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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1-05-24 18:49:20
  • 수정 2021-05-24 18:5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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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과 미국은 1994년8월5부터 12일까지 제네바에서 열린 3단계 고위급 회담을 통해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사진=Why Times DB]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에 저항하는 공산 꼴통 3인방이 20세기말에 유명했다. 동독 호네커 공산당수, ‘유럽의 김일성’으로 유명한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공산 세르비아국을 호언했던 밀로셰비치 등이 그들이다.


고르바초프는 개혁에 저항하는 3인방의 설득에 골치를 앓았다. 마르크스가 종교인을 ‘아편환자’로 지목했듯 프랑스의 정치대석학 레이몽 아롱은 공산주의자를 ‘지식인 아편환자’로 규정했다. 공산주의자는 아편쟁이처럼 불치병자라는 것이다.


레닌이 1917년 10월혁명 후 내외공산당간부들에게 “공산주의세례”를 주었기 때문에 더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동구의 꼴통3인방의 설복이 고르바초프의 최대 과제였다. 그는 설득이 실패하자 “천벌카드”를 썼던 것이다.


[페레스트로이카 저항 3인방은 어떤 천벌을 받았는가]


1989년 10월 7일 “개혁을 늦추면 하늘의 벌 받는다”고 선언한 고르바초프의 동독건국 40주년 연설은 곧 바로 거대한 동독시민의 “우리는 국민이다”고 외치는 거대한 시위로 이어졌다. 11월 3일, 드디어 동베를린 백만시민의 시위행열이 베를린장벽을 붕괴해버렸던 것이다.


호네커는 베를린주재 소련군막사로 도망쳤다. 그후 역사는 번개처럼 베를린에서 모스크바까지 공산체제를 허물고 유럽의 개혁속도를 내게 된다. 콜 총리의 “초고속통독” 정책은 동독총선, 동서화폐통합, 전독일총선등 정치일정을 마치고 1990년10월3일 독일통일을 완성했다. 소련주둔군 진지에서 떨고 있던 호네커는 “체포, 구속하라”는 함성에 쫓겨 극비로 모스크바 망명길을 떠난다.


‘하늘의 벌’은 호네커를 소련까지 추격했다. 통일독일의 베를린에 송환된 호네커는 장벽을 탈출하는 동독탈출자들에게 총을 쏜 살인범으로 재판에 회부되었고, 폐암으로 칠레의 딸집으로 보내졌다가 사망했다.


공산독재에 대한 두 번째 벌은 1989년 12월12일 루마니아의 수도 부카레스티에 떨어졌다. 차우셰스쿠는 대통령 궁앞에서 “루마니아는 안정하다”고 10만 당원에게 연설도중 돌연 청중의 “저놈 잡아라!”는 함성에 놀라 헬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도주하려고 했다. 그러나 연료 보충을 위해 군부대에 기착했다가 인민군에 체포되어 군사재판 후 내외가 즉각 총살당했다. 필자는 1989년12월 루마니아의 티미소아라에 공산당 타도시위를 취재하고 있었다.


헝가리와 국경도시에 서방 보도진의 프레스센터에서 취재에 임했었다. 루마니아는 인민군과 시민군연합이 공산체제의 호위부대 ‘세쿠리타테’와 내전상태였다. 서방 민주지원 단체들의 인도적 지원물자의 전달차편을 따라 루마니아입국을 하다가 초소의 살벌한 군경비병의 비자검문을 받았다.


“나는 북한이 아니라 남한의 신문특파원”이라고 말했다. 동행한 런던 타임스특파원이 보증해준 덕택에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서방지원단 차량을 따라 입국했고, 곧 바로 시민군과 세쿠리타테의 전쟁 한복판에 갇혀버렸다.


시민군이 “뒤로 숨어라! 총알 날아온다”는 고함에 숨으려하는데 탱크 1대가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취재진 앞에 멈춘 탱크에서 군인 2명이 땅에 엎드리게 하고 총대로 등을 눌렀다. 엎드리기 전에 우리는 남한기자와 프랑스정부의 프레스카드를 제시했으나 위협했다.


