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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6-25 09:08:02
  • 수정 2019-06-25 11:2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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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단둥에 있는 단교. 6.25때 폭파되어 단절된 이 다리 입구에 압록강을 건너는 중공군 동상이 있다. 오른쪽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는 사람은 6.25참전시 사망한 모택동의 아들 모인영이다. [사진=Why Times]


[소련의 대중국 관계와 한국전쟁에 대한 소련의 전략적 의도]


1949년 기간 중 상기와 같은 국제정세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한국 방위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면 1950년 1월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6.25전쟁 개전에 대한 상기 주장의 大前提이다.


그러나 6.25전쟁에 대한 스탈린의 전략적 의도를 앞 章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국제환경의 변화와 애치슨선언을 연결하여 파악하려는 것은 소련의 대중국관계에 대하여는 내색을 하지 않고 국제환경 변화론만을 언급한 스탈린의 말을 고지식하게 믿고 그의 眞意를 간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章에서는 중국 공산당 창당 후 우호적이라고 평가할 수 없는 소련의 대중국 태도와 스탈린이 중국공산 혁명 달성 후 중국을 한국전쟁 개시 결정에 개입시키고 개전 후부터 참전을 필사적으로 유도하고 휴전협상 종료시까지 전쟁을 장기화하도록 중국측에 요청해 온 태도들을 차례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1.중국공산혁명에 대한 소련의 방해


1921년 창당이후 중국공산당은 소련공산당과 굴곡이 많은 관계를 유지해왔다. 모택동 자신이 1956년 3월 31일 북경주재 소련대사 유딘(Pavel F. Yudin)에게 토로한 바와 같이 스탈린은 1926년 중국국민당을 혁명주력세력으로 평가하고 중국공산당이 국민당 산하에 들어가 통일전선을 형성할 것을 지시하는 등 중국문제에 대한 로선 정립에 많은 오류를 범했다.


1920년대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부로서 레닌(V. I. Lenin) 死後 코민테른의 지도자인 스탈린의 지령을 충실히 이행하였고 1930년대 장정기간을 제외하고는 모택동은 코민테른과 소련공산당에 당의 중요사항을 일일보고를 하였으며 1956년 중소분쟁이 대외적으로 공개되기 전까지는 소련과 다른 의견이 있더라도 공개토론을 회피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끊임없는 의심과 우려를 하면서 모택동을 낮게 평가하였다. 스탈린은 “모택동은 중국의 푸가쵸프(러시아 농민혁명 지도자)와 같은 농민지도자이다. 그는 자신이 맑스의 자본론을 읽어 본 적이 없다고 고백할 정도로 맑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몰로토프에게 말할 정도로 모택동을 형편없게 평가하였다.


또한 스탈린은 모택동과 적대관계에 있는 蔣介石주도 국민당 군대에 對日 抗戰 支援名目으로1937년부터 1939년 까지 3년동안 3억불의 차관, 군사고문관 500명 및 약 6만톤에 이르는 군수물자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스탈린은 1940년대 초 중국공산당내 모택동의 위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전개한 중국공산당 개혁운동을 중국공산당내 친소파 숙청으로 의심하였고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는 외몽고 독립, 만주지역에서의 제반 이익을 확보하는 대가로 國·共內戰에 중국공산당을 지지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기도 하였다.


최근 중국에서 발간된 회고록, 대만에서 공개된 자료, 소련 외교부 및 공산당 기록을 보더라도 스탈린은 세계 제2차대전 종료후 중국공산당이 추진하고자 하는 공산혁명 시작을 지원은 커녕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48년 스탈린을 만난 유고 공산주의자 블라디미르 데디져(Vladimir Dedijer)의 회고록에 의하면, 스탈린은 1945년 모택동에게 장개석과 평화협상을 할 것과 중국혁명을 추진하지 않도록 권고하였다.


또한 스탈린은 1949년 7월 소련을 방문한 劉少奇에게 중국을 너무 몰랐기 때문에 중국혁명을 방해하였다고 하면서 중국 내전기간중 중국공산당을 충분히 지원하지 못하였음을 스스로 사과할 정도였다.


중국공산당 자료에 의하면, 만주 주둔 소련사령관은 중국공산군의 만주진입을 제한하려 하였다. 소련측은 중국공산군이 만주의 제1도시인 瀋陽을 점령하는 것을 막으려 하였으며 모택동이 있는 延安으로 대표단을 파견하여 중국공산군은 도시에 진주하지 않으며 소련군 점령지역에서 작전을 하지 않으며 ‘8로군’의 이름으로 작전을 하지 않는다는 세가지 조건을 합의하고 동 조건 이행을 군사력을 동원하여 중공측을 강요하였다.


