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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2-06 19: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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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때 원피스 입고 등교한 날 선생님은 내 옆에 쭈그려 앉았다. 치마속으로 불쑥 들어온 손
-면식범에 의한 폭력은 위계질서 확신할 때 일어난다. 목사가 신도를, 어린이집 교사가 세살배기를
-다들 자기 좋을 대로 상상한다고. 내 얼굴을 한 여배우한테. 안타까워 하면서도 나를 상상하게 돼


1)
신촌역에서 한대포(한국대학생포럼) 남자 회원에게 사무실 열쇠를 건네 준 뒤 발길을 돌리는 순간, 한 남자가 뒤에서 다가와 내 팔을 확 끌어안았다. 술냄새가 났다.

 

“그쪽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런데, 방금 만나신 분이 혹시 남자친구인가요?”

 

내가 만난 한대포 회원은 남자친구가 아니었지만 나는 거짓말을 했다. 아쉬워하던 그는 내 팔을 놓아주지 않았고 벌개진 눈으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런데 남자친구가 있다고 해서 저를 거절하시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저기요, 저 쳐다보고 얘기하시죠? 지금 제가 못생겼다고 생각하시나요?”

 

그에게선 술냄새가 났고 붙잡힌 팔은 저려 왔다. 신촌역을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내 곤란을 지나쳤거나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무서웠다.

 

초등학생 때 원피스를 입고 등교한 날 아침에 선생님은 내 옆에 쭈그려 앉았다. 엄마가 입혀 준 하늘색 꽃무늬 치마 속으로 불쑥 들어온 손은 내 다리를 위아래로 쓰다듬었다.

 

“이렇게 입으면 팬티가 다 보이잖아~”

 

그 순간을 알아차리기에 내 친구들은 너무 어렸다.

 

어떤 고등학교 선생님은 다른 학생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두 차례나 나에게 키스하려고 했다. 내가 피하자 그는 나를 붙잡고 “딱 한번만 하면 안돼?”하고 물었다. 도망치고도 학원을 멀쩡히 다녔다. 내가 두려워한다는 걸 들키면 더 우습게 보일까 봐.

 

▲ 위계질서 속에서 여성성을 농락당했던 모든 여성의 이야기이다


2)
이것은 남녀간 성추행의 책임을 묻는 회고가 아니다. 이것은 모든 위계질서의 책임을 묻는 글이다. 여자 상사가 남자 신입사원의 엉덩이를 두드리는 행위는 존재할 수 있지만 여기선 직급의 수직적 거리가 남성성의 강인함을 짓누른다. 면식범에 의한 모든 폭력은 위계질서를 확신할 수 있을 때에 일어난다. 교회 목사가 신도들을 추행하고, 어린이집 교사가 세 살배기를 폭행한다. 남자 군인이 같은 남성인 자기 후임을 강간하고 그 피해자는 자기보다 계급이 낮고 몸집이 작은 다른 피해자를 만든다.

 

직장 내 성희롱은 특별법으로 다뤄지고 있고 학교 선생이, 운동 코치가, 영화 감독이 특별법으로 다스려지는 상사들과 비슷한 일을 저지른다. 위에 계신 분들이 아래에 놓인 사람들에게. ‘가장 안 그럴 것 같았던 검찰’이라고(문재인, 2018.01.30)? 군대나 검찰 같이 위계질서가 뚜렷하고 상명하복 구조가 정착된 조직일수록 그런 일은 숱하게 일어난다. 남녀가 아니라 위계에 책임이 있다. 그리고 높으신 분들은 언제나 기억하지 못한다.

 

3)
서지현 검사의 ‘고발’은 8년만에 이루어졌다. 나는 고발이 아니라 고백이라고 말하고 싶다. 성추행의 쓰라린 기억을 복기하는 데에는 고백의 용감함이 필요하다.

 

밖에서 그런 일을 당하고 왔다는 걸 부모님이 알게 되는 게 무서워서 몰래 동생 앞에서만 눈물을 훔친 적이 있다. 어린 남동생은 말한다.

 

“누나, 그렇게 괴로우면 경찰에 신고해서 벌 받게 하자. 여자들은 왜 그런 걸 신고하지 않는 거야?”

 

고발은 언제나 제3자의 눈에만큼은 가장 명쾌한 최선이다. 그러나 고발이 아니라 고백이다.


야, 나는 그 때라면 그냥 떠올리기도 싫다고. 그냥 없었던 일로 하고 싶다고. 나만 모른 체하면 없었던 게 되는 건데 왜 내가 그 순간을 또 떠올려야 해. 나를 아는 사람들이 다 알게 될 거야. 그 선생을 아는 사람들이 다 알게 될 거야. 모두 머릿속에 같은 그림을 그릴 거야. 그 선생의 얼굴을 한 악마가 익숙한 내 얼굴의 여배우의 옷 속에 손을 집어넣고 무슨 짓을 하는지, 어디를 만지는지. 다들 자기 좋을 대로 상상한다고. 내 얼굴을 한 여배우한테. 사람들은 나를 안타까워하면서도 나를 상상하게 돼.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네 머릿속엔 코끼리의 가장 뚜렷한 형상이 나타나겠지.


동생은 도저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나를 안아 주었다.

 

4)
검사는 거짓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고에 관한 사연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이니까. 검증 없는 발언만이 증언이 되고 피해자 편에 선 여론은 때로는 진실보다 강력하니까.


그러나 나는 저 여검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수직선 위에 일렬로 선 사람들과 그들의 권위, 위계질서의 책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위계질서에 짓눌린 순간 여성성을 농락당해야만 했던 모든 여성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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