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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6-25 12: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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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지역에서 잡혀온 빨치산 가족들이 허기져서 배급된 밥을 먹고 있는 사진을 촬영한 것이다. [사진=Why Times DB]


1950년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낙동강방어선을 돌파한 국군과 유엔군이 총반격을 시작하자 미처 후퇴하지 못한 낙오부대와 낙오자들은 포로로 대부분 잡혔으나 일부는 각 지역의 깊숙한 산악지대로 숨어들었으며 현지의 남한출신 부역자들과 합세하여 비정규전을 수행하기 위한 조직을 구성하여 전쟁기간 뿐만 아니라 전쟁이 한참 끝난 1956년 말까지 소탕전은 계속되었다.


이들의 활동을 살펴보면 1950년 10월경에는 공비들의 규모가 2만5000여 명에 도달해 자체적으로 남부군단, 제526부대, 인민유격대 남부군단 전북도사단, 전남도당 유격대 및 제주도 유격대로 구성되었고, 지리산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부대가 이현상이 지휘했던 남부군단이었다.


이들은 지리산이 북한군의 점령지역에 속해 있을 때에는 북한군의 병력 보충대 역할을 했으나 지리산이 고립되자 곧바로 산악지대로 피신하여 야간을 이용 평강을 거쳐 11월 중순경에 부대 재편성을 한 뒤에 12월 21일 재차 태백산 준령을 타고 남하하여 충북 단양에까지 내려왔다 .


여기에서 잠깐 활동을 전개한 뒤 드디어 조선민주유격대 남부군단으로 개칭하고 본격적인 비정규전 부대로 발전시켜 나갔으니 이부대가 이른바 남부군이었다.


이에 국군은 군·경 합동으로 1950년 10월 4일부터 1953년 5월 1일까지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특히, 지리산지구에서는 국군 제11사단, 백야전투사령부 산하 수도사단, 제8사단, 제1사단 등이 3차례에 걸쳐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수행했으나 그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험준한 산악지형에 익숙한 이들은 경찰지서 등과 관공서 등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그 이후에도 지리산을 비롯한 삼남지역에서 빨치산들의 활동이 극에 달하자 박전투사령부는 설치와 함께 비상계엄령까지 선포했다.


계엄령선포 이후에도 한전투사령부, 남부지구 경비사령부로 이어지는 공비토벌작전이 계속되었고,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3년이 훨씬 지난 1956년 12월31일 지리산 공비들이 거의 토벌되었다고 판단, 작전을 완전히 종료하였다.


지리산을 거점으로 한 빨치산들은 주로 낮에는 산에 숨어 있다가 밤에만 민가에 내려와 선량한 양민들을 괴롭히고, 키우던 짐승들을 끌고 갔으며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따라서 낮에는 국군의 눈치를 보아야 했고 밤에는 재산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부역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한 때는 이들의 세력이 너무도 왕성하여 고창, 영광, 장성을 산을 타고 오르내리며 양민들을 학살하고 괴롭히는 일을 계속했다.


그리고 이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은 먹기 위해 가지고 다녀야 했던 숟가락이었다.

숟가락이 그들이 빨치산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증표였다.


이렇듯 지리산을 거점으로 전라남북도의 산악 지대를 돌며 전쟁기간은 물론 휴전협정 이후까지도 그들의 빨치산활동은 계속 되었고, 이후 빨치산이었거나 부역에 가담한 사람과 가족까지도 연좌제에 묶여 각종 사회활동에 제약을 받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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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재영 객원 논설위원 송재영 객원 논설위원의 다른 기사 보기
  • 전,한국검경신문사 보도본부장 겸 논설위원장
    전,새한신문(현,새한일보사 )부사장
    전,소셜네트웍기자협회 고문
    현,국제언론인클럽,사단법인 한국언론사협회 논설위원 등재
    고정칼럼:송재영의 우이독경
    전,4대개혁추진국민운동 본부장
    전,국민행복당 중앙당 초대사무총장.
    현,자유한미연합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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