소련공산당이 공개한 1948년 9월 6일자 중국공산당 동북위원회 서기의 만주주재 소련공산당 간부앞 항의서한에 의하면, 소련군은 만주에 도착한 중국공산당 군대의 무장해제를 한 바 있으며 소련측은 만주에서의 중국공산당 활동문제는 1945년 8월14일 국민당 정부와 체결한 우호동맹조약에 의거, 국민당 중앙정부가 결정할 문제라고 하면서 거부하였다.


소련측은 진실로 중국공산당과의 이념상 유대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국민당 정부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였다. 중국 공산당 자료에 의하면, 소련측은 만주내 도시지역으로부터 중국공산당군의 철수를 강요하였을 뿐만 아니라 1945년 11월 만주내 중국공산당측과는 접촉을 단절하고 오히려 瀋陽, 長春空港으로의 국민당 정부군의 空輸 지원을 약속한 후 中·蘇의 만주지역 공동개발을 위한 협상을 개시하고 蔣介石의 12월 방소 준비 협의를 위한 蔣經國의 모스크바 방문을 수락하였다. 1947년 6월까지 소련측은 旅順港과 大連港에 대한 문제도 국민당 정부와 체결한 우호동맹조약에 의거, 전적으로 국민당 대표단과 협의를 진행하였다.


2. 소련의 국공 내전 중재와 중국 분단 기도


소련은 중공이1949년 10월 1일 국가 수립을 선포한 익일까지 국민당 정부와 외교관계를 유지해왔다. 로신(Roshchin)대사는 1949년 초 국민당 정부가 패퇴하여 南京에서 廣東으로 남하하게 되었을 때 외교사절 중 유일하게 동행하여 중공군이 揚子江을 도하한 5월까지 주재하였다. 결국 마지막 순간까지 중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중공이 전면 내전을 일으켜 중국내의 전쟁이 持久戰的인 성격을 띄게 되면 미국의 군사개입이 불가피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 개입이나 半恒久的인 주둔은 극동에서 소련의 안전보장을 해치는 것이기 때문에 스탈린은 국·공내전을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스탈린은 1945년 중반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 정부를 상대로 전쟁을 개시하려 할 때 반대를 하였으며 1947년 9월부터 1949년 4월 중국공산당의 양자강 도강시 까지 국공내전 종식을 위한 중재 노력을 계속하였다.


국공내전 종식을 위한 중재 노력은 중국주재 소련 관리와 이란주재 소련대사에 의하여 동시에 진행되었다. 당시 중국주재 미국 외교관들에 의하면, 1947년 9월부터 로신은 소련대사관 무관으로서 국·공간 내전종식을 위한 중재 노력을 시작하였다.


그는 1948년 1월 업무 협의차 모스크바로 귀환하였다가 2월에는 무관이 아닌 대사로 부임하여 1949년 중공측의 군사적 승리가 확실해지기 전까지 소련은 모택동이 아시아에서 제2의 티토가 될 것을 우려하여 국·공 내전 종식 중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국민당 정부를 대상으로 중재노력을 계속하고 미국측도 동 중재에 개입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로신은 국민당 군부 지도자들에게도 접근하여 對日平和條約에 대한 중·소 공동 입장 수립, 국민당 정부에 대한 상업차관 제공, 중·소 국경지대에서의 공동 경제개발계획 작성 등을 제의하면서 내전종식을 요구하였다.


소련측은 남경에서의 로신의 중재노력과는 별도로 테헤란에서도 중재노력을 시도 하였다. 1947년 10월 이란주재 사드치코프(I. V. Sadchikov)소련대사는 중국대사에게 로신이 한 것과 유사한 중재 제의를 하였다.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까지 모택동을 비롯한 중국지도자들은 1949년 1월 31일 당시 중국 공산당 본부가 있던 西栢坡에 도착하여 1주일간 체류하면서 모택동 등 중국 지도자들과 국·공내전 동향과 향후 신생 중국의 정책로선을 협의한 미코얀(Anastas Mikoyan)소련공산당 정치국 위원이 중공군이 양자강을 도하하지 않도록 권고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중국측은 아래 세가지 이유 를 들어 그 권고를 비난하였다.


