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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3-08 19:2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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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자유, 무죄추정 원칙, 언론의 자유 등 공화정의 성취를 이용해 공화정을 공격하는 전체주의
-전체주의에는 북한식 ‘최고존엄’ 같은 하나의 인격만 존재. 인민들의 자유와 인권 전면적으로 부정
-공화정과 양립할 수 없는 전체주의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내전(civil war)을 피할 수 없다

바이마르공화국의 해체와 나찌즘의 등장으로 고통당한 독일은 2차세계대전 이후 ‘방어적 민주주의’ 개념을 정립하여 공화정 체제를 적극 지켜내고 발전시키고 있다.


공화정 체제가 전체주의 체제에 취약한 이유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전체주의자들이 비밀결사 등의 방법으로 스스로를 조직화한 후, 사상의 자유, 무죄추정 원칙, 언론 및 출판의 자유 등과 같은 공화정 체제에 의해서 비로소 보장된 자유(권)의 도움으로 자신들의 의도를 숨긴 채 이른바 ‘진보’를 가장하여 세력을 끌어 모아, 전체주의적 권력탈취를 쉽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전체주의는 공화정이 정립된 이후인 20세기에 들어서 비로소 발전할 수 있었다.


▲ 전체주의는 공화정의 성취를 이용해 공화정을 공격한다. 사진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우리 사회에서도 반 공화주의를 지향하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종북 세력들이 공화정 체제에 의해 보장된 자유권에 의거하여 신변을 보호받으며, 자신들의 의도를 감추고 레닌식 정치적 폭로나 대중선동을 통해 세력을 키워온 내력이 있다.


20세기 인류의 경험을 통해 살펴볼 때 공화정과 전체주의 정체는 양립할 수 없는 대립물이다.

공화정과 양립할 수 없는 전체주의 정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그 사회 내에 많아지면 내전(civil war)을 피할 수 없다고 본다.

공화정 자체의 파괴를 막아내기 위해 자유권 행사를 제한하는 독일식의 방어적 민주주의의 제도화가 시급한 이유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사회구성의 모든 영역에서 흔히 진보-보수 진영이 다툰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학자나 평론가의 경우 그게 상황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적확한지 따져보는 성실함도 없이 이런 말을 사용하기도 하고, 언론의 경우 어느 무리에게 찍히지 않기 위해 기계적으로 중립을 지킬 때 편리하므로, 별 판단 없이 진보-보수라는 분류법을 널리 사용하는 듯하다.

판단에 따른 부담을 지지 않으려는 비겁의 소산이라고 본다.


최근 성폭력 피해자들의 자기고발인 “나도 당했어”(Me too) 운동에 대해서 자칭 ‘진보진영’ 인사라는 김어준은 이 운동이 어딘가에서(그는 ‘보수진영’을 지목하는 듯하다) 문재인 정권에 흠집을 내기위해 기획한 음모라는 듯한 발언을 하였다.


그 발언에 대해 자칭 ‘진보진영’ 일부에서도 부적절한 언급이라는 비판이 일자, “자신은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고 말을 바꾼다.


자칭 ‘진보’주의자들은 평소에도 필요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말을 바꿔왔던 사람들이라 그의 이런 태도는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만, 그들이 평소 인권을 입에 달고 살았다는 것이 짜증나는 대목이다.


이 사회 내에서 ‘인권’이라는 것이 그들의 행동거지를 변명하는 말 밖에 안 되었나?


사람의 자유를 제약하는 지배관계에는 다음 세 가지 조건이 존재한다.


①간섭할 수 있는 능력

②(간섭능력자의) 자의(arbitrium : 의지)

③타인의 특정 선택들에 대한 행사 등 세 가지 조건으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필립 페팃 <신공화주의> 126쪽 이하)


‘노털상 후보로 꼽히는 En선생’이 제자뻘 되는 여성 문인들을 성추행한 사건을 살펴보자(동아일보 2018-2-28).


문단의 괴물인 En선생은 문단 등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등 젊은 여자 문학 지망생들에게 간섭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간섭받는 사람의 이익이나 의견과 상관없이 자의에 의한 명령을 내렸으며, 그 여자 문인들에게 특정 행위를 요구한 것이다.


자유를 제약하는 전형적인 지배관계로서 우리 사회에서 이런 상황이 용인되면 개인의 (비지배)자유는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김어준이 “나도 당했어”라는 피해자들의 고백운동을 두고 자칭 ‘진보진영’을 공격하기 위한 음모라고 했다는데, 고백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피해자들의 자유와 인권이 더 침해되는데 그걸 방치하고 어떻게 스스로를 ‘진보’라 주장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다.


사실을 적시하는 것도 명예훼손죄가 성립한다는 이상한 법규를 악용하여 가해자의 인권 보호에 그렇게 열심히 나서는 이른바 ‘인권단체’들의 현 상황에 대한 묘한 침묵과도 쌍벽을 이루는 대목이다.