영국특파원이 “북한이 아니라 남한기자이다. 프랑스주재 특파원 증명서를 보라”면서 총을 거두라고 외쳤다. 탱크병사는 “우리는 북한의 스파이로 보았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철수했다.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구했다.


헝가리 국경의 프레스센터에 돌아와 기사작성 도중 갑자기 만세소리가 진동했다. “차우셰스쿠 부처가 군사재판에서 사형되었다”면서 만세와 박수소리가 요란했던 것이다. 헝가리 사람들이 일제히 만세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공산당을 “악마”로 본다고 운전기사가 귀띔을 해주었다. 고르바초프의 ‘천벌’은 자연스런 경고인 셈이었다.


밀로셰비치의 경우는 유고내전으로 시간을 끄는 바람에 21세기에 천벌이 내렸다. 유고슬라비아 해체과정에서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독립선언이 도화선이 된 유고내전은 유럽공산주의 해체과정에서 어려운 난제였다.


유고해체를 반대하는 세르비아가 유고연방군을 앞세워 반대했기 때문이다.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족과 이슬람교 민간의 전쟁은 ‘인종청소’라는 잔인한 내전이었다.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의 개입으로 혼전이 되었다.


특히 세르비아내부의 알바니아족이 코소보 독립을 선언하자 내전이 확대되었다. 밀로셰비치의 대 세르비아 구상이 보스니아와 코소보의 알바니아민족의 독립선언으로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1997년 세르비아 대통령임기가 끝났음에도 연방대통령으로 계속 유고를 지배했다.


내전종식을 위해 미국 영국 프랑스등 서방과 밀로셰비치는 ‘데이튼 협정’을 성사시켜 보스니아내전을 가라앉혔다. 그러나 코소보에 세르비아군 철수를 거부하자 나토의 공중폭격전쟁을 불렀다.


밀로셰비치는 유엔의 코소보독립을 인정하고 세르비아군을 철수시키고 독립을 승인했다. 2000년 대통령재선에 실패하면서 시민저항운동을 자초했다. 나토의 공중전쟁에 무릎을 꿇은 밀로셰비치는 시민봉기에 13년 통치를 마감했다.


그는 발칸반도에서 66건의 내전과 전쟁 및 반인도적 범죄로 2002년 2월 유고 국제형사재판소에 채포되어 재판도중 2006년3월11일 헤이그의 감옥에서 병사했다. 동구의 ‘공산꼴통 3인방’은 ‘개혁개방’에 반항한 결과 ‘하늘의 벌’을 받고 모두 횡사한 것이다.


[베를린장벽 붕괴 첫방문자 노태우, 남북공존 첫 이정표 세운 유일 지도자]


1989년 11월 초 청와대 이수정대변인이 서독 콜총리와 한독정상회담 소식을 알리는 전화를 해주었다. 그는 우선 조언을 해달라고 요청해 “아마도 장벽붕괴를 방문하는 첫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답했다.


이대변인은 연말 본에서 전화했다. 그는 ”VIP는 필사적으로 장벽현장방문을 희망했으나 경호실의 빈대로 무산되었다. 파리에서 만나 장벽붕괴 취재담을 VIP에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12월2일 노태우대통령은 미테랑 대통령의 국빈방문으로 한국 최초 ‘꽃가마’를 타고 엘리제 대통령궁 영빈관에 도착했다. 미테랑과 정상회담 후 3일 오후 노대통령과 단독으로 인터뷰했다.


노대통령은 온화한 표정으로 독일통일문제 등에 궁금한 점을 물었다. 나는 3가지를 이야기했는데, 당시에는 누구도 통독 가능성에 관해 말할 수 없는 상항이었다. 먼저 귀국하는 즉시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에게 정상회담을 제안해 한소수교회담을 권고했다.


다음 ”콜총리는 앞으로 고속통일에 전력투구해 통일할 것이 확실시된다“면서 ”한반도통일의 모범이 됨으로 독일전문가의 의견을 청취하면서 통일대비를 하시라“고 했다. 또한 ”콜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에 통일해야 한다고 수차 강조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는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통일은 불가할 것이라고 수차 강조했다“는 점도 알렸다.