첫째, 소련은 인민해방군의 전력을 잘못 평가하고 중공군이 국민당군을 패배시킬 수 없다고 믿고 있었고 둘째, 소련은 양자강 도하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야기할 것으로 우려하였으며 셋째, 스탈린은 중국의 분열을 바란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무력에 의한 중국공산당의 통일을 바라지 않고 양자강을 경계로 하여 공산당이 지배하는 북중국과 국민당이 지배하는 남중국을 원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이 더 이상 남진을 하지 않고 양자강에서 멈출 것을 소련측이 미코얀 방중시 중국공산당측에 요구하였다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 모택동의 개인비서였던 師哲에 의하면, 미코얀은 중국공산당 지도자들과의 회의에서 스탈린과 소련공산당 정치국 위원들이 중국혁명의 신속한 승리와 전 국토의 해방을 바란다고 말했으며 ‘북중국과 남중국’ 문제는 국민당측이 중국분단을 제의한데 대하여 1949년 4월 중국공산당의 회의 의제로 제기된 바 있다고 말하였다.


그 당시 미코얀은 양국간 미래협력방안에 관한 20개가 넘는 안건들을 다루었으며 남진을 반대하는 어떠한 권고도 하지 않았으며 만일 그런 것을 시사하였다면 미코얀과 중국공산당 지도자들간의 회의는 망치게 되었을 것이라고 師哲은 말하였다.


미코얀 방중시 인민해방군의 양자강 渡河를 반대하는 의사 표시여부에 대한 논쟁에 상관없이 소련측이 인민해방군의 도강을 반대하는 자료가 있다. 인민해방군이 4월 20일 양자강을 도강하기 직전인 4월 어느날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전문을 보내어 이제까지의 인민해방군의 戰果는 대단한 것이지만 전쟁을 끝내기에는 요원하다고 하면서 인민해방군이 남아시아의 국가들을 향하여 더 진격할 경우에는 제국주의자들을 동요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였다.


이어 스탈린은 영국, 프랑스, 미국이 그들의 점령지를 유지하기 위하여 군사적 조치를 취할 수도 있으며 인민해방군의 후방에 위치한 항구들에 그들의 군대를 공수하여 인민해방군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음을 경고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스탈린은 아래 세가지 를 중국측에 권고하였다.


첫째, 중국 접경국가들의 경계선에 도달하기 위하여 인민해방군은 서두르지 말고 신중히 준비할 것

둘째, 남쪽으로 진출하는 인민해방군 중 2개군을 선발, 항구 인근지역에 배치하여 적들의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한 전투태세를 유지할 것

셋째, 당분간 인민해방군의 병력 수를 감소하지 말 것


그러나 모택동은 스탈린의 상기 권고를 무시하고 5월 양자강 도강을 완료하고 10월에는 저항하는 국민당군을 중국 대륙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다. 위에서 서술한 소련측 태도를 종합해 볼 때 스탈린은 모택동군의 조기 공산혁명 달성보다 양자강을 경계로 한 중국 대륙의 분단에 관심이 컸다.


소련은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양측이 군사대결을 포기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1949년 5월까지 로신은 국민당 정부 주재 소련대사로서 국민당 정부를 상대로 국공내전 종식을 위한 중재 노력을 계속하였으며 스탈린과 미코얀은 중국 공산당 지도부와의 교신, 회의를 통하여 미··불의 군사개입가능성을 들어 인민해방군의 양자강 도강 및 남진을 반대하였다.


▲ 6.25전쟁. 이는 스탈린의 야욕에 중국은 이용당했고 이를 위해 김일성을 앞세운 전쟁이었다. [사진=Why Times DB]


3 . 만주에 대한 특수 지위 확보


소련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 정부를 가리지 않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對日戰 참전 대가로 1945년 2월 11일 얄타협정에서 확보한 만주 등 중국에 대한 특수이익을 최대한 확보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1945년 8월14일 조인한 장개석 국민당 정부와의 중소 동맹조약에서 소련은 만주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승인하였지만, 외몽고를 사실상 중국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것을 확보하고 大連港을 모든 국가의 통상과 해운에 개방된 자유항으로 선언토록 하고 항만시설의 절반을 무료로 소련에 대여하며, 旅順항을 중·소공동 해군기지로 사용토록 하였으며 東淸鐵道와 南滿鐵道를 30년간 중소가 공동 소유·관리키로 결정하였다.


1950년 2월14일 스탈린과 모택동간에 체결된 중·소동맹조약에서 중소 양국은 1945년 장개석 정부와의 조약과 거의 유사하나 만주내 長春鐵道의 공동 소유·관리 기한을 1975년이 아니라 1952년으로 단축하고, 여순에의 소련군 주둔은 철도의 공동 소유·관리 기한이 종료되는 시한까지, 대련은 일본과의 평화조약 체결시까지 소련이 항구를 사용하기로 합의하였다. 또한 동 조약에서 중·소 양국은 일본 및 그 동맹국의 침략으로 전쟁상태에 이르게 될 때 즉각적으로 모든 군사·기타 원조를 제공함을 합의하였다.