결국 먼저 진보의 기준을 바로 세우고 볼 일이다.


인류에게 있어 진보라는 것은 무엇일까?

인류의 역사가 진보한다는 것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일까?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등장 자체가 인류사의 커다란 진보라고 여러 곳에서 표현하였는데, 흔히 우리나라 ‘진보주의자’들은 대개 자본주의 욕을 엄청 하던데, 그렇다면 대체 진보의 기준은 뭘까?


나는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확대하고 확충하는 것이 진보라고 본다.

자유와 인권을 확대하고 확충하는 운동은 진보운동이고, 그 반대는 퇴보운동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자유와, 궁극적으로 자유(권)에 기초하여 개념화한 인권은 하늘에서 떨어진, 인류라는 종에게 주어진 자연발생적인 권리일까?


우리가 흔히 ‘천부 인권’이라 말하고 또 ‘생명의 본질은 자유’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자유는 인간이 생명을 얻을 때부터 주어진 권리인 것 같아 보인다.


자유를 타자의 간섭이 없는 상태로 규정하든(불간섭 non-interference 자유) 타자의 자의적 지배가 없는 상태로 규정하든(비지배 non-domination 자유), 자유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이며 제도적으로 주어진 것이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자유는 개인들이 사적이고 분산화된 수단들을 통해 만족스럽게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유는 국가가 상당히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비지배 자유의 개념을 공화주의의 중심적 개념으로 정립한 현대 공화주의 이론가 필립 페팃은 비지배 자유를 실행할 두 가지 전략을 예시한다.


첫째,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간섭을 견제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상호적 권력을 갖는 전략. 둘째, 헌법규정 전략, 즉 비지배적 수단으로 비지배를 증진시키려고 하는 국가를 획득하는 전략을 상정해 볼 수 있다고 한다.


어떤 전략이 올바를까?


“상호권력 전략의 단점은…(중략)…지배없는 삶을 성취하는 어떠한 다른 방법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의해 부과되는 제약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비지배 자유는 모든 사람에게 상호 동등한 권력을 주고 자연 상태에 던져두는 분산적 추구 방식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상호권력 전략은 결과적으로 홉스적 상황으로 귀결되고 만다는 것이다. 결국 현대의 공화주의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비지배 자유를 확대하는 전략은 헌법규정 전략 밖에 없다.
– (필립 페팃 <신공화주의> 194쪽 이하)


인류의 역사와 세계에는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확대하고 그 내용을 확충하는 체제나 국가 및 시대가 있는 반면,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축소하고 그 내용을 억압하는 체제나 국가 및 시대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어떤 체제나 국가를 선택하는 것이 자유와 인권을 더 확대하고 그 내용을 확충하는 것인지 판단하고, 그런 방향으로 선택하여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진보운동’이라 할 것이다.


인류는 자신들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군주정과 봉건신분제를 타도하고 공화주의 정치체제를 만들었다. 19세기까지의 공화주의 정치체제는 전제정 체제에 대항하여 백성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혁명을 수행하는 기치였다.


그러나 전제정 체제가 거의 타도된 20세기 들어 공화주의를 파괴하려는 전체주의 정체가 등장하였다. 현실 사회주의란 이름의 좌파 전체주의든, 나찌즘이나 파시즘, 군국주의 등 우파 전체주의든, 인민들의 자유와 인권을 축소하고 악화시키는 데는 별 차이가 없었다.


전체주의 체제는 하나의 인격만 존재하는 체제로서 인민들의 자유와 인권이 전면적으로 부정되는 정치체제이다. 현재 북한의 정치체제가 바로 그러한데, 북한에서 말하는 ‘최고 존엄’의 존재 자체가 이를 상징한다.


누군가 최고로 존엄하다면 그 존엄의 자의에 따라 타자에게 특정한 선택을 강제할 수 있으므로, 인민들에게 (비지배)자유가 보장되지 않고, 따라서 그런 나라를 공화국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소중한 자유(권)의 한계는 없는 것일까?


먼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

또 자유권 행사가 자유를 보장하는 공화정 자체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


이 점은 근대 공화정을 수립한 프랑스 혁명을 이끈 로베스피에르가 직접 기초한 1791년 헌법에도 잘 표현되어 있다.


“…자유는 오직 다른 사람의 권리를 해치지 않고 또한 공공의 안전을 해치지 않는 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데 있으므로, 법은 공공의 안전이나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여 사회에 해를 끼치는 행위들에 대한 형벌을 규정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진보-보수 진영 구분은 아주 잘못된 표현이다.


우리 사회에는 크게 나눠,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확대하고 확충하는 공화주의 체제나 국가를 지키고 발전시키려 노력하는 진정한 진보주의 세력과, 반대로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고 축소하는 체제나 국가를 지향하는 퇴보주의 세력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덧붙이는 글]
['제3의 길' 轉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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