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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섭일 칼럼] 프랑스 마크롱이 드골을 21세기 ‘대정치 사부’로 추앙하는 이유 - 마크롱, 석학 아탈리 등의 지도자교육과 대통령실습을 마쳐 - 적색 전체주의 이기려면 드골과 마크롱을 연구해 내공을 쌓아야 - 드골, 1945 사회보장실시로 공산당의 강력한 혁명의지를 꺾어
  • 기사등록 2021-06-02 18:06:19
  • 수정 2021-06-02 18: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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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드골 전 대통령


문재인정권이 지난 4년 친북-우리민족끼리 정치에 여념이 없더니 지난 5월 22일 한미정상회다에서는 한미동맹의 선수처럼 설치는 모습이 참으로 어색하다. 워싱턴에 가면 바이든과 춤추고 평양 가면 김정은과 포옹하며 베이징에 가면 시진핑에 절하는 갈팡질팡 외교로 국가의 신용과 품위, 독립성을 떨어트린 문재인에게 박수치는 봉건시대 백성의 모습도 일부 보인다.


4.19, 5월 광주, 6월항쟁의 민주투쟁결과가 이런 것이었나? 자유민주 훈풍을 기대한 유권자에게 실망과 분노마저 주는 정치풍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대한민국 상황에서 저절로 새 정치로 명성이 자자한 프랑스의 마크롱대통령이 더욱 존귀하게 느껴진다. 최근 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며 프랑스 5공화국 창설 대통령인 드골장군의 레지스탕스를 호소하던 런던 BBC방송 80주년과 파리해방 76주년 드골추모기념식을 가졌다. 또 나폴레옹 사망 200주기 기념식도 파리의 무덤에서 있었다. 그 자리에서 마크롱은 21세기의 국가사부로 ’위대한 드골‘의 유지에 따라 새 프랑스건설을 선언했다.


[영국의 보수-노동당 선진국당명 이념과 일치, 한국은 불일치]


2021년 3월 대선에서 여야정 치인이 청년세대의 정치혁신을 합창함에 따라 2030 청년세대가 ‘국민의 힘’ 당 대표 후보로 급부상했다. 젊은 세대로 인물교체가 정치혁신이라는 국민여론이 모아지고 는 것이있다.


무조건 청년들의 집권만이 혁신이요 쇄신인가? 과연 구미 선진 정치모델은 무엇이 변화요, 혁신으로 보는가?.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은 70대의 정치원로였다. 선진정치는 정당의 정체성, 가치관, 이념을 제일 중요한 혁신조건으로 본다. 한국정치는 현재 ‘진보와 보수’로 양분되어 있다. 선진권에서는 대체로 우파와 좌파, 그리고 중도 좌우파와 일부 극우 극좌파정당들로 다원화되어 있다.


대체로 정당의 이념, 정체성과 가치관을 당명으로 표현한다. 독일의 경우, 기독교민주당(기민당)이 우파이고 사회민주당이 좌파이다. 프랑스도 공화당(드골파)이 보수, 사회당이 진보, 영국도 보수당과 노동당, 스웨덴도 보수당과 사회민주당이 양립한다. 20세기 중반부터 보수(우파)와 진보(좌파)의 명칭을 대신 당명으로 이념을 직접 표시한다. 20세기를 지나면서 이념의 극변에 따라 당명은 당의 이념의 표현이 되었다. 유권자에게 직접 정체성을 전달하는 방법으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당명도 구체적으로 변화해 왔다.


20세기 초반까지는 진보와 보수라는 보통명사가 시대를 반영했지만, 20세기 후반 소련세셰공산주의의 해체 후, 진보는 사라졌다. 1917년 레닌의 러시아혁명으로 자본주의-민주체제가 구시대 이념으로 배척되었고, 공산주의혁명으로 무산계급주도의 공산사회를 미래로 규정해 진보호칭이 일반화되었다. 1989년 베를린장벽붕괴와 1992년 소련세계공산주의의 자진해체로 진보대신 사회민주당, 사회당으로 일반화되었다.