상기 조약 서명시 비밀의정서가 별도로 양국 지도자간에 서명되었는데 이 의정서에서는 중국은 滿洲와 新彊에서 제3국인이 산업재정무역 등 여타 관련활동을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소련도 극동 및 중앙아시아 공화국에 대하여 동일한 제한을 둔다고 합의함으로써 만주·신강지역에 미국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장치를 하여 중국을 소련 국가안보를 위한 완충지대로 보는 스탈린의 領土安保觀을 반영하였다. 동일 서명된 다른 의정서에서 소련을 중국측에 사전통보나 관세를 지불하지 않고 여순에 이르는 만주내 중국철도를 통하여 중국 동북부지역으로 군대 및 군장비를 이동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였다.


스탈린은 최초 모택동과의 회담에서 새로운 조약 체결은 얄타협정을 위배한다는 이유로 거부하였으나 1950년 1월초에 즈음하여 중국측의 요구를 수용하는 태도변화를 보였다. 이러한 스탈린의 태도변화는 1월 5일 기자회견에서 트루먼대통령이 대만에 대하여 군사원조를 제공하거나 자문역할을 하지 않겠다는 불간섭정책을 발표하고 미 국무부 내에서 중국을 승인하지 않는 것은 중국이 소련에 더 기울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논리로 對中 修交를 지지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가는 가운데 1월 6일 영국정부가 대중국 수교 발표를 한 것과 관련된다.


즉, 스탈린은 중국과 서방과의 관계 수립이 미국의 소련 포위전략에 대응하려는 자신의 세계전략에 중대한 차질을 초래할 것을 우려, 중국과 새로운 동맹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중국간에 경계선을 긋고 미국과 중국간의 대결을 고취하려 하였다.

스탈린은 1950년 1월22일 모택동을 만나게 되었을 때 지난 해 12월16일 대화시와는 달리, 새로운 조약은 중·소 양국이 모든 중요 국제문제에 대하여 상호 협의해야 한다는 의무규정을 포함하는 강력한 것이어야 한다는 모택동의 주장을 수락하는 반응을 보였는데, 이 규정은 임박한 한국전쟁 준비를 시사하는 것으로서 모택동과의 새로운 조약체결에 대한 스탈린의 태도를 변화시킨 요인이었다.


만주에 대한 소련의 특수지위를 합의한 상기 비밀의정서와 조약에 포함된 모든 중요 국제문제의 상호 협의 의무 규정 이외에 한국전쟁과 관련되는 것으로서, 스탈린과 모택동은 1950년 1월 대화시 여순 해군기지에 소련군이 계속 주둔하도록 합의하였는데, 이들은 미국의 중국 본토 공격에 대한 억지력으로 소련군의 여순항 계속 주둔이 필요하다는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따라서 스탈린은 모택동과의 중·소동맹 조약을 체결하면서 얄타협정에서 확보한 만주 등 중국에 대한 특수이익을 계속 확보하는 한편 아시아에서 미국의 포위전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신생거대 공산국을 끌어 들여 임박한 한국전쟁을 소련의 의도대로 추진·유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였다.


4. 6.25전쟁에의 중국 참전 유도


독일 동구·국제문제 연방연구소 하인지그(Dieter Heinzig)부소장이 러시아대통령실 문서고에서 직접 열람한 1956년 3월 31일자 북경 주재 유딘대사의 모택동 면담 기록 原本에 의하면, 모택동은 “[1949년 12월부터 1950년 2월 모스크바 방문시] 스탈린과 북한을 강화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의논이 있었지만 남한정복문제에 대하여는 전혀 협의가 없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모택동의 모스크바 방문 후반기에 북한의 남한 공격의 실현 가능성에 대하여 토의를 했다는 몇 가지 증거들이 있다. 소련비밀문서 공개시 중요한 역할을 한 볼코고노프장군은 모택동의 모스크바 방문시 스탈린과 1950년 초 여름이 대만과 한반도문제를 완전히 결정짓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전쟁 개시에 관한 구 소련과 중국의 비밀문서가 모두 공개되지 않은 현 상황에서 스탈린이 모택동의 모스크바 방문시 그와 한국전쟁에 대하여 논의하였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스탈린이 한국전쟁에 처음부터 중국을 개입시키려 하였다는 것을 앞에서 서술한 바 있다.


스탈린은 1950년 1월 30일 최초로 전쟁 개시 승인 의사를 북한측에 표명한 다음 중국측과 협의후 2월 9일 군사적 방법에 의한 한반도 통일를 적극 지지하는 전문을 평양에 보냈다.


