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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1-09-07 22:49:35
  • 수정 2021-09-08 14:2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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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영일 전 국회의원은 초대 한국·아프가니스탄 친선협회 회장이었다. [편집자 주]


▲ 2003년 아프간 의료봉사 시 배우 정영숙 씨와 함께 아무다리아 강을 건너는 이영일 회장 [사진=필자 이영일 제공]


1. 들어가면서


필자는 미국이 9.11 사태를 일으킨 알카에다에 대한 보복으로 아프가니스탄 정권을 장악한 탈레반세력을 몰아내고 Hamid Karzai를 대통령으로 하는 아프간 과도정부가 출범하던 2003년 3월 한민족 복지재단의 공동대표로서 의료지원단을 이끌고 전쟁피해가 격심했던 아프간 북부 Mazarie Sharif 지역을 방문했다.


그 다음 해인 2004년에는 한국·아프가니스탄 친선협회 회장으로 Kabul을 방문, 과도정부 대통령을 비롯한 각료들과 NGO 협력문제를 협의하였다. 그후 미국 NGO인 NEI(Nutrition, Education International)와 한국·아프간친선협회가 제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프간의 어린이와 산모들에게 그곳에서 한국의 콩을 재배, 단백질 부족에서 오는 영양실조를 막아보자는 일에 착수했다.


한국출생으로 미국 시민이 된 권순영(Dr.Steven Kwon)박사는 14년 동안 아프간 각주를 순방, 콩 재배를 시험한 결과 각 지역에서 콩이 자랄 수 있음을 확인하고 한국산 콩을 재배, 생산하여 콩을 소재로 영양식품을 만들어 보급하면서 콩 농사를 지을 요원훈련과 콩 농사 계몽활동을 펼쳐나갔다.


우리 외교부는 이러한 성과를 중시, 국제협력단을 통해 카불에 멸균두유공장을 세워 콩 사업 활성화를 지원했다. 콩이 단백질 부족에서 오는 영양결핍을 가장 빨리 치유하는 효과를 보였기 때문에 아프간 정부 당국에서도 적극 권장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아프간 역사에 콩이 아프간인들의 식품이 된 최초의 역사를 우리 한국인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필자는 이렇게 인연을 맺은 아프간이 미군의 철수로 다시 탈레반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소식에 남다른 고뇌와 아픔을 느낀다. 특히 미군 철수 소식을 듣고 카불로 무작정 몰려오는 난민들을 돕기에 앞장섰던 NEI의 열성일꾼 Zemari Ahmadi씨가 미국의 드론폭격으로 가족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는 끔찍한 뉴스를 읽으면서 더욱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필자는 이런 경험을 토대로 오늘날 아프간 사태가 이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된 배경을 살피고 앞으로 미군의 아프간 철수가 동아시아 정세와 한국에 미칠 영향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2. 통합도, 통치도 어려운 나라


필자는 아프가니스탄(이하 아프간으로 약칭)을 직접 방문하기전 까지만 해도 아프간을 중앙아시아 대륙에 파묻힌 가난한 내륙국가로만 알았다. 그러나 아프간은 부족연맹의 형태로 얽혀있는 다민족국가였다.


내역을 살펴보면 파슈톤족(42%), 타지크족(27%), 하자라족(9%), 우즈벡족(9%), 아이막족(4%), 투르크맨 족(3%)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란과 연결된 하자라족만 이슬람의 시아파이고 나머지는 모두 수니파 이슬람계였다. 이들 간에는 언어적 공통성도 부족해서 지역을 옮길 때마다 다른 통역원을 불러야 했다. 또 자기 자신을 ‘아프간 국민’이라고 떳떳하게 말할 정도의 국민적 정체성도 없었다.


부족 간의 갈등도 격심했고 이 갈등을 업고 몇 명의 군벌들이 지역을 점거하면서 양귀비를 재배, 아편 무역으로 돈벌이를 했다. 미국이 과도정부 대통령으로 세운 하미드 카르자이도 미국 유학을 마친 아프간의 엘리트였지만 그 역시 칸다하르의 군벌출신이었다.


미국은 9.11에 대한 보복으로 2011년 아프간을 침공, 집권 5년 차인 탈레반정권(1996~2001)을 몰아내고 새로운 민주 정부를 세우려고 시도했다.


