 수교문제도 동시에 추구하면서 남북관계를 먼저 데탕트로 변화시키는 조치가 유럽변화를 따라잡는 길이 될 것 같습니다.”


이에 노대통령은 “귀국하자마자 고르비와 정상회담부터 즉각 개최토록 하고 남북문제를 우선 데탕트로 밀고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 TGV와 원전 추가도입을 협의하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노대통령은 따뜻한 인상의 담력이 큰 지도자로 포용적 신사의 풍모를 보이는 한국정상으로 미테랑이나 콜과 정상회담을 잘하는 지도자로 보였다. 귀국 후 그는 곧 바로 박철언 장관의 북방정책전담반을 가동시켰고, 북방외교와 대북정책을 주도했다.


필자는 1980년 7월 신군부로부터 언론인 강제해직을 파리에서 당해 낭인이 되었었다. 르몽드지의 앙드레 퐁텐 주필의 배려로 파리 장기 체류증을 받아 거의 7년을 파리13대 박사과정에서 공부해 정치학박사를 했다.


그후 소르본대학교(파리1대학)부설 ‘프랑스혁명연구소’에 미셀 보벨소장 배려로 연구원으로 2년간 연구했다. 1987년 6월 귀국하여 6월항쟁 시위에 가담했다. 이때 뜻을 같이한 이들이 박찬종 홍사덕 이철 등 서명파 국회의원들이었다. 그리고 예춘호 선생의 양김 단일화운동에 참여해 계속 서명파와 같이 행동했다.


그리고 나는 김영삼-김대중의 단일화 실패로이후 중앙일보에 7년여 만에 복직했다.(계속)


*필자: 주섭일(언론인 전중앙일보 국제문제대기자 정치학박사)

TAG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hytimes.kr/news/view.php?idx=9932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주섭일 Why Times 고문 주섭일 Why Times 고문의 다른 기사 보기
  • 언론인/ 사회와 연대 회장
    정치학 박사
    전 중앙일보 파리특파원-국제문제대기자

    저서: 사회민주주의의 길(사회와 연대, 2008) 등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 (사회와 연대, 2017)
    특파원이 추적힌 북한 핵(사회와 연대, 2016)
    한반도 통일대박과 1990 독일통일 (사회와 연대, 2014)
    북의 3대 세습과 평양의 봄(사회와 연대, 2011)
    정치변화와 사회민주주의 (사회와 연대, 2002)
    김정일과 부시의 대타협(두리미디어, 2008)
    새정치와 이원적 민주주의 (사회와 연대, 2012) 등 다수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정치더보기
북한더보기
국제/외교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