1950년 5월 14일자 스탈린의 모택동 앞 電文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김일성이 48번에 걸쳐 남침 승인 간청 電文 을 보낸 후 1950년 4월 모스크바를 방문하였을 때 스탈린은 “변화된 국제환경” 때문에 군사력에 의한 김일성의 통일을 승인한다고 하면서 “남침에 대한 최종결정은 중국과 북한이 함께 내려야 하며 만일 중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미루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스탈린이 중국을 6.25전쟁 개전 결정에 끌어넣으려 한 것은 약체 한국정부의 반격을 두려워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스탈린은 북한이 남침할 경우 미국이 개입할 것으로 예견하고 중국과 미국을 싸우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구 소련 공산당 국제부의 김일성의 소련방문에 관한 보고서에 의하면, 스탈린은 1950년 4월 모스크바를 방문해온 김일성에게 소련이 전쟁에 직접 참여해줄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소련이 서쪽 방면에서 대처해야 할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고 미국이 한반도에 군대를 파견할 경우 직접 개입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므로 무력통일을 위한 남침은 중국 지도부가 이를 찬성할 때만 개시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으며 5월 14일에는 모택동에게 이를 확인해 주었다.


스탈린은 한국과 유엔군의 반격 특히 미군기의 공습으로 김일성의 사기가 저하되고 전세가 북한군에게 불리하게 되자 다시 중공군의 참전을 중국지도부에 촉구하였다.


1950년7월5일 스탈린이 중국주재 로신대사를 통하여 주은래 외상에게 보낸 암호전문은 한국전쟁 참전여부를 협의-결정하기 위하여 7월 중순 개최된 중국공산당 지도부 회의에 앞서 중국지도부가 중공군의 한-만 국경지대으로의 이동문제를 스탈린과 협의한 것을 밝히고 있다.


스탈린은 동 전문에서 敵軍(한국군과 UN군)이 38선을 넘게 될 경우 북한군을 돕기 위하여 중공군 9개사단을 한-만 국경지대에 집결시키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면서 이들에 대한 공중엄호를 약속하였다. 7월13일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중공군 9개사단 엄호를 위하여 제트기 124대로 구성된 1개 항공사단을 보낼 것을 약속하고 2-3개월간 중국측 조종사 훈련과 훈련 후 장비이전을 통보하였다.


9월 16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후 북한군이 후퇴를 거듭함에 따라 절망상태에 빠진 김일성은 9월28일 노동당 중앙위 정치위원회를 개최, 敵軍이 38선을 돌파시 소련군이 직접 지원 해줄 것과 소련군의 직접지원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중국과 기타 공산 국가들로 국제의용군을 조직, 원조하여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스탈린에게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스탈린은 10월1일 새벽 2시50분에 9월29일자 김일성·박헌영 공동명의 전문을 받고 3시 모택동과 주은래에게 최소한 5~6개 사단의 중국의용군을 38선 방향으로 진격시켜 북한군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는 전문을 발송하였다.


상기 스탈린의 중국참전 요청 전문에 대하여 모택동은 10월2일자 스탈린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중국은 최초 敵軍이 38선을 돌파할 경우 의용군 4개 사단을 파견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여타 지도자들과 세부검토결과 (1) 중공군의 준비부족 (2) 중공군 참전시 미중 전쟁이 될 가능성 및 이 경우 중소동맹조약에 의거, 소련군의 참전 불가피 (3) 중공군 참전시 미국의 중국내 반동세력 준동 가능성 등의 이유를 내세워 당분간은 의용군을 파견치 않고 인내심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앞으로 북한군은 遊擊戰 형태로 투쟁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에 대하여 10월5일 스탈린은 모택동과 주은래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미국은 현상태에서는 큰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있지 않고 일본은 군사적 잠재력은 있으나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소련을 배후에 둔 중국의용군 참전은 한반도문제를 북한에 유리한 방향으로 미국이 양보토록 압박하고 한반도가 대륙침략의 도약대가 될 가능성을 사전 방지할 수 있으며 미국으로 하여금 대만을 포기케 할 것이라고 하면서 중국의 6.25전쟁 참전을 촉구하였다.


스탈린은 이어 10월8일 김일성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모택동이 10월7일 9개사단을 조만간 북한에 파견할 예정임을 자신에게 알려왔음을 통보하면서 김일성이 敵軍과의 전투에서 결연히 임할 것을 촉구하였다.


모택동도 10월8일 밤 평양주재 중국대사를 통하여 중국의용군의 참전을 김일성에게 통보하였다.

그러나 10월9일-10일간 중국의 북한지원문제를 구체적으로 협의하기 위하여 소련을 방문한 周恩來와 林彪가 여러 이유를 내세워 모택동의 참전결정을 번복하려는 태도를 보이자 스탈린은 위험을 무릅쓰고 최후카드를 제시하였다.