그러면서 나는 “베를린장벽 붕괴현장을 취재해보니, 너무나 쉽게, 간단히 허물어지는 것을 현장취재를 했다. 휴전선은 한국전쟁 때문에 다를 것이나 장벽바람이 거세기 때문에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


특파원 기자회견에서 첫 질문으로 “베를린장벽이 너무 쉽게 붕괴되었는데, 귀국하시면 북측에 ‘휴전선을 확 트자고 제안하십시오’”라고 했다. 노대통령은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안팎으로 난관이 있는 것이 독일과 다른 점이지요“ 라고 말하면서 숙고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 노대통령은 ”귀국 즉시 한소, 한중 정상회담을 제안할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 대목은 한국 신문방송에 대서특필되었다.


노대통령은 한국대통령으로서 남북해빙을 위한 3원칙의 합의를 북한으로부터 끌어내는 등 평화공존을 위한 북방외교와 대북외교를 단행했다.


그는 1) 한반도의 비핵화에 합의했다. 2)남북한의 유엔동시가입과 3) 남북 상호불가침과 화해교류협정의 채결등 평화구축의 토대를 만들었던 것이다. 특히 제주도에서 한소정상회담을 갖고 수교원칙에 합의함으로서 공산권에 대한 전면적 교류협력의 길을 텄다.


노대통령의 남북협상을 통한 3대원칙 합의는 한반도평화공존의 기초를 세웠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세바르드나제 외상을 평양에 파견, 한국과의 수교를 통보했는데, 김일성이 면담조차 거부하면서 “소련은 나쁜 사회주의, 조선은 좋은 사회주의나라”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 빈의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북한핵문제가 폭발한 것은 1991년 6월13일 IAEA이사회에 외교거물 진충국을 단장으로 한 대표단을 파견한 이사회 때였다. 진단장은 “형제국 소련과 중국이 경화(달러)로 결제해야 석유를 공급받을 수 있는데, 북한에 석유수급이 문제가 생겼을 때 전기를 발전하려는 평화목적으로 핵개발을 하려는 것”이라면서 핵무기 개발을 극구 변명하는 회견을 했다.


당시 국제사회는 북한이 체제유지를 위한 핵무장을 할 것이라는 추측성 정보가 국제사회에 돌 때였다. 그때 IAEA는 북한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제2, 제3원자로를 문제로 삼았다. 진단장은 “우리에게는 핵무기가 없으며 생산의지도 없고 돈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다. 이것은 진실이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은 김대중대통령의 방북 김정일과 회담 후 북한의 핵보유설을 부정하며 한 말과 똑같은 발언이었다. DJ는 이솝우화에서 따온 ‘햇볕정책’을 대북기본정책으로 선전하면서 “북핵도 남침도 없다”고 장담했다. 그리고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다.


그러나 DJ의 장담은 완전허위였다. 오늘 북한 김정은은 핵보유국임을 스스로 자랑하면서 핵미사일에다 핵잠수함까지 보유한 핵강대국임을 북한헌법에 올리고 핵보유국임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북핵문제는 1994년 10월 북한-미국이 장기간 협상 끝에 합의한 ‘제네바합의’가 유일한 해법이었다. 필자는 제네바, 빈등에 북핵문제를 철저히 취재했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뉴스가 세계를 진동했다. IAEA에서 진충국이 “핵 의지도, 기술도, 자본도 없어 핵개발은 어림도 없다”고 밝힌 거짓말이 들통이 나면서 클린턴의 미국과 김정일의 북한이 핵협상을 했으나, 북한의 벼랑끝 전술로 제네바회담이 중단되었을 때였다.


7월10일 나폴리에서 G7정상회담취재를 하고 있다가 ‘김일성 사망’을 서울 본사 연락으로 알게 되었다. G7회담장에서도 김일성주석 사망에 대해 국제 언론이 G7여론을 취재하고 있었다. 제1보는 클린턴 당시 미대통령의 기자회견이었다.


질문) 김일성주석이 사망한 지금 제네바회담을 계속할 것인가?


답) 북한이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3단계회담을 예정대로 추진할 의사를 밝힌 것을 희망적 신호로 본다.


질문) 김 주석의 장례식에 미국대표단 파견을 제안했는데, 북이 초청하면 누구를 보낼 예정인가?


답) 북한은 외국 조문객 없이 장례를 치를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이 초청하면 대표단을 보내겠다.


