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19-03-01 18:58:12
  • 수정 2019-03-02 11:38:32
기사수정


▲ 3.1운동 당시 정동 골목에서 시위하는 여성들



○ 인류사는 국가와 개인의 주권 확립 과정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앗아간 지 근 10년이 되어 가던 1919년, 그해 한반도에서는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고종의 장례일에 즈음하여 펼쳐진 전국인의 3‧1독립만세운동이 그것이다. 거기에는 불교, 기독교, 천도교계 등이 종교와 지역을 넘어서서 협력하였고, 전국의 지식인, 농민, 상인, 학생, 노동자, 기생 등이 두루 참여하였다. 자유를 향한 한국 역사상 최초의 거족적 운동이었다. 3‧1운동이 인류사와 한국사에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가.


인류사는 크게 두 가지 조건을 이루기 위해 달려왔다. 하나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평등하게 정립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라 사이의 관계를 대등하게 조정하는 일이다. 전자는 개인의 주권 확립, 후자는 국가의 자주독립, 요컨대 대외적 주권의 확립이다. 전자로 대변되는 것이 국민투표권이고, 후자로 대변되는 것이 유엔체제하의 평등한 국가주권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절대 권력자인 황제나 왕, 그리고 각종 특권을 누리던 고위 신분의 귀족 층은 이러한 변화를 거부했다. 또한 주위에 여러 속국을 둔 황제의 나라, 즉 전통시대의 제국은 제후국(혹은 왕국)과 종속 관계를 지속하려 하였다. 산업혁명 이후에도 전 세계에 식민지를 확보했던 제국주의 국가들은 약소국의 해방과 독립을 가급적 뒤로 미루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런 모든 현상은 21세기 현재 지상에서 거의가 사라진 상태이다.


한국의 경우 내부적으로는 양반과 중인, 상인, 천민 등으로 구분되는 신분체제가 조선조 500년 동안 지속되었고, 대외적으로는 황제의 나라인 명과 청이 왕의 나라인 조선을 사대교린체제(혹은 책봉체제) 아래 묶어두고 있었다. 요컨대 조선 왕조 때까지 한국은 대외적 주권은 물론, 대내적 인권 모두 현실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확립하지 못한 상태였다.


한국이 이런 상황을 타개한 것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접어들어서였다. 이중 국가의 주권 의식 확립은 19세기말, 개인의 주권 의식 확립은 20세기 초에 이루어졌다.


○ 대한제국 선포는 국가 주권 확립을 선언한 것


한국의 역사에서 국가주권 문제가 공론화 되어 그것이 확립된 것은 19세기 말이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자 다음날 정부에서는 나라 이름을 이제부터 대한으로 정하였음을 관보를 통해 전국에 알렸다. 이때 독립신문에서는 ‘오랜 동안 조선이 중국에 예속되어 중국을 상국으로 섬겨왔는데, 이제 조선도 황제의 나라가 되고, 나라 이름도 대한이 되었으니, 이것은 조선 인민의 경사’라고 하였다.


고종의 황제즉위와 대한제국 선포에 대해 일본은 물론, 러시아와 프랑스 등 유럽의 각국은 이를 축하하였고, 영국과 미국도 이를 승인하였다. 그러나 정작 이웃한 청국은 대한제국을 승인하지 않았다.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꾸준히 청국의 반응을 타진하여 황제의 존재와 대한제국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청국에서는 이를‘망자존대’(妄自尊大)라고 하였다. 청국의 대신들 중에는 이제 만국이 동등한 세계가 되었으니 대한제국을 승인하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황실에서는 조선 군주가 감히 황제를 칭하다니 함부로 스스로를 높인 것이고, 괘씸하다는 반응이었다. 청일전쟁의 패배 보다 자존심 상하는 일로 여겼다.


그러나 그런 불편한 양국 관계는 2년 뒤 해결되었다. 청국과 대한제국이 대등한 조건에서 한청통상조약(대한국대청국통상조약,1899)을 맺은 것이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저항하던 조선의 국왕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음)를 행하며 신하의 예를 표한 이래 처음으로 서로를 대등하게 바라 본 역사적 순간이었다. 비록 국력은 약했으나, 대한제국 선포는 의식상으로나 현실적으로 자주독립국의 체모를 갖추게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독립신문에서 고종의 황제 즉위를 한국 역사 속에서 처음 맞는 경사라고까지 한 것은 그것이 나라의 대외적 주권 선언이라는 의미를 충분히 인식한 결과 나타난 표현이다.


그러나 이후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는 대한제국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왜 그랬을까. 대한제국은 황제의 나라였다. 국가 체제는 황제국이고, 나라의 ‘헌법’인 대한국국제도 황제의 대권만을 규정할 뿐, 민권에 대해서는 의무만 있고 권리가 없었다. 군주와 일반 백성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독립협회는 국민주권 확립을 희망하였고, 의회설치운동은 그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탄압으로 그 운동은 실패했다.


○ 자유민주주의 국가 조건은 개인의 자유와 주권의 평등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권이 확립되어 있고, 대외적으로는 만국과 동등한 국가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 여전히 개인의 주권이 확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인권이 참담할 정도로 유린되고 있는 자유롭지 못한 나라도 물론 있다. 게다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일인독재체제 아래서 나라의 주권이 언제 어떻게 유실될 지, 권력자가 언제 천길 낭떨어지로 추락할 지 알 수 없는 불안정한 나라도 없지 않다. 그래도 세계의 추세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와 권리 평등, 대외적으로는 안정된 자유민주주의의 국가이다.