10월13일 스탈린은 중국의 참전 지원에 대하여 미국이 중국을 공격·보복할 가능성이 없으나 지금 중국이 참전하지 않으면 북한은 매우 짧은 시일내에 붕괴될 것이므로 중국은 중국 북동지역에 북한인민군을 재배치하고 소련은 연해주 지역에 한국계 소련인과 부상병, 노약자를 이동시켜 북한 재진입을 위한 피난처를 각기 제공하자고 하면서 일단 북한을 포기하는 최종 제의를 중국측에 하고 10월13일 쉬티코프대사를 통하여 북한군 철수계획을 김일성에게 실제로 제시함으로써 모택동의 한국전쟁 참전 최종 결심을 유도하였다.


스탈린은 이와 같이 중국을 한국전쟁에 필사적으로 끌어들이도록 노력을 하였는데 마지막에는 북한 포기라는 최악의 상황을 제시하여 중국측의 한국전 참전을 얻어 내었다.


5.전쟁과 휴전협상의 장기화 유도


유엔군의 인천상륙 후 북한의 패색이 짙어지자 스탈린은 9월30일 소련공산당 정치국회의를 소집, 협의를 한 후 외무성으로 하여금 유엔에 제출할 소련측 정전결의안을 草案하도록 지시하고 10월1일 즉각 정전, 외국군 철수 및 국제 감시하 총선 등 요지의 초안을 모택동과 협의 후 유엔주재 소련대표부로 타전하였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후 승기를 잡은 상황에서 미·영이 주도하는 유엔총회 정치위원회는 10월4일 상기 소련측 결의안을 부결시켰으며 이어 유엔총회는 찬성 47, 반대 5, 기권 7표로 북한 패배 후 유엔주관으로 한반도에서의 통일자주민주국가 수립을 위한 선거 실시 등 요지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동 결의안 표결이 있는 날 워커(Walton Walker)장군의 제1기병부대의 선두는 38선을 돌파하였다.


그러나 10월19일 밤 중국군이 압록강을 도강하여 공격에 나서자 유엔군과 한국군은 다시 후퇴, 전황이 어렵게 된 상황에서 12월 유엔주재 인도, 영국, 스웨덴 대표와 리(Trygve Lie) 사무총장은 중국대표에게 중국이 수락할 정전조건 제시를 요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은래는 12월7일 한반도에서의 모든 외국군 철수, 대만 및 대만 해협으로부터의 미군철수, 한국문제는 한국인 스스로 해결, 중국정부대표의 유엔 참여 및 대만정부대표 축출, 일본과의 평화조약준비를 위한 4강국 외상회의 개최 등의 정전 조건을 스탈린에게 제시하면서 그의 의견을 문의하였다.


같은 날 스탈린은 주은래에게 보낸 회답과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유엔주재 비신스키대사앞 훈령에서 미국이 패퇴를 거듭함에 따라 완패를 모면하고 시간을 벌기 위하여 한반도에서의 군사활동 중지에 관한 제의를 빈번히 하고 있는 현상황에서 주은래가 제시한 정전조건들은 적절치 않다고 답변하였다.


스탈린은 이어 10월9일 주은래에게 보낸 전문에서 서울이 아직 해방되지 않은 시점이므로 중국측이 모든 카드를 제시할 때가 아니라고 하면서 주은래가 미국과 유엔이 먼저 정전조건을 제시토록 하는 전략을 택할 것을 제시하였다.


유엔측이 다시 1951년1월11일 정전 제안을 해왔을 때 주은래는 스탈린에게 문의, 그의 권고에 따라 유엔측 제안을 거부하였다.


1951년 6월 5일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한반도에서의 長期戰은 중국군이 戰場에서 現代戰을 연구할 기회를 갖게 될 뿐만 아니라 트루먼정부를 흔들고 미·영국군의 국제적 위신을 실추시킬 수 있기 때문에 한국전쟁의 속도를 빠르게 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당시 모택동은 국제관계에서의 중국의 위치를 높이고 중국내 혁명분위기를 고양시키기 위하여 미국으로부터 수락할 만한 조건을 확보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할 의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쟁 종료 시까지 입을 수 많은 사상자 때문에 상기 스탈린의 장기전 요구에 대하여 적극적이지는 않았을 것으로 상상된다.


