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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1-21 21:11:25
  • 수정 2018-01-22 17:3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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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전 만든 배의 부품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렇다면 이 배는 천 년 전의 그 배일까, 혹은 다른 배일까

-그 배는 같은 배다. 배의 원형은 우리 각자의 머리속에 존재. 그 배의 실재는 머리속에만 존재하기 때문

-자유에 대한 인식이 사라질수록 공동체는 쪼그라들고, 그것에 대한 인식이 생겨날수록 공동체는 커진다

천 년 전에 멋진 배가 있었다. 이 배를 계속해서 쓰다 보니 부품을 하나 둘씩 갈게 되었다. 그러다가 천 년쯤 지나 오늘날에 이르니 이 배의 모든 부품이 완전히 하나도 남김없이 바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배는 천 년 전의 그 배일까, 혹은 다른 배일까.

▲ 천 년 전 배의 부품을 모두 갈았다면 그 배는 같은 배일까. 사진은 노아의 방주 모형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학의 집합론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모든 집합은 원소를 필요로 한다. 원소가 없는 집합은 집합이 아니다. 만약 A라는 배가 1,2,3 이라는 부품을 가진 것을 이렇게 표현해보자. A = [1,2,3]. 1000년이 지나 A’ = [1′,2′,3′]이 되었다. 그렇다면 A는 이전의 A와 이후의 A’가 다른 A일까?

나는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한다. A에 속한 모든 원소들을 더하거나 빼도 결코 바꿀 수 없는 원소가 있다. A라는 배의 모든 부품을 버리고 없애도 A는 ∅(공집합)을 원소로 가지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가능하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나’라는 물음에 나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수학에서 미스테리한 숫자인 0과 공집합은 통하는 부분이 많다. 공집합은 정의내릴 수 없는 집합이다. 오죽하면 공집합의 정의를 ‘모든 집합의 부분집합’이라고 했겠나.

전체 집합 U의 여집합은 ∅ 이다. 그러면 U에는 ∅ 이 없어야 하는데, U에는 또 ∅ 이 존재한다. 반대로 ∅ 에는 아무런 원소가 없어야 하는데, ∅ 자체로 또한 U이다. 이를 불교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 표현할 수 있다. 이 말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이 설명과 통한다.

나는 죽음 이후에도 내 모든 것이 소멸한 뒤에도 여전히 나다. 내 의지가 이 세상에 남아 계속해서 세상을 움직이는 데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기억속에 혹은 누군가의 메모 속에서 계속해서 살아간다.

배의 모든 부품이 사라져도 그 배는 여전히 그 배다. 그 배의 원형은 눈앞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머리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배의 실재는 머리속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믿음 속에서 살아간다. 믿음이라는 ∅ 속에서만 모든 것이 어우러지고 하나 될 수 있다. ∅ 바깥의 그 어떤 원소로 해도 인간은 같아질 수 없다. 하나될 수 없다. 전체는 아무리 팽창해도 공집합 하나보다 작은 까닭이다. ∅은 U의 바깥에 또 U의 내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전체주의는 자유로운 사회에 무릎 꿇는다. 손오공이 제아무리 까불어봐야 부처님 손바닥 위듯.. 이 문제는 뇌의 문제와도 관계가 되는데, 이 문제는 다음에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왜 영혼이 먼저이고 육신이 나중인가. 영혼없이 육신만 살아나면 좀비가 되지만, 육신이 없이 영혼만 있어도 교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켄슈타인 이야기는 이런 전체주의적인 아이디어로 인간을 설계하는 이야기다. 인간은 ∅을 알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인간을 설계할 수 없다. 인간은 인간의 모든 부분 바깥에 있는 생기(生氣)를 부여할 수 없다.

경제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원리다.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큰 까닭에 제조업의 효율성이 가능하다. 자본이란 시간이다. 완성된 제품에는 절약된 시간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이 부품들이 모여 다시금 전체를 만들때 전체에서 부분의 합을 뺀 만큼 자본을 만든다. 그것은 누군가 독점할 수 없다. 고스란히 사회에 녹아들어 만인에게 재분배된다. 왜 그런가? 전체에서 부분의 합을 뺀 나머지 값을 인간은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다른 나라 사회를 보며 우리사회에는 ‘A라는 원소가 없어, B라는 원소가 없어’라며 온갖 원소들을 타령하며 이것들을 갖고와서 전체 집합을 키워야 된다는 헛소리를 한다. 우리 사회의 원인은 ∅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 그렇다. 그것이 바로 자유다. 자유는 인간 내면에도 있고 인간 외부에도 있다. 모든 것이 자유 속에서 어우러지고 동시에 함께 할 수 있다.

어떤 집합 안에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그 집합의 부분집합이 될 수 밖에 없다. 정답은 집합 바깥에 있다. 절벽에 다다라 한발짝 더 내딛어라. 혹 그럴 수 없다면 주저 앉아 보리수나무 아래로 기어가라. 절벽 아래에도 보리수 나무 아래에도 똑같은 ∅이 있다. 이것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더큰 집합이 가능해진다.

인간은 누군가의 기억속에서 완전히 잊혀졌을 때 죽는다. 관짝에 누웠을 때가 아니라.

자유도 그렇다. 노병이 죽지 않고 사라져 가는 것처럼.

자유에 대한 인식이 사라질수록 공동체는 쪼그라들고, 그것에 대한 인식이 생겨날수록 공동체는 커지게 된다. 왜 그런지는 말로써는 설명하기 어렵다. 전체 U의 바깥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제3의 길' 轉載] 손경모 remaist@hotmail.com/ 자유인문학회 회장, 자유주의, 개인주의, 회의론자. 도덕철학을 연구합니다. 만물의 전제이기 때문입니다. 부차적으로 교환(경제), 현실(정치), 주변(이웃)에 관심이 많습니다. 생(生)철학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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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푸단대학교 한국연구원 객좌교수
    -전 EDUIN News 대표
    -전 OUR NEWS 대표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책기획팀장
    -전 대통령실 홍보기획비서관
    -사단법인 한국가정상담연구소 이사장

    -저서: 북한급변사태와 한반도통일, 2012 다시우파다, 선거마케팅, 한국의 정치광고, 국회의원 선거매뉴얼 등 50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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