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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6-24 12: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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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함경남도 장진일대에서 벌어진 장진호 전투 [사진=Why Times DB]

장진호전투(Battle of Reservoir)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함경남도 장진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로서 장진호는 호수의 이름이다.


장진호전투는 초신호전투 또는 초신리작전으로 부르기도 한다.


[장진호전투의 배경과 원인]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사흘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패퇴를 거듭하며 부산까지 밀린 한국군과 미군 주도의 유엔군은 배수진을 치고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낸 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사령관의 지략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고 반격을 시작했다.


드디어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고 10월 19일에는 평양에 무혈입성 했다.


그러자 김일성 정권은 험준한 산악지대인 평안북도 강계로 달아나 임시수도로 정하고 소련과 중국에 군사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중국은 10월 25일 중국인민지원군을 창설해 북한군과 연합사령부를 구성하고 그날부터 본격적으로 전투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한편 인천상륙작전을 성공 시킨 뒤 동부전선을 맡은 미 제10군단의 군단장(Edward Mallory Almond)중장은 부대를 세 방향으로 나누어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국군 제1군단은 동해안을 따라 진격한 뒤 함경남도 원산을 점령한 뒤 두만강유역까지 나아가게 했다.


그리고 10월 29일 이원에 상륙한 미제7사단은 부전호와 압록강유역의 혜산진 방면으로 진격토록 했으며 10윌27일 원산에 상륙한 한미해병 제1사단은 개마고원 장진호 방면으로 진격하도록 했다.
하지만 11월에 들어서면서 중국군과의 전투가 본격화 되면서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은 청천강 유역으로 후퇴를 하였다.


동부전선에서도 11월 8일 부터 중국군이 전투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알몬드 중장은 휘하의 부대들에게 압록강과 두만강유역으로 신속히 진격할 것을 명령했고 드디어 미 제7사단 제17연대는 압록강유역의 혜산진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했다.


▲ 장진호전투 위치도


[장진호전투의 발발과 전개]


미 제1해병사단은 함흥에서 장진군을 거쳐 강계로 이어지는 국도를 따라 진격했는데 11월11일에는 황초령(1.206m)을 지나 장진면 고토리에 이르렀고, 11월15일에는 장진호 남단의 하갈우리에 도착했다.


그리고 11월19일에는 장진호 서북쪽에 있는 서한면 유담리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낭림산맥 동쪽에 있는 장진군은 희색봉(2.185m) 아득령(1.479m) 유린산(1.925m) 문암산(1.852m)등의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해발고도가 1천 미터 이상의 고원지대로서 이름하여 개마고원이라 부르는 곳이다.


이 지역은 10월부터 눈이 내리고 겨울 날씨가 시작되는데 겨울철 기온이 영하 30도로 떨어져 중강진과 함께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미제1해병사단의 사단장인 스미스(Oliver Prince smith) 소장은 겨울철 추위가 닥쳐오자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하갈우리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그곳에 활주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7연대와 제5연대를 유담리 일대로 전진배치하고 제1연대는 하갈우리와 고토리를 잇는 후방보급로를 확보하도록 했다.


장진호 우측의 동하면 신흥리와 후동리 일대에는 알몬드 중장의 명령에 따라 미 제7보병사단 제31연대 병력을 중심으로 편성된 페이스 특수임무부대가 미 제1해병 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배치되었다.


그러자 중국은 제9병단에 속한 3개 군단(약12만명)을 장진호 일대로 집결시켰다.


내륙으로 깊숙이 진출한 미 제1해병사단의 병력을 제압한다면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진출한 국군과 미군의 퇴로를 차단시켜 섬멸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중국군은 11월11일 한반도를 넘어와 산지를 따라 이동, 은밀하게 11월20일경 유담리 일대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미 제1해병사단은 낭림산맥을 넘어가 서부전선을 담당하고 있는 미제2사단, 한국군 제2군단 등과 연합작전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11월24일 덕천, 영원지역을 담당하던 한국군 제2군단이 패퇴하면서 서부전선의 유엔군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그러자 중국군은 때를 놓치지 않고 11월 27일 밤을 기해서 인해전술로 미군을 에워싸고 파상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이른바 장진호전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11월 27일 밤부터 다음날까지 계속된 중국군의 전면적인 공격으로 하갈우리, 유담리, 고토리를 잇는 도로가 차단되면서 미군은 완전 고립되었다.


특히 페이스 특수임부부대는 대장인 매클레인(Allan MacLean) 대령까지도 전사하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알몬드 군단장은 미 제1해병사단 사단장인 스미스 소장이 장진호 일대의 유엔군을 통합지휘 하도록 권한을 부여했다.


그리고 유담리에 있는 병력의 일부를 하갈우리로 집결시켜 페이스 특수임무부대를 지원하고,하갈우리와 고토리를 회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유담리에 있는 미 해병 제5연대와 제7연대 역시 중국군에 포위되어 병력을 이동시킬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자 스미스 소장은 페이스 특수임무부대에 하갈우리로 집결할 것을 명령했다.


11월 29일 영국 해병대의 41코만도 부대의 드라이스 데일(Douglas B.Drysdale) 중령이 지휘하는 특수임무부대는 29대의 전차와 141대의 차량을 이끌고 고토리에서 하갈우리로 향했으나 중국군의 매복에 걸려서 큰 피해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철수도중 미군의 오폭으로 네이팜탄이 터져 수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1천여명이 전사하고 3천여명의 부대원중 12월 1일 하갈우리에 도달했을 때는 겨우 385명의 병력만이 부상을 당하지 않은 채로 도착할 수 있었다.


이처럼 전황이 불리해지자 맥아더 사령관은 동부와 서부전선 모든 병력에게 철수를 지시했다.
유담리에 있던 미 해병 제5여단과 제7여단 병력은 12월 1일에야 철수를 시작했다.


이 부대 역시 철수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12월 4일에 되서야 하갈우리에 도달했다.


[장진호전투의 결과와 영향]


장진호 전투는 미군의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과 유엔군은 1만7천여 명의 사상자를 기록했고, 중국군도 4만8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1950년 11월27일부터 시작된 장진호 전투에서 희생된 미군의 수가 워낙 많아서 일부 언론에서는 일본의 진주만 피습에 버금가는 미군의 패전이라고도 하지만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말미암은 것이어서 결코 패한 것이 아닌 승전의 역사요, 자유 대한민국을 피로써 지켜내 준 자랑스런 미군의 희생의 역사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배워야할 것이 하나 있다.


미국은 1966년부터 장진호 전투에서 사망한 유해들을 발굴 본국 송환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나?


그리고 피로써 맺은 한미동맹을 의도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6.25를 양비론으로 이야기하며 마치 내전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미국의 흥남철수작전이 없었다면 존재라도 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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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재영 객원 논설위원 송재영 객원 논설위원의 다른 기사 보기
  • 전,한국검경신문사 보도본부장 겸 논설위원장
    전,새한신문(현,새한일보사 )부사장
    전,소셜네트웍기자협회 고문
    현,국제언론인클럽,사단법인 한국언론사협회 논설위원 등재
    고정칼럼:송재영의 우이독경
    전,4대개혁추진국민운동 본부장
    전,국민행복당 중앙당 초대사무총장.
    현,자유한미연합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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