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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4-01-25 12:3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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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한러수교 140주년 학술 행사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 한러수교 140주년 학술 행사 장면 [사진=Why Times]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4년 4월 대한제국의 황궁(경운궁, 현재의 덕수궁)이 모두 불타버렸다. 1905년 일본제국은 대한제국 외교권을 빼앗았고, 1910년 마침내 대한제국의 주권을 앗아갔다. 당시는 제국주의 시대였다. 어느 나라도 한국을 도와주지 못하였다. 각국은 자국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일본제국과 타협하였다. 그래서 국력이 취약한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에게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 세기가 지난 지금 한국의 기업은 일본은 물론 미국 등 세계의 선진 기업과 경쟁하며 일류를 향해 도약하고 있다.


19세기말~20세기 초의 한국은 매우 극심한 시련기였다. 나라 밖으로는 청일전쟁, 러일전쟁이 이어지면서 한국에 위기가 다가왔다. 안으로는 농민, 구식군대, 개화파 청년 등에 의한 민란, 반란, 정변 등으로 혼란이 지속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한국의 대외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지녔던 나라가 제정러시아였다. 19세기 후반에 아시아에 퍼졌던‘러시아에 대한 공포’의식을 떨쳐버리고 조선은 1884년 제정러시아와 우호조약을 맺었다. 이후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해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앗아