G7은 김일성 사망 문제와 북핵 협상에 대해 긴급토의를 했다. G7은 ‘김 주석의 약속인 제네바회담과 남북정상회담을 실행하라’고 요구하면서 한편으로 갈루치 회담대표등 전원을 제네바 북한대사관에 조문하라고 지시했다.


김영삼 정부는 클린턴과는 반대로 한국조문단 방북을 거부하고 공안정국으로 끌고 갔다. 이로써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었고 북측의 ‘서울불바다’ 위협이 재발되면서 휴유증은 지속되었다. 클린턴의 조문제의는 북대표와 김정일의 호감을 얻어 제네바회담이 속개되었고, 1994년 8월13일 합의에 도달했다.


제네바합의는 평양과 워싱턴에 상호 연락사무소 설치, 북한에 경수로 2기의 건설, 원자력발전소 준공까지 연간 석유 50만톤 제공, 그러면서 경제봉쇄를 풀며, 특히 북의 체제보장을 하겠다고 했다. 강석주 대표는 “제네바합의문이 이행되면 핵문제는 종국적으로 해결될 것을 확신한다”고 선언했다. 북한과 미국, 그리고 한국과 국제사회는 열광적 박수를 보냈다.


[1995년 7월 북한유네스코 대사, 김정일의 개혁개방 포기 통보받고 눈물 흘리다]


1992년, 북한의 파리 유네스코 주재 김 대사는 내가 북미 제네바회담 취재를 시작한 직후 전화로 면담을 요청해왔다. 그는개방 정책을 집행하도록 밀어줄 것을 기대했다.


북미 제네바합의는 북한이 페레스트로이카를 단행하는 대신 미국이 북한신포에 원전 2기를 건설해주고 경제지원을 해주며 미북 양국이 국교를 맺으면서 북한체제를 개혁개방으로 나가게 함으로서 국제질서에 정상국가로 진입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일성사망 후 나폴리의 G7 정상회담이 클린턴에게 북한 핵 딜레마를 풀도록 위임함으로서 미국의 갈루치와 북한의 강석주가 북핵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제네바합의의 목적이었다.



1994년10월 제네바합의의 의미는 북한이라는 붉은 전체주의를 앞서 소련공산당 해체를 통해 ‘붉은 전체주의’ 소련의 세계공산주의를 해체하는데 성공한데 이은 마무리 작업인 셈이었다.


고르바초프의 ‘하늘의 벌’ 선언은 실로 공산당의 민주화개혁에 저항하는 공산주의자와 당수들에 대한 경고였던 것이다. 1995년 6월 김대사가 긴급히 나를 찾았다. 유네스코 귀빈식당에서 그는 나의 손을 잡고 “모든 것이 틀렸다”고 탄식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나에게 귀국도상에 평양에 가서 최고지도부를 개방을 설득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북한이 개혁개방을 포기하고 종전 붉은 전체주의로 전환했다는 것이다.


김대사는 1년에 봄과 가을 2번 귀국해 김정일에게 보고를 하고 귀임했다. 나는 당시 세계일보 유럽총괄총국장으로서 서울 귀임발령을 받고 있었다. “귀국도중 평양을 경유해 지도부를 설득해 달라”는 요청을 그가 한 것이다. 그는 김정일이 개혁개방을 거부함으로서 북한의 미래를 암흑으로 만들 것이라며 실망하는 눈치였다.


나는 이렇게 물었다. “김정일 개인의 판단인가, 아니면 주변 김일성 측근들의 권고, 또는 협박 때문인가?”


이런 나의 질문에 대해 “선대 원로들의 권고를 김정일이 거부하지 않았다“는 답이었다. 그 때 필자는 김대사의 요청을 수용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나는 언론인으로서 정부관료나 외교관도 아니며 더욱이 정치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한국대사관 고위당국자를 소개하겠다고 제의했더니 만나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주불한국대사관 남정우공사를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김대사의 요구를 청취하도록 요청했다. 그래서 남공사와 김대사를 만나도록 소개하고, 이들이 함께 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귀국했던 것이다. 그후 김대사와 남공사간 어떠한 진전이 있었는지를 나는 알지 못했다.