그러나 1951년 4월과 5월 중공군과 북한군의 대공세 실패는 스탈린으로 하여금 유엔군 사령부와의 휴전협상을 개시토록 압박하였다. 1951년6월5일 말리크(Jacob Malik) 주유엔 소련대사는 평화를 원하며 가급적 빠른 시일 내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원한다고 하면서 미국정부가 이 문제에 관하여 북한과 중국측과 접촉해 줄 것을 케난(George F. Kennan)에게 통보하였다.


몇일 후 김일성과 高崗(만주에 위치하고 있던 중국의 친소인사로서 1955년 숙청됨.)은 동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스탈린을 방문하였다. 모택동이 6,7월 2개월간은 중공군과 북한군이 수세적 위치에 있으므로 유엔군사령부와 협상을 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해옴에 따라 스탈린은 협상개시를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말리크대사에게 지시하였다.


1951년 7월부터 1953년 7월까지 계속된 휴전협상의 초기단계에 모택동은 중국측이 만족할 조건들을 확보할 경우 휴전협정을 체결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미국이 휴전협정을 체결해야 할 더 급박한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중국과 북한측은 서두르거나 협상의 조기 종결의사를 보이지 않고 계속 강경입장을 견지토록 종용하였다.


교착상태에 있었던 휴전협상은 1953년3월 스탈린 사망 후 급진전을 보게 된다. 스탈린 사후 2주후 3월19일 소련 각료회의는 6.25전쟁을 조기 종결토록 결정을 하였는바, 동 결정은 스탈린이 한국전쟁 계속의 주요인이었으며 그가 죽은 뒤 곧 소련, 중국, 북한이 휴정협정체결을 위한 조치들을 취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맺음말]


帝政 러시아가 한반도와 국경을 맞대게 된 후 취해온 정책과 같이 소련에 있어 한반도는 극동에서의 국가이익 중 부차적 목표에 불과하였다.


소련은 세계 제2차대전 終戰 처리를 미국측과 의논하는 과정에 만주에 대해서와는 달리 한반도 전체를 차지할 의사를 미국측에 강력히 제시하거나 다른 구체적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소련은 한반도에 대하여 극동에서의 소련 국가이익의 핵심인 만주지역을 보호할 수 있는 완충지역으로서의 가치만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세계 제2차대전후 종전 처리문제로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1945년 10월 들어 한반도 북반부만이라도 對蘇 攻擊基地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 북한지역에 대한 공산화체제 구축을 적극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소련의 한반도관은 미국과 직접 대결을 해가면서 까지 북한을 구원할 의사가 없다는 데까지 이어졌다. 1950년 9월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후 북한으로 진격함에 따라 북한의 붕괴가 우려되자 10월 5일 스탈린은 소련공산당 중앙위 정치국 회의를 소집하여 소련이 북한을 버리는 것을 감수하더라도 미국과의 직접 군사대결을 회피하여야 한다는 결정을 하고 만주지역으로 북한정부 망명까지 중국과 북한에 제시하였다. 소련이 한반도에 두는 제한적 이익과 관심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례이다.


6.25전쟁이 김일성의 개전 의지와 역사적 결단에 의하여 일어났기 때문에 김일성의 전쟁이라는 주장을 하는 일부 학자들이 국내외에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 1949년 3월, 8월, 9월 등 그 해의 거의 전 기간에 걸쳐 스탈린에게 남침승인 요청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을 보면 김일성의 남침의사만으로 한국전쟁 원인을 설명하는 데는 한계점이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그 당시 공산진영 내 스탈린의 위치로 인해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관계가 主從關係이었음에 비추어 김이 한국전쟁의 개시를 역사적으로 결정하고 주도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울람 교수가 “스탈린은 이미 남침계획을 갖고 있었다. 다만 그는 그가 승인을 하고 도움을 줄 가장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을 뿐이다. …..달리기 경주에서 경주가 출발을 위하여 구부려 기다리고 있는 선수에 의하여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이 출발신호를 함으로써 시작되는 것처럼 한국전쟁은 스탈린이 승인을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고 지적한 것은 매우 적절한 평가로 판단된다.


우리는 스탈린이 6.25전쟁을 일으킨 전략적 의도를 1949년 기간 중국제정세의 변화와 애치슨 선언을 연결하여 파악하려는 주장들을 보아 왔다. 이에 따라 우리는 1950년 1월 애치슨 국무장관이 한반도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다고 선언하자 스탈린이 유리해졌다고 판단한 국제정세의 변화를 배경으로 하여 세계적화전략의 일환으로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승인,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스탈린 스스로는 김일성과 모택동에게 애치슨 선언을 언급하지 않고 중국공산혁명 성공, 중·소 동맹조약 체결, 소련의 원자력 보유 등으로 미국세력이 공산세력의 도전에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는 ‘변화된 국제환경’을 들어 자신의 한국전쟁 승인 배경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스탈린은 애치슨 선언이 있기 훨씬 전부터 미국이 한국의 안보를 보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영국인 스파이 도날드 맥그린(Donald MacLean)의 보고 를 통해 알고 있었으나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의 군사개입이 있을 것을 예견하고 군사적 역량 측면에서 강자인 미국과 신생 중국이 대결을 하게 하는 구도로 6.25전쟁 준비를 하였다.