나라가 선진이냐 후진이냐 하는 것은 무슨 차이일까. 어느 정도로 과학기술이 발전하였는가, 개인의 자유와 평등권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가, 국민은 어느 정도로 안정된 삶을 누리는가, 국가의 공권력을 얼마나 인류의 보편가치에 맞게 행사하고 있느냐 등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각국 정부와 리더들이 과학기술 개발과 산업 발전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국민의 복지와 생활의 안정, 공공질서와 국가 안보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를 지켜보는 민심은 파도와 같다.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 가치에 역행하는 정부와 리더는 언제든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되어 있다. 그것이 정상 국가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어느 수준에 와 있는가. 때로 국민의 선량으로 뽑힌 인사들의 망언과 ‘내로남불’로 국가의 품격이 떨어지고 정치적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래도 개인의 주권과 대외적 자주권을 모두 구비한 선진형 국가이다. 그렇다면, 이런 모든 조건 중 개인의 주권 의식은 언제 정착했고, 언제 현실화 되었는가.


○ 기미독립선언에 이르기까지


고대 사회로부터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신분사회였다. 개인 사이에 신분 차별이 있는 불평등한 사회였다.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다. 고려의 무신 정권 시대에 노비 만적은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느냐?’며 절규하였고, 조선의 저명한 문인이자 관료였던 허균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서자들의 한을 주인공 홍길동을 통해 그려내기도 하였다. 또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은 사민평등(士民平等)을 주장하였고,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등은 독립신문 논설과 독립협회 운동 등을 통해 인민의 평등과 권리 신장을 주장하며 민의를 대표하는 의회설치운동을 펴기도 했다.


이미 조선 후기로부터 19세기 말 갑오경장에 이르러 노비제도가 법적으로 해체되기는 하였지만, 신분제의 유습은 남아 있었고, 나라의 주권도 대한제국 당시까지 황제가 독점하고 있는 사회 구조였다. 이런 상태에서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국권을 강탈당하면서, 한국사회는 완전한 신분의 평등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암흑기에 오히려 인간의 주권에 관한 놀라운 선언이 등장하게 된다. 1919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번진 독립만세 운동이 시작된 바로 그날이다.


○ 기미독립선언은 자유와 국민주권의 선언


‘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조선이 독립국이고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를 세계에 알려 인류 평등의 큰 뜻을 밝히고, 자손만대에 전하여 민족자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간직하게 한다. 반만 년 역사의 권위로서 이를 선언하며, 이천만 민중의 정성과 충의를 담아 널리 밝히는 것이다. 민족의 장구한 자유와 발전을 위하여 주장하는 바이며, 인류의 양심에 따른 세계 개조의 큰 흐름에 따라 이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는 하늘의 명이며, 시대의 대세이다. 인류 공존공생권의 정당한 발동이니 누구도 이를 저지하지 못할 것이다.”(현대문으로 수정-필자)


이상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첫 문장이다. ‘우리는 조선이 자주독립국이고,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고 한 부분이다. 길고도 난해한 선언서 전체는 바로 이를 보충하기 위한 부연 설명에 가깝다. 결국 기미독립선언서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민족의 자주독립, 즉 국가의 부활과 대외적 주권 선언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권, 즉 인권의 선언이다. 인류의 보편적 목표가 바로 기미독립선언서에 담겨 있는 것이다. a


이중 국가 주권은 이미 대한제국 선포 당시와 한청통상조약 체결 당시 매듭지어진 것이지만, 일제의 침략으로 잠시 국가 주권이 잠자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반면 개인의 주권은 비록 일제하라는 상황에서 당장으로는 선언적 의미에 그친 점은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3‧1독립만세운동의 결과로 등장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에 민주공화제 체제로 명문화 되고, 다시 대한민국의 헌법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렇게 하여 우리 한국인은 1948년 그토록 갈망하고 고대하던 국가주권과 국민주권을 모두 완성하였다. 기미독립선언서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런 역사의 과정에서 중요한 매듭을 풀어간 점에 있다. 일제의 감시 속에 독립선언서를 준비하고, 거족적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시대적 소명을 다 한 위대한 조상들께 감사드린다.





[덧붙이는 글]
-이민원,「기미독립선언서에 담긴 자유와 국민주권 의식」 -자유마당』2019년 3월호 내용을 약간 수정함
TAG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hytimes.kr/news/view.php?idx=3431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이민원 역사 에디터 이민원 역사 에디터의 다른 기사 보기
  • <경력>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문학박사(역사학)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연구위원
    -원광대 사범대 초빙교수
    -국제한국사학회(회장)
    -현재: 동아역사연구소(소장)
    현대의전연구소 자문위원

    <주요저술>
    『이상설-신교육과 독립운동의 선구자』』(역사공간, 2017)
    『대한민국의 태동』』(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5)
    『조완구-대종교와 대한민국임시정부』』(역사공간, 2012)
    『조선후기 외교의 주인공들』(백산자료원, 2007)(공저)
    『Q&A한국사: 근현대』(청아출판사, 2008)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국학자료원, 2002)
    『한국의 황제』(대원사, 2001)

    <번역서>

    『국역 윤치호영문일기』 2(국사편찬위원회, 2014)
    『국역 윤치호영문일기』 3(국사편찬위원회, 2015)
    『나의 친구 윤봉길』(도서출판 선인, 2017)(原著: 金光, 『尹奉吉傳』, 上海: 韓光社, 1933)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정치더보기
북한더보기
국제/외교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