프랑스의 마크롱대통령의 대개혁은 일반적으로 중도우파로 규정되며, 좌우파의 양립에서 중도가 차별화되고 있다. 독일은 기독민주당(기민당), 사회민주당, 녹색당으로, 영국은 보수당, 노동당으로 150년전 창당시 당명을 그대로 쓰고 있다. 즉 당명이 모두 직접 이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정당들은 당명으로 이념을 표시하지 않는다. 여당을 ‘더불어민주당’, 보통 ‘민주당‘으로 부르며, 야당은 “국민의 힘‘으로 호칭한다. 진보 ’민주당‘ 보수 ’국민의 힘‘으로 호칭해 당명이 이념과 일치하지 않는다. 여당을 진보와 야당을 보수로 계속 부르고 있다. 그래서 유권자가 정당의 이념을 전혀 알지 못하는 정체성의 혼란상태이다. 당명으로 이념을 알 수 없는 괴이한 정치이다.


[6.25 남로당 닮은 ‘민주당’, ‘국민의 힘’에 대패 후, 변함없는 전체주의 정치]


1989년 11월 3일 베를린 장벽붕괴가 마르크스-레닌의 공산주의진영을 멸망시켜버렸다. 그래서 1990년11월 “세계의 유일한 보편적 진리는 자유민주주의”라고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정상회담에서 그러한 내용의 ‘파리헌장’을 선포했던 것이다.


오늘 21세기 국제정치는 대체로 자유민주주의대 사회민주주의의 양대정당의 결선투표제에 의한 정권교체라는 정치체제로 안정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정치는 집권 민주당이 30여년전 이미 소멸된 마르크스레닌주의이념을 추종하는 NL-PD라는 정치세력이 ‘민주’와 ‘정의’등의 위장당명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혼란을 빚고 있는 것이다.


2021년의 한국정치는 민주주의정치에서 벗어나 있다. 당명은 민주당인데 계속 진보정당을 과시한다. 선진국에서 민주당은 우파정당을 의미한다. 지난 4년여 문재인의 정책들은 전혀 민주주의적이지 않다. 언론이 586운동권, ‘주사파’운동세력으로 부르지만 국민다수가 옛 소련공산당이나 6.25전쟁에서 경험한 남로당원을 연상한다. 그래서 서울-부산 보궐선거에서 진보 ‘민주당’이 우파 ‘국민의 힘’에 대패당한 것이다. 선거후에도 문재인과 민주당정책과 통치방식은 조금도 바뀌지 않고 ‘진보정책을 지속하고 있다.


선거후 청와대와 각료인사도 외피(外皮)만 약간 부드러운 수준이며, 골수 586과 문재인 친위세력이 ‘문자’를 계속 날리고 있다. 요컨대 변화가 조금도 없다는 것이다. ‘적색 전체주의’ 정책을 계속 집행하는 것이다. 진보진영에서 이재명 경기지사를 필두로 많은 대선후보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다. ‘국민의 힘’도 오십보백보다.


예비선거에서 0선 10년 당원의 이준석 후보가 1등으로 예선통과해 대이변을 낳고 청년공포가 정계에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변화징조가 감지되지 않는다. 문재인은 조 바이든 미대통령과 정상회담 후 4년간 무시했던 한미동맹복원의 선전만이 요란하다. 대북유화, 대중굴욕, 대일증오, 한미동맹복권으로 정치혼란이 극에 달하고 있다.


‘국민의 힘’도 이준석 후보의 젊음으로 충격을 주었지만, 4선 나경원. 5선 주호영등을 청년바람만으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주로 인신공격으로 1등이 나왔지만 결선은 당원-유권자의 직접투표임으로 제1야당의 당수다운 지략과 경험, 비전과 국가경영관리의 수련 등을 쌓았다는 리더십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여야를 불문하고 당수후보가 많은 것은 정치의 장점일 수 있다. 그런데 대통령, 당수감이 왜 이렇게 많은가? 감투탐욕 고질병의 폭발에 가깝다는 것이 필자의 관점이다..


