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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8-14 14: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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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닉슨 전 미국 대통령 [The Week]


외교정책결정과정을 분석한 학자들 중에는 각 국가의 외교정책의 목표, 수단과 전략은 국제정세, 국내정세와 상대방 국가의 정세와 같은 객관적 환경과 정책결정자의 인식, 국가 비전과 같은 주관적  환경이 연결되어 결정된다는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8․15 선언」을 준비, 결정하는 과정은 학자들의 이러한 외교정책결정 학설의 전형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8․15 선언」발표에 영향을 미친 국제정세, 북한 정세와 국내정세와 당시 박대통령의 정세 인식과 국가 비전은 다음과 같다.


1. 객관적 환경: 국제정세, 북한정세와 국내정세의 변화


가. 국제정세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로는 닉슨 독트린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베트남전쟁 패배가 짙어지면서 아시아지역 분쟁 불개입을 주장하는 반전여론이 확산되는 가운데  1969년 1월 취임한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7월 25일 발표한 괌 독트린과  1970년 2월 8일 미 의회에 보고한 닉슨 독트린은 해외 분쟁 지역에서의 미국의 군사 개입 축소와 미국 동맹국들의 자국 방위책임을 강조하면서 소련, 중국 등 공산진영과의 적대관계 완화와 협조관계 모색을 포함하고 있었다.


 닉슨 독트린은 세계 곳곳의 분쟁지역에 대한 미국의 군사 개입을 축소하고 미국군을 철수하여 소련, 중국과 데탕트를 이루자는 것으로서, 이데올로기적인 대결을 지양하고 비록 이념과 체제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차이를 서로 인정하면서 긴장완화와 평화공존을 추구하여 전쟁을 회피하려는 것이었다.


 닉슨 독트린이 동맹국들의 안전을 소홀히 하는 정책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었다. 미국 측은 1970년 4월 10일 확정된 대한국 군사원조액을 전년도에 비하여 3,000만 달러 삭감한 1억 4,049만 달러로 조정하고, 7월 6일 포터 주한 미국대사를 통하여 주한미군병력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2만 명을 1971년 6월 30일까지 감축, 철수할 것임을 한국 정부에 통보하여 왔다.


 이로써 박 대통령은 대결구조의 남북한 관계를 바꾸어야 할 상황이 왔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나. 북한정세


 북한은 1962년 12월 10일부터 14일까지 개최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조성된 정세와 관련하여 국방력을 더욱 강화할 데 대한 문제」를 토의하고「全인민의 무장화」,「全국토의 요새화」,「全군의 간부화」,「全군의 현대화」라는 4대 군사노선을 결정하였다. 


 북한은 1960년대 초반부터 무력적화 통일을 위해 강화해온 군사력을 기반으로 하여 1960년대 후반에는 한국의 내부 혼란을 조성하는 한편 무력 남침에 대응하는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의지와 힘을 시험하기 위하여 대남 폭력전술을 노골적으로 구사하였다.


 1912년 임자년 태생인 김일성은 1967~1968년 기간 중 인민군부대를 방문하여 “내 환갑잔치를 1972년 4월 15일 서울에서 하자”고 말하고 다닐 정도였으며, 1967~1969년은 북한이 1953년 휴전 이래 폭력전술을 가장 강하게 구사했던 기간이었다.


 1967년의 예로는 9월 5일 포천 철도 폭파사건, 9월 13일 파주 미군 화물차 폭파사건이 있었다. 1968년에 들어 북한은 본격적으로 무장도발을 하기 시작하였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기습을 위한 124군 부대원 31명의 서울 침투, 1월 23일 동해상에서의 미(美)함정 푸에블로 호 납치, 10월 30일부터 11월 3일간 북한의 무장 게릴라 130여 명의 울진․삼척 침투는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듬해인 1969년 4월 15일 북한군에 의한 미군 EC121정찰기 격추 사건 등이 있었고, 이외에도 무장공격, 남한 어선과 어부의 납북, 민간 항공기 납치, 남한주민 살상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다. 국내정세


 국제적 데탕트 분위기와 북한의 호전적 대남 태도가 전개하는 상황에서 한국 내의 정세도 변화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이 5․16 군사혁명으로 집권을 한 후 조국근대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경제건설을 추진하여 한국은 1969년을 계기로 경제적 측면에서 북한을 앞지르게 되었다.


 1960년도 남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을 비교해 보면, 한국이 81달러, 북한이 120달러였으며 이러한 열세는 1968년까지 계속되어 그해 한국이 168달러, 북한이 198달러였다. 그러나 1967년에 시작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고도 성장을 지속하여 남북한 간 경제력 경쟁의 전환점이 되는 1969년에는 한국이 208달러가 되고 북한이 194달러로 떨어지게 되었다.


 박대통령은 1962년 시작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적 추진에 자신감을 갖고 향후 10년 동안만 고도경제성장을 계속한다면 동서독 관계처럼 남한이 북한을 압도하게 될 것이고 통일을 주도하게 될 것임을 확신했다.


 한편 남한 내부의 정치정세는 1969년 10월 17일 실시된 「3선 개헌」 국민투표를 전후하여 결코 순탄하지가 않았다.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등이 이끄는 야당이 민주화 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을 공격하고 남북한 간의 교류를 주장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박대통령은 통일문제 논의의 이니시어티브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2. 주관적 환경: 정세 인식과 대통령의 비전


 「8․15 선언」 발표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꿈꾼 비전이다. 박 대통령은 경제개발의 기초를 다진 1960년대를 ‘민족중흥의 전진 대열을 정비한 역사적 전환’으로 규정하고, 1970년대에 개발도상국 및 중진국 상위권, 1980년대에 중진국의 선두 및 선진국 진출 준비, 1990년대를 거쳐 세기 말에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고 늦어도 2000년 경 전에 통일을 구현한다는 비전을 세우고 각종 국가정책의 초점을 이 비전 구현에 맞추었다.


 박 대통령은 이러한 국가비전을 구현하기 위하여 수출주도형 공업화 전략 하에 1962년부터 시작한 경제개발 5개년계획들과 1970년 4월부터 시작한  새마을 운동으로 1970년대에는 먼저 국민생활의 안정과 산업화를 추진하는 ‘선 경제건설, 후 통일’ 기조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박대통령은  무분별한 통일논의를 자제하되 1970년대 후반에 본격화될 통일논의에 대비하여 1969년 3월 1일 정부 부처 내에 통일문제를 국가적 차원에서 연구하도록 국토통일원을 설치하였다. 


 박대통령의 1970년대 비전은 1970년  1월 9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잘 나타나 있다. 1969년부터 남북한 경제력 비교에서 우위를 확보한 자신감에 찬 박대통령은 “우리가 자조정신, 자립경제, 자주국방의 정신으로 나아가면 1970년대 후반기에 일인당 국민소득 500달러 이상, 수출 50억 달러 대 수출을 달성할 수 있으며 정치·경제·외교·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북한보다 압도적 국력을 급속히 성장시켜 통일에 대비한 여건과 기반 조성을 서둘러서 통일 준비를 완료, 어떠한 통일방안이든 주도권을 잡자”는 1970년대의 장기 비전을 제시하였다.


박대통령은 그 해 「8․15 선언」에서도 1970년대 후반기가 되면 한국의 주체 역량의 충실과 국제적 여건의 성숙으로 통일의 실마리가 잡힐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자유의 힘이 북녘까지 넘쳐흐를 그 때 통일 노력을 본격화하자고 자신의 비전을  다시 강조하였다. (계속)


 [관련기사: 박정희 대통령 「8․15 평화통일구상 선언」의 주요 내용과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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