헌법을 만들고 의회와 대통령을 헌법에 따라 선출하는 한편 아프간 정부를 수호할 국가보안군(National Security Army)을 육성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문맹이 90%를 상회하는 지역주민들은 역사적으로 영국, 러시아 등의 외세지배와 군벌들의 약탈 통치에 강한 저항의식을 가지고 살아온 무슬림 들이기 때문에 이교도인 미국이 들어와서 새로운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만들고 대통령을 세운다고 해서 그것을 목숨 걸고 지킬 가치 있는 것으로 인식할 이유는 애초부터 없었다.


국회의 어떤 결정도 아프간 내부에 병립한 부족회의에서 통과되어야 유효한데 국회와 부족회의를 동시에 만족시킬 합의가 나오기는 쉽지 않았다.


또 아프간의 각부족들 역시 인접한 동족국가들의 영향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아프간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국가들은 파키스탄, 이란,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중국 등 6개국인데 이중 중국은 양국국경이 맞닿는 길이가 56Km로 가장 짧고 중국 화교도 미약, 아프간에 미칠 중국의 영향은 결코 큰 편이 아니었다.


이런 지역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이식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이슬람의 율법만을 통치의 규범으로 내세우는 탈레반 식 통치가 오히려 잘 먹힐 것이다.


탈레반은 이슬람 신학을 연구하는 신학생(神學生)을 뜻하는 말로 회교근본주의의 율법통치에 충성한다. 여자들에게 부르카 입기를 강요하면서 여성을 비하하고 보편적 인권보다는 무슬림의 인간 정책을 밀고 나간다.


여기서 서방적 가치관과 충돌한다. 앞으로 아프간에서 국민통합이 이루어지고 국민적 정체성이 확립되어 국가적 안정과 발전을 도모하려면 Alexander 대왕같은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출현, 통치하지 않는 한 내우외환으로부터 자유로운 아프가니스탄은 당분간 상상하기 힘들 것 같다.


3. 미국은 왜 실패했는가.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과 더불어 9.11테러 20주년이 되는 2021년 9월 11일 이전에 아프간에서 철군할 것임을 천명했다. 바이든의 철군발표는 흔히 ‘제국의 무덤’으로 알려진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도 영국, 러시아처럼 전략적 목표달성을 못하고 철수한다는 것이며 이는 한마디로 미국의 실패를 의미한다.


그러나 70% 이상의 미국인들은 바이든의 철군 안에 지지를 보냈고 심지어 아프간철수계획의 집행과정에 나타난 준비 부족과 혼선, 여기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참상--베트남의 Saigon과 이라크의 Mosul을 연상시키는--에도 불구하고 철군 계획 자체에 대해서만은 아직도 63%의 미국인들이 지지한다.


유라시아 재단 이사장 Ian Bremmer는 철수계획 자체는 전략적으로 올바른 결정이었지만 철수의 집행(Execution)과정에 대한 치밀한 준비의 결여로 엄청난 실패를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9월 1일 연설에서 20년간의 긴 전쟁이 끝났다고 선언하면서 미국은 아프간 철군으로 미래의 위협에 대처하게 되었다면서 “우리가 10년 더 아프간에 눌러있다면 중국과 러시아는 더 좋아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의 졸속한 아프간 철수는 어떤 수사(修辭)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미국의 수치였다. 부시 대통령이 중앙아시아 대륙에 ”항구적인 자유“를 심겠다는 공약도 무위로 끝났다. 더욱이 지정학적으로 러시아와 중국이 주도하는 중앙아시아 대륙에 미국의 든든한 지역 발판을 만들겠다는 내심의 꿈도 깨졌다.


이러한 실패에는 두 가지 큰 요인이 작용했다. 하나는 아프간 상황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미약했으면서도 미국은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는 미국의 오만(Hubris)이고 다른 하나는 돈과 무기만 대주면 탈레반과 싸울 수 있는 군대를 만들 수 있다는 착각이었다.


미국은 지난 20년간 아프간에 막대한 전비를 쏟아 넣고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음에도 결국 목표를 달성치 못함으로써 세계 정치 지도국가로서의 신뢰에도 큰 상처를 입었다.


당초 미국은 알카에다의 Osama Bin Laden을 사살한 2011년 5월에 바로 내려야 할 철군 결정을 뒤로 미룬 채 이라크에 새로운 전선(戰線)을 벌임으로써 탈레반에게 재기(再起)의 시간을 벌어주었다. 큰 실책이었다. 