한국정치는 오랫동안 정책은 없고 감투싸움으로 일관해 국민에게 아무석도 이룬 것 없는 무능부패정치의 표본일 뿐이다. 막강한 적색전체주의 집권세력에 이기기 위해서는 실력, 경험, 수련, 협력이 너무나 없다. 이래서는 유권자의 실망이 폭발할까 두렵다. 김종인 전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이 최연소 마크롱 대통령을 본보기로 자주 거론하는데, 훌륭한 모델임이 확실하다.


[마크롱은 아탈리의 정치경제외교, 바로데 파리10대총장의 정치철학 내공을 쌓았다]


필자는 2년전 4.19단체 ‘4월회’주최 시국강연회 특강에서 마크롱을 처음 소개하면서 조국사태와 민주당정부의 ‘내로남불’과 ‘사회주의’를 ‘민주’당으로 위장한 것으로 규정하고, ‘한국판 마크롱’의 출현 기대를 역설했었다. 연설내용이 SNS에 널리 확산되면서, 중앙일보와 조선일보가 각각 한 면을 할애해 연달아 ‘마크롱 현상’을 크게 소개했었다.


여기서 강조할 것은 마크롱은 수많은 수련과 내외공의 결과 등장한 재무성 괴위관료출신 청년정치인이라는 점이다. 대석학 자크 아탈리와 대철학자이며 은사인 파리10대학교 바로데 총장이 수년간 수련과 학습, 실습 등 내공을 쌓은 결과이다.


마크롱은 특히 올랑드 대통령 비서실에 장기 근무하면서 견습을 마치고 신당 창당에 뛰어들었다. 이준석 후보는 대통령이 아니라 제1야당 당수의 2차 결선투표를 앞두고 있지만, 다음에는 대선후보로 전진해야 할 정치인이다. 재선 진출이 확실한 마크롱은 2022년 5월 대선에서 극우 프랑스국민연합의 마린 르펭과 2차로 대결한다. 르펭후보는 평생 패배만 당한 극우 국민전선후보 쟝 마리 르펭의 딸로, 현재 여론조사에서 마크롱과 초박빙이다.


마크롱은 5년전 정치빅뱅을 단행해 중도적 신진후보와 좌우파의 전문정치인들을 영입함으로서 중도보수의 ‘공화국전진’당을 창당했다. 결선투표에서 승리함으로서 일약 구미정치의 청년지도자로 등장했다.


드골의 ‘1945년 세계제일의 사회보장제도’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사회경제정책을 개혁했다. 프랑스의 ‘세큐리테 소시알(사회보장제도)’을 레지스탕스출신 사회당의 미테랑당수와 모리스 토레즈 공산당수에게 만들도록 지시했는데, 당시 사회보장제도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절반 가까운 도시의 파괴와 연합군과의 전쟁수행으로 전사한 젊은이들, 레지스탕스의 내전에 투신했다가 독일점령군에 처형된 60여만명의 젊은 저항투사 및 전시국민의 빈곤문제해결을 위한 드골의 특별조치였다. 드골의 사회보장제도는 오늘까지 계속되는 세계 제일의 사회보장으로 유명하다.


마크롱은 1940년 런던에 망명한 드골이 1940년 7월 8일 BBC방송을 통해 “프랑스 국민이여 저항하라!”고 절규했다. 그로 인해 수많은 프랑스인들이 레지스탕스에 자원함으로써 4년간 내전을 했다.


독일점령군과 게슈타포의 혹독한 탄압으로 무려 60여만 명의 프랑스인들이 처형 또는 옥사했다는 것으로, 내전의 승리로 유명하다. 드골이 런던에서 총지휘했던 것이다.


마크롱은 드골이 총궐기 호소 80주년에 BBC방송에서 드골의 대국민방송을 재현함으로써, 프랑스정부의 항복을 거부하고 망명해 2차 대전에서 안팎으로 전쟁을 주도한 영국과 전승을 공유했다.


