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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2-04 19: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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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 등 우리나라 좌익들은 루이제 린저가 미화했던 ‘김일성 왕국’이 이상향 샹그릴라와 같다고 믿었다
-루이제 린저의 모든 행동과 작품들은 거짓과 자기 미화의 병적인 두뇌 구조에서 만들어진 위선의 산물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북한에는 형무소가 없다’, ‘범죄 자체도, 가난도 없다’며 북한체제 미화

히틀러와 김일성을 추종, 숭배했던 독일의 여성 소설가 루이제 린저.

 

한국의 종북분자들은 루이제 린저를 좋아한다. 80년대 NL파와 좌익들은 루이제 린저란 독일 소설가가 미화했던 ‘김일성 왕국’이 영국작가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의 이상향 샹그릴라와 같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루이제 린저의 과거가 폭로되기 전까지 그녀의 소설은 꽤 유명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독문학자 전혜린이 번역한 <생의 한 가운데서>는 그녀의 과거를 미화한 정말 ‘소설’이다.

 

독일 작가 중 북한의 김일성을 만났던 작가는 루이제 린저 뿐이다. 독일에서 친북작가가 탄생했던 것이다. 그녀는 윤이상과도 절친(切親) 관계였다. 종북, 친북이란 공통분모가 있는데 왜 그렇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루이제 린저의 모든 행동은 거짓과 자기 미화의 병적인 두뇌 구조에서 만들어진 위선의 산물이었다.

 

루이제 린저는 히틀러가 집권했던 1933년 교사 생활을 처음 시작했다. 그녀가 봉직했던 학교의 교장은 유태계였다. 그녀는 그 교장을 마치 유다가 예수를 팔아먹듯이 나치에 밀고하여 그녀 자신의 출세에 이용했다.

 

루이제 린저와 오랜 교우관계를 가졌던 가톨릭 신학자 호세 산체스 데 무리요(Jose Sanchez de Murillo) 신부는 처음 루이제 린저의 전기를 쓰면서 그녀를 이상적인 인물로 그리고자 했다.

 

그러나 자료를 모아서 검토해가면서 ‘아! 이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에 다양한 자료를 찾아본 결과 그녀가 자기에 대해 한 이야기가 모두 거짓이란 사실을 밝혀내고, 사실 그대로 루이제 린저의 실체를 밝힌 전기 <모순의 삶, Ein Leben in Widerspruchen, 2011>을 펴냈다.

 

무리요는 루이제 린저가 나치에 꽉 엮여진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린저는 젊은 나치 기간요원으로 나치와 함께 성장하며 출세했던 것이다. 유태계 교장을 고발한 지 1년 만에 그녀는 나치 청년여성 조직인 독일청년여성동맹(Nazi-Organisation, Bund Deutscher Madel, BDM)의 교육소 책임자가 되었다. 젊은 나이에 이미 나치의 주요 인물로 벼락출세했던 것이다. 그녀는 이후 악명 높은 나치 선전상 괴벨스의 영화부서인 UFA가 제작하는 선전영화의 대본작가로 활약했다. 나치의 문화 부역자가 되었던 것이다.

 

1945년 패전과 함께 나치정권이 몰락하면서 나치 선전 활동을 했던 그녀가 또아리를 틀 수 있는 곳은 가톨릭 좌파 쪽이었다. 그곳에는 순진한 평화주의자들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신상조사도 받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어느 나라든 교회는 신앙심을 위장해 들어온 불순세력도 쫓아내지 않고 신상조사도 하지 않는다. 따라서 불순한 과거를 가진 사람들도 들어올 수 있고 또 그들의 활동에 따라 교회의 기능을 자신의 목적에 적극 활용할 수도 있다.

 

린저는 교회의 좌파들에게 글재주를 인정받았다. 기자 자격으로 로마에서 개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Second Vatican Council, 1962~1965)를 취재하여 이 역사적 공의회에 관한 기사도 썼다. 변신에 능한 그녀는 가톨릭교회 조직 안에 머물면서 열정적인 가톨릭 비판가란 명성을 얻었다. 60년대의 독일은 가톨릭 교세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1968년 서독은 미국과 프랑스에서와 같이 반권위주의 좌파 학생운동이 요원의 불길같이 번져나가던 때였다. 극좌 테러단체인 적군파가 대량소비사회를 없애겠다고 프랑크푸르트 상업지구 번화가에 있는 백화점에 방화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주범인 안드레아스 바아더(Andreas Baader)와 군드룬 에슬린(Gudrun Esslin)이 체포돼 슈투트가르트의 슈탐하임 교도소에 갇혔다.

 

이것은 린저가 돌출 행동으로 자기 마켓팅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비록 네거티브 마켓팅이지만. 그녀는 이 극좌 테러범을 석방하라고 공개 편지를 발표했다. 그후 수감돼있던 두 방화범은 다른 테러범들과 함께 감옥에서 밀반입했던 권총으로 자살하여 서독 전국을 떠들석하게 했다.

 

극좌 테러리스트를 옹호하는 지식분자에서 루이제 린저는 1972년 서독 하원 총선에서는 갑자기 사회민주당의 빌리 브란트를 지지하는 지식인으로 변신했다. 정치적 ‘정조’는 중요하지 않았다. 부평초처럼 그때그때 유리한 상황에 따라 물결 치는대로 흘러가는 삶이었다.

 

그녀에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깊은 무의식의 심연에 자리잡고 있는 강력한 독재자에 대한 ‘정신적 위탁과 열광’이었다. 그런 점에서 히틀러는 린저의 종교이며 우상이었다. 그 히틀러가 사라진 후 방황하던 린저가 북한의 김일성에서 히틀러와 같은 존재감을 찾았던 것이다. 루이제 린저와 김일성을 연결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 루이제 린저는 10번이나 북한을 방문하며 최고급 국빈 대우를 받았다.


린저는 김일성을 숭배하고 김일성으로부터 환대받는 것을 너무 좋아했다. 그녀가 윤이상과 얼마나 친했던가는 그녀가 편찬한 책 <상처받은 용, 이상 윤(Isang Yun)>을 보면 알 수 있다.

 

린저는 1980년부터 10번이나 북한을 방문하며 최고급 국빈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린저는 <북한 기행문, 1981>에서 북한 김씨 절대왕조를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위대한 지도자’, ‘북한에는 형무소가 없다’, ‘범죄 자체가 없고 가난이 존재하지 않는다’, ‘교화소는 쇠창살이 없고, 교육생들은 언제든 자기가 원하는 시점에 교화소에서 출소할 수 있다’ 등등 완전히 돌아버리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김일성 ‘용비어천가’를 썼다.

 

1986년 평양을 방문했을 때는 김일성대학의 명예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북한에는 교회의 탑이 없고 교회 종소리가 없어서 좀 섭섭했다는 말을 남겼다. 행간을 읽으면, 그녀가 믿는다고 말했던 가톨릭교회와 종교는 말살되었다는 말이 되겠다.



[덧붙이는 글]
['제3의 길' 轉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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