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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11-01 10:5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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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동원과 징용 모두 조선인들은 제반 급여 정상 수령. 일본인과의 급여 차별도 없었다
-해방 전, 박정희 정권, 노무현의 결정 등 3번이나 받아. 이제 네번째로 또 받겠다는 건가
-일본 정부, 한국인의 채권변제 요구에 대비해 ‘미불금’ 공탁 처리. 3개월 임금 미만 금액


▲ 31일 오후 광주 동구 광주고등법원에서 일제 강점기 시절 강제징용 피해자 양금덕·김재림 할머니 등이 전범기업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 사건 첫 변론기일에 참석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광주=뉴시스】류형근 기자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인한 개인청구권 소멸 여부와 공소시효 문제에 대해, 나는 법리적인 판단을 할 수는 없다. 다만 그에 앞서 확인되어야 할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한국인이 지금 일본 기업에 대해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가?

내 판단으로는 불가능하다.


첫째, 1939년 9월, 조선인 노무동원이 시작된 뒤로 1944년 9월에 징용이 실시되기 이전까지는 물론이고, 1945년 4월 경까지의 ‘징용’의 경우에도 조선인들은 임금 등 제반 급여를 정상적으로 수령하였다. 급여 면에서 일본인과의 차별도 없었다.


저금한 것은 계약기간(대개 2년) 만료 후 정상적으로 인출되었고, 조선으로의 송금도 큰 문제없이 이루어졌다. 다만 종전 직후 조선인들이 서둘러 귀국하면서 정산하지 않은 돈이 일부 남아있었다.


둘째, 박정희 정부는 1975년, 뒤늦게 피동원자에게 배상금을 지급하였다. 하지만 이를 위해 일본에 별도의 재원을 요구한 일은 없었다. 징용의 경우, 그 이전 노무동원과 성격이 다르다.


즉,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동원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배상금을 지급했던 것이다.


물론 이때도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은 하나의 ‘로망’이었고, 따라서 목숨을 건 밀항과 그 알선업, 일본 도착 이후의 도주는 여전히 성행하였다.


박정희 정부의 배상금 지급은 이들 피징용자에게도 이루어졌다. 일본의 경제협력자금으로 제공한 무상 3억달러와 차관 2억달러 속에 이들에 대한 배상금을 포함하고 있다고 박정희 정부는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일본으로 동원된 조선인들은 일본에서 정상적인 급여를 수령했고, 1975년 박정희 정부에 의해서 배상금을 지급받았고, 노무현 정부의 결정에 의해서도 넉넉한 지원금을 다시 받았다. 노무현 정부도 이를 위한 자금을 별도로 요구한 바 없다. 이런 이유로 ‘세 번을 받는다’는 말조차 나왔다.


만약 일본 기업이 이후로 ‘손해배상금’을 지급한다면, 네 번째가 된다. 정부가 아니라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이 도덕적일까?


개인에게는 배금주의를 탓하는 데 멈춘다고 해도, 이제와서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는 일본 기업과 그 요구를 지켜보는 일본 정부는 무엇이 되겠나? 노래도 있다.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한국과 일본이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이렇게 불화한다면, 한일관계의 미래는 없다.


1939년 9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으로 동원된 73만 4천여 조선인 노무자가 일본 기업으로부터 수령하지 못한 ‘미불임금’이 대단히 큰 금액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최소한 실증적으로 규명된 바가 결코 아니다.


하지만 한국의 정부, 연구자, 일반인 모두가 그렇게 오해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이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룬 연구는 거의 없다. 실증적 연구없이, 막연히 그런 환상을 갖고있는 것이다.


우선, ‘미불임금’은 ‘미불금’으로 칭함이 맞다. 그 속에는 임금만이 아니라, 저금, 퇴직적립금 등 퇴직 때 조선인 근로자에게 지급해야 할 각종 적립금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불금이 발생한 이유는 일본 기업이 조선인들에게 이들 금액을 체계적`지속적으로 지급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종전 직후, 조선인들이 주고받을 돈을 미처 정산하지 않고 서둘러 귀국했기 때문이다. 미불금이 대단히 많으리라는 근거없는 추측의 첫 번째 원인은 이러한 오해였다.


두 번째 원인은 자료의 방대함과 연구자의 게으름이다. 일본정부는 이후 발생할 한국인의 채권변제 요구에 대비하기 위해 해당 기업들로 하여금 조선인에게 지급해야 할 ‘미불금’을 모두 공탁하게 하였다. 따라서 미불금 문제를 연구하려면, 일본 정부의 ‘공탁’ 자료를 보아야 한다. 그 자료는 실로 방대하며, 한국정부에 제공된 자료만도 대단히 많은 분량이다. 반일민족주의에 경도된 연구자들이 많이 있지만, 그들은 이것을 분석하지 않은채, 국민에게 그 금액이 대단히 많다는 ‘감(感)’만을 유포해왔다.


셋째, 자료의 성격이다. ‘공탁’ 관계자료에는 1개 기업이 지급해야 할 금액의 총계와 조선인 총수만 나와있다. 따라서 이 금액이 어떤 비율로 구성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 당시 임금과 물가는 통제되었다. 하지만 모든 전시경제가 그렇듯이 암시장의 실제 물가와 임금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 임금이 어느 수준인지, 암시장의 물가 수준이 어떠한지, 그에 대해서도 쉽게 알 수 없다. 즉 총액이 가지는 실질적인 가치를 가늠하기가 단순치 않다.


나는 조선인 1인당 공탁금이 어느 수준인지 알고 싶었다. 마침 1944년 5월과 8월의 한 탄광의 임금자료를 획득했고, 그 이후 종전에 이르기까지 물가와 임금은 급등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나는 공탁문서 중 오직 한 항목, 예컨대 임금, 저금, 퇴직적립금 중에서 한 항목만 있는 기업들의 자료를 선발했다. 그것을 조선인 총수로 나누면, 조선인 1인당 미불 임금 `저축` 적립금 등이 얼마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계산 결과, 조선인이 남기고 간 금액은 대체로 임금 3개월분 이하였다.


설사 미불금 총액이 엄청난 규모였다고 하자. 하지만 그것을 일본인이 조선에 남겨둔 사유재산의 규모와 비교하면, 많아야 수만분의 1에 불과할 것이다. 한일협상 초기에 일본정부는 실제로,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 문제를 제기했고 한국측은 사실상 할 말이 없었다. 일본 정부와 무관한 개인 소유의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선조들이 대단히 많은 금액을 찾아가지 않고 일본에 놓아둔채 무조건 귀국할만큼 어리석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불금’의 규모는 당시 임금, 임금체계, 물가 등을 포괄하는 실증 분석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 더 이상 ‘감’으로 연구를 대신하고, 국민정서와 인기에 영합하여 국민을 오도해서는 안된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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