마크롱은 드골을 영웅 모델로 숭앙하며 그의 계승자로서 통치하고 있다. 르몽드지의 프레쏘 논설위원은 프랑스인들은 “BBC방송과 아울러 드골의 탄생과 사망을 동시에 추억하는 프랑스인은 오늘 너도나도 모두 드골주의자가 되었다. 극우파로 아버지가 생전 증오했던 마린 르 펭조차도 드골의 발자취를 따라 파리의 시테섬을 순례했다”고 보도했는데, “드골장군의 압도하는 역사적 유산”이 칼럼의 재목이었다.


[노르망디상륙 프랑스군, 나치방어선 뚫고 파리 해방시켜 미국의 군정을 면했다].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과 친일파문제”이란 책을 필자가 2000년 벽두에 내놓자 뜨거운 관심과 호평을 받았다. 나는 칭찬받기 위해 쓴 책이 전혀 아니었다. 우리 국민이 프랑스에 관해 잘 모르기 때문에, 특히 드골장군이 나치협력자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알린다는 언론인의 사명감으로 쓴 책이었다.


나는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흐지부지해버렸고, 이승만대통령이 이들을 고관대작으로 기용한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한국의 특수사정도 이해했다. 그럼에도 조금이라도 매국노에 대해 경고했어야 했다는 심정을 지울 수 없었다.


최근 광복회장의 거친 언설로 광복회가 불행한 투쟁장으로 전락한 것은 정부인사의 책임이 막중함을 지적한다. 이제는 드골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그의 정치업적을 이해함으로서 우리의 정치학습에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드골은 1940년 정부의 대독일휴전안(항복)을 거부하고 런던에 망명했다. 처칠 영국수상의 도움으로 프랑스군을 부활시켜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그는 국내레지스탕스의 총수로서 내전을 지휘하면서, 망명정부 ‘자유프랑스’를 세웠다. 영국에서 탱크와 대포, 전투기까지도 제작해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드골은 대독선전포고뿐만 아니라 망명지에서 프랑스군을 양성해 미국-영국과 같이 전쟁에 참전했다. 이탈리아반도부터 전투부대를 참전시켰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사단규모의 프랑스군을 투입했다.


프랑스군은 캐나다와 폴란드 군과 함께 노르망디 상류작전의 최북단을 맡아 본토회복에 나섰다. 드골의 루스벨트와의 유명한 불화는 미군의 프랑스에 군정실시에 있었다. 드골은 독일방어망을 돌파해 미군보다 수일 일찍 파리입성을 명령했던 것이다. 드골은 한편으로 파리의 레지스탕스에게 프랑스군의 파리조기입성 시나리오를 알리고 즉시 총궐기해 파리해방을 달성하라고 시달했다.


프랑스군은 나치군의 방어망을 뚫고 연합군보다 수일 먼저 파리외각에 도달했다. 앞서 파리경시청에 집결한 국내 레지스탕스는 총궐기해 독일의 파리주둔군사령관 폰 콜티츠중장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이 때 히틀러는 철수전 ‘파리를 불태우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그러나 콜티츠는 히틀러의 방화작전을 거부하고 항복을 결심했다. 프랑스부대가 파리외각에 도착했을 때 레지스탕스는 콜티츠 사령관의 항복의사를 전달받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시가전을 뚫고 샹제리제대로로 진격, 행진했다.


드골장군도 프랑스군의 선두에서 파리에 입성했다. 프랑스군이 개선문을 향해 행군할 때 독일군과 레지스탕스가 교전중이었다. 프랑스군 입성 소문이 퍼지면서 삽시간에 백만 파리시민들이 샹제리제를 메워 인파바다를 만들었다. 프랑스군 선두에서 행진한 드골은 곧 시민과 같이 행진하고 있었다. 드골은 행진하면서 총탄이 날아들자 시민 앞을 가로막아 보호하기도 했다. 드골 자신이 레지스탕스로서 전우들과 같이 파리를 해방시켰다. 독일군사령관이 항복한 것은 군민행진의 후였다.