따라서 한국이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다고 한 에치슨 선언은 스탈린이 김일성의 6.25전쟁 개시 요청을 승인하고 전쟁준비를 하게 한 것과는 무관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애치슨 선언으로 스탈린의 6.25전쟁 개시 승인을 설명하는 것은 한계점이 있다.


스탈린이 중국공산혁명의 성공을 보고 전쟁 개시문제 협의를 위한 김일성의 소련 방문 요청을 수락하고 6.25전쟁 개시 시기 결정에 중국을 개입시킨 후 1953년 4월 사망할 때까지 중국에 대하여 취해온 정책들을 검토해 보면, 스탈린이 전혀 입 밖으로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에 임하는 스탈린의 진정한 전략적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스탈린은 1921년 중국공산당 창당이래 모택동의 진심과 중국공산당의 능력을 의심한 나머지 오히려 국민당 정부와 마지막 순간까지 연계를 갖고 공산혁명을 방해하고 양자강을 경계로 분단을 고려하기도 하였다. 동 사실은 스탈린이 공산당간의 이념적 유대로 중국공산혁명을 早期에 달성시키기 위하여 중국공산당을 적극 도왔을 것이라는 또 다른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다.


스탈린은 6.25전쟁 개시 시기를 고려할 때 미국이 개입할 것을 전제로 하였다. 김일성이 1950년 4월 모스크바 방문시 남침하더라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개진하였으나 스탈린은 한국과 미국이 정신을 차릴 시간을 주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되면 미군이 응당 개입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미국의 군사적 개입 가능성에 대한 스탈린의 판단은 불가닌 국방상과 그로미코 외무상이 1949년 9월 한반도문제에 관한 소련공산당 정치국 決議案을 심의하기 위하여 만든 초안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스탈린은 2차대전 기간 중 2천만여명의 소련인민의 사상자를 내었고 전후 경제재건을 위하여 북한이 통일을 위하여 남침을 하더라도 미국과의 대결이 예상되는 6.25전쟁에 직접 개입할 수 없다는 구구한 변명을 내세워 한국전쟁 개시 시기 결정 때부터 중국을 개입시키고 북한 붕괴상황에 이르자 북한을 포기한다는 마지막 카드를 제시하여 중국의 참전 지원을 劇的으로 유도하였다.


스탈린이 중공군이 한반도의 戰場에서 현대전을 연구할 것을 권고하면서 휴전협상을 장기화시켜 중국측의 희생을 강요한 것을 보면 스탈린은 중국공산당이 그의 예상 밖으로 조기에 공산혁명을 달성하자 중국공산당 창당이후 견지해온 모택동에 대한 의구심과 아시아에서의 제2티토 등장 가능성에 대한 우려에서 중국을 약화하려는 의도로 6.25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개입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6.25전쟁 발발 후 북경주재 영국 영사 브라이언(Brian)이 “조선전쟁은 중국이 대만을 점령하고 강대국이 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특수한 목적하에 소련에 의해 개시된 것” 이라고 .지적한 것은 상기와 같은 스탈린의 중국 약화 의도를 제대로 파악, 관찰한 것이다.


또한 스탈린은 6.25전에 중국을 개입시킴으로써 중국과 서방과의 연계를 차단하고 중국을 확실히 소련의 영향권하에 묶어두려는 것도 고려하였을 것이다.


스탈린이 6.25전쟁 개시 승인을 하면서 중국을 개입시킨 것은 1949년 12월 모택동이 새로운 중·소동맹조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여러 가지 이유로 동 조약 체결에 긍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던 스탈린이 1950년 1월 영국과 인도가 중국을 승인하자 태도를 바꾸어 조약체결에 응한 것 처럼 중국의 대서방 관계개선을 경계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신승권교수는 볼코고노프 저서와 기타 자료들을 종합하여 스탈린은 1949년 1월 6.25전쟁을 결심하고 동년 3월 김일성을 모스크바를 불렀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스탈린은 1월 중순 어느 날 파크로브세프(Pokrevyshev)비서실장에게 “베리야(Lavrentii Pavlovich Beriya)에게 오늘밤 원자력기구에서 실행되고 있는 실험의 진척상황에 대하여 보고하도록 얘기해 주게….”라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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