보다 더 참담한 것은 미국이 800억 달러를 쏟아부어 양성한 아프간 보안군이 탈레반과 전혀 싸울 수 없는 허깨비 군대였다는 사실이다.


아프간 대통령을 비롯한 상층 지도부와 군 지휘자들이 부정부패에 찌들어 미국의 원조자금을 사복 채우는 데 탕진하고 군 부대원들에게는 제 때에 봉급은 물론 식량도, 병참 지원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아프간 보안군에게는 자유나 민주주의가 목숨 걸고 수호해야 할 가치가 아니었고 무능, 부패한 대통령이나 정부를 지키기 위해 목숨 바칠 사람도 없었다. 더욱이 이슬람교를 공유하는 탈레반과 싸울 명분이나 정당성을 부여하는 정훈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프간 대통령 Ashraf Ghani는 카불이 점령되자 외국으로 도주하면서 아프간 보안군들에게 탈레반과 싸우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미국이 탈레반과 철군 협상을 하면서 아프간 정부 대표의 참여를 배제했기 때문이었다. 부정부패와 정치교육의 부재가 아프간군을 싸울 수 없는 군대로 만든다는 사실조차 미군 지도부는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미국 학계에서는 한국군(1948년부터 1952년까지)을 공산세력과 ”싸울 수 있는 군대“로 만드는 데 성공했던 주한 미8군 사령관 James Van fleet 장군의 경험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4. 결론 : 동아시아와 한국에 미칠 영향


미국의 아프간 철군은 바이든이 말한 것처럼 미국의 미래를 위한 역량 배분이었다는 점에서 앞으로 미국과 중국 공산당 간에 펼쳐지고 있는 패권싸움에 미국의 역량이 중국 제압 쪽으로 가일층 강화될 전망이다. 미국전략의 중점이 중동이나 중앙아시아에서 아시아, 인도 태평양지역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현재 일본과 한국에 배치된 미군은 앞으로 모든 면에서 한층 더 강화될 추세다.

현재 아프가니스탄 경제는 2021년의 전망치(IMF)에 의하면 1인당 GDP는 592달러로 세계 240위다. 중국은 독립을 추구하는 신장 위구르 지역이 아프간과 국경이 접해 있고, 러시아 역시 아프간이 탈(脫)러시아를 꿈꾸는 체첸지역으로 연결되어지는 지정학적 리스크 때문에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탈레반을 상대로 정치협상에 나서야 할 것이다.


중국은 아프간에 매장된 구리, 리디움, 코발트 등 희토류를 탐내면서 일대일로(一帶一路)를 통한 협력을 미끼로 던지지만 아프간이 반중(反中)독립세력들의 테러기지로 변하는 것을 막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한편 국내에서는 아프간의 미군 철수가 주한미군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소리도 들렸다. 그간 문재인 정권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보인 외교적 불투명성으로 한미동맹의 기초가 흔들릴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기우 때문이리라. 그러나 한국은 아프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선 한국은 이미 세계랭킹 10위의 경제력을 갖는 선진국으로서 한미동맹은 2~30년 전과는 달리 일방적 대미의존 동맹이 아니라 호혜적 협력동맹으로 발전해 왔다. 한국은 비대칭적인 강대국들로 둘러싸여 있다는 지정학적 현실에 비추어 미국과의 동맹을 맺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선택이다. 한미동맹은 지난 70년 동안 미국의 대외정책상 가장 성공한 동맹으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한국에도 부패의 문제가 있다. 그러나 민주화의 결과로 부정부패에 대한 대중통제(Popular control)는 부단히 발전해왔다. 각급 의회, 매스컴, SNS의 활성화로 부패가 뿌리를 내릴 소지가 사라지고 있어 부패는 더이상 크게 우려할 일이 못 된다.


따라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아프간사태와 무관하며 오히려 동맹의 중요성이 강조될 것이다. 다만 차기 대통령선거에서 돌연 반미(反美)·친중(親中)·종북(從北)세력이 집권, 대미협력을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 미군의 철수문제로 안보를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제정세는 항상 가변적이기 때문에 안보자강(自强)을 위한 노력은 지속되어야 하고 국력에 상응한 안보태세를 굳게 다지는 길만이 모든 상황에서 우리를 지킬 방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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