파리해방은 미군이 아니라 프랑스군이 먼저 했고 드골이 선봉이었다. 드골의 행진장면은 2차대전 승리의 명장면으로 남았으며, 파리는 히틀러의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는 명령하는 고함소리에도 불구하고 파리는 건재했다. 드골은 곧바로 레지스탕스와 프랑스군의 파리해방을 선포하고 자신이 임시대통령인 프랑스 임시정부 수립을 내외에 선포했던 것이다.


[1945 드골의 사회보장제실시, 공산당의 반항의 선두에 설 기회 저지]


무엇보다 드골을 불안케 한 것은 파리해방주도한 레지스탕스가 거의 모두 공산당원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30만을 헤아리는 레지스탕스가 무장한 상태였다. 일거에 공산혁명으로 전진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드골은 공산당주도의 파리해방의 위기에 직면했다.


그는 무장저항군을 프랑스정규군에 편입시켜 연합군의 전투에 투입했다. 연합군에게 큰 힘이 될 만큼 프랑스군 병력이 증대되었고 여기서 프랑스가 패전국이 아닌 승전국대열에 업그레이드되는 계기를 잡았던 것이다. 드골의 용병 전략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공산당의 반자유주의적 행동을 경계해 왔다. 회고록에 이렇게 기록했다.


“공산주의의 신비(神秘)가 민중의 분노와 희망 앞에 나타났다. 구체제에 대한 반감이 비참함속에서 격화되고 저항에서 집중되며 (파리)해방에서 고양되었다. 지금이야말로 공산당에게 호기였다. 적(나치)에 대한 봉기와 계급투쟁을 고의로 혼동함으로서, 반항의 챔피언으로서 사회가 부추기는 결과로 선두에 설 기회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드골이 주도권을 잡고 개혁을 실현한 결과로서, 시민정신을 집결시키고 노동자의 협력을 획득함으로서 새경제의 희망이 없을 경우에만 국한된 사태일 것이다.”


드골은 스스로 개혁의 결과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러나 진보를 이룬다는 사람들이 거기서 이익을 찾아서는 안 된다고 하면 참다운 진보는 있을 수 없다. 해방정부는 임금인상 뿐만 아니라 노동자생활의 조건을 뿌리부터 고쳐나가는 제도를 마련함으로서 진보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다. 1945년에는 사회보장제도가 완전히 실시되어 다양환 분야로 확대될 것이다. 임금노동자는 모두 이 제도에 들어간다. 태고부터 있었던 질병, 사고, 노령(老齡), 실업등이 노동계급위에 덮쳐졌던 불안은 소멸되고 있다. 이제 가난한 사람은 있을 것이나 비참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드골은 특히 히틀러의 사형 위협이 두려워 모스크바로 도주해 스탈린의 보호를 4년이나 받고 있는 모리스 토레즈 공산당수를 “도주죄를 사면할테니 보내달라”는 요청을 스탈린에게 했다고 언론에 발표했다. 귀국한 토레즈는 과격파 공산주의자였으나, 드골대통령의 말은 모두 들어주었다고 한다. 공산당중심의 레지스탕스위원회에 연설차 드골이 나타나면 모두가 “드골 만세!”를 불렀다는 것이다. 프랑스공산당은 드골의 사회보 장등 불평등 해소를 위한 복지정책을 전쟁중에도 실시함으로서 불평등문제해결을 노동계급에게 체득시켰다.


드골은 특히 1945년초 얄타회담의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의 비밀회담에 빠진 사실에도 불평하지 않았다. 다만 귀국길의 루스벨트가 알제에서 회담을 요청했으나 거절했다. 프랑스에 군정실시문제로 어색해진데다 전후 유럽-세계문제, 나치응징문제 등이 주제인 얄타회담에 패싱 당한 것은 프랑스의 정부의 대독항복의 작용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불복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연합군과 전쟁을 수행한 드골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경우일 것이다.