중앙일보 국제문제대기자로 1996년9월 통독의 ‘아버지’ 겐셔 전 서독외상 인터뷰를 위해 독일 본을 가는 길에 파리에서 김대사를 만났다. 나는 남공사와의 만남의 결과를 알고자 했다. 김대사는 “그 이야기는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말하면서 “ 그 후 외화벌이담당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침울하게 말했다.


나는 그가 필요하면 방한해서 김영삼 대통령을 면담해 개혁노선을 강력히 요구하도록 요청할 수도 있다는 의사표명을 잊지 않고 있었다. 김대사와의 대화성과는 물거품이 되었다. 독일통일 6주년 기념 특별대담을 겐셔와 갖고 귀국하면서 제네바합의의 무산을 우려했다. 북한이 2002년 초 파키스탄의 칸박사로부터 우라늄농축프로그램을 도입해 핵무장을 극비리에 진행한다는 정보가 돌았다.


미국의 제임스 케리 동아시아 국무차관보가 10월4일 평양방문을 한 것은 이 정보의 확인에 있었다. 그를 접대한 이는 강석주 북한외교부 1차관이었다. 그는 “우리가 우라늄농축프로그램(HEU)을 갖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는 이것의 권리가 있으며 이보다 더 강력한 무기를 보유할 권리도 있다”고 선언했다.


케리는 “무엇이라고? 방금 한 말이 틀림이 없지요? 우리의 대화에 오해가 있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강석주는 “부시정권이 적대시정책을 하는 이상 우리의 우라늄계획을 진전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다는 것인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제네바합의는 미국의 부정행위에 의해 무효가 된 것으로 본다. 다만 우리 계획을 의제로 교섭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의 적대시정책의 중단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그리하여 제네바합의는 경수로 2기공사비, 8년간 석유공급비용을 받아먹으면서 비밀 우라늄계획이 들통이 나면서 완전히 무산된 것이다.


그는 특히 고르바초프의 개혁저항자는 천벌 받는다‘의 의미를 새삼 떠올렸다. 역사는 제네바 합의의 무산으로 급속히 달려가고 있었다. 이미 세계는 소련 세계 공산주의라는 ’붉은 전체주의‘를 스스로 청산하고 서구의 시장경제-의회민주주의-3권분립의 21세기 새 시대로 도약하고 있었다.


북한 핵문제 때문에 한반도가 거센 역풍이 불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한반도에 페레스트로이카가 아닌 ’붉은 전체주의‘의 바람이 그 때부터 불기 시작했던 것이다.


겐셔는 1996년 통독 6주년기념 특별대담에서 한반도 통일전망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독일통일과 같이 남북한의 통일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세계사는 항상 분단 극복쪽으로 발전해왔다. 오늘날 북한의 폐쇄정책이 아직도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두 가지 요인에 기초한다. 북한은 처음부터 구동독에 비해 더욱 강하게 폐쇄되어 왔다. 아시아는 분단극복과 체제개방적인 협력을 목표로 하는 CSCE(유럽안보협력회의)에 상응하는 공동노력이 없었다. 나는 한국이 통일논의를 보다 강력하게 주도해야 한다고 본다. ‘평화와 자유를 통한 통일’이란 모토는 역사의 논리와 국민의 희망에 부응하는 정도(正道)이다. 한국 스스로 더욱 민주화될수록 통일을 둘러싼 북한과의 정치적 다툼에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결코 분단상태로 남아있으면 안 된다“


<</span>중앙일보 1996년10월3일자 ‘겐셔와의 특별대담’ 참조> (계속)


*필자: 주섭일(언론인 통일준비위 언론자문위원, 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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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학 박사
    전 중앙일보 파리특파원-국제문제대기자

    저서: 사회민주주의의 길(사회와 연대, 2008) 등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 (사회와 연대, 2017)
    특파원이 추적힌 북한 핵(사회와 연대, 2016)
    한반도 통일대박과 1990 독일통일 (사회와 연대, 2014)
    북의 3대 세습과 평양의 봄(사회와 연대, 2011)
    정치변화와 사회민주주의 (사회와 연대, 2002)
    김정일과 부시의 대타협(두리미디어, 2008)
    새정치와 이원적 민주주의 (사회와 연대, 2012)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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