[1919 파리평화회의 김규식임정특사 조선독립호소, 1945 드골 임정승인]


루스밸트가 드골의 얄타회담 불참결정은 알려진 사실이었다. 드골은 미국이 히틀러의 하수인 비시정권을 승인하고 협력하면서 드골이 영미연합군과 같이 전쟁한 사실을 무시한 점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드골은 얄타회담 해명을 위한 루스벨트의 2명의 특사를 맞아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미국대통령을 대신해서 우리 두 나라의 관계에 대한 문제의 핵심을 밝히기 위해 온 것으로 안다. 귀국은 프랑스의 위대성을 세계나 귀국에 있어서 필요하지 않는 것으로 본다는 인상을 프랑스국민이 받고 있다. 당신들이 우리 국토에 접근해올 때 이 사무실에 들어 와서까지도 차디찬 숨결을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만일 미국과 프랑스관계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기반위에 확립을 희망한다면 당신들이야말로 그것에 필요한 일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회담 직전에 유럽에 오는데 있어 당신들의 선택을 기대하면서 루스벨트대통령에게 나의 우정의 인사를 보내는 바이다.”


얄타 3국정상회담 공동성명서는 나치독일의 전후 처리와 유럽의 분할문제를 토론하고 마지막 부분에 프랑스문제에 관해 언급하고 있었다. 앞으로 미-영-소 3국이 참석한 회담에서 프랑스에게 독일 영토의 한 지대를 점령하게 함으로서 4개국 점령으로 한다는 구절로 드골의 마음을 풀어주었다.


유엔창설을 합의하면서도 미-영-불-소-중국 5개 연합국을 영구 안전보장이사회로 한다는 암시도 있었다. 드골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미국대통령은 미-영-소 3개국 명의로 된 각서를 보냈다. 미국대통령은 프랑스에 대해서 곧 개최될 유엔창설회의에 대해서 앞으로 워싱턴, 런던, 모스크바 중경과 아울러 유엔창설의 발기인국가가 될 것에 합의했으며, 앞으로 회의에 참석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미-영-소 3국이 우리에게 하는 행동은 용서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반대로 그들이 몇 가지 우리에게 통달한 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만족스런 것이었다.”


여기서 드골은 2차대전 전승 4강 대국으로서 패전국 독일의 분할점령국으로 국제적 지위를 확보하면서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부상했던 것이다.


특히 드골은 1957년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최초로 대통령과 국회의원 등 선거에서 결선투표제를 실시함으로서 세계의 정치민주화에 크게 기여했다. 오늘 마크롱 대통령이 그를 세계적 영웅으로, 국가의 사부와 정치모델로 숭앙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다.


그러나 오늘 최대의 정치위기에 직면한 대한민국은 2022년3월 대선을 앞두고 여야의 정치투쟁이 본격화되고 있다. 우리정치에 루스벨트, 처칠, 드골, 미테랑, 콜 등 확실한 이념적 정체성을 갖고 독일통일과 29개국 동서유럽통합을 이룩한 정치거물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드골은 프랑스가 상해임시정부를 승인한 사실을 첨기한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김규식 특사가 1차 세계대전종전 베르사이유 평화회담에서 독립선언문을 전달하고 1년여 독립운동을 한 역사적 관계의 답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계속)


*필자: 주섭일(언론인, 전통일준비위 언론자문위원, 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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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학 박사
    전 중앙일보 파리특파원-국제문제대기자

    저서: 사회민주주의의 길(사회와 연대, 2008) 등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 (사회와 연대, 2017)
    특파원이 추적힌 북한 핵(사회와 연대, 2016)
    한반도 통일대박과 1990 독일통일 (사회와 연대, 2014)
    북의 3대 세습과 평양의 봄(사회와 연대, 2011)
    정치변화와 사회민주주의 (사회와 연대, 2002)
    김정일과 부시의 대타협(두리미디어, 2008)
    새정치와 이원적 민주주의 (사회와 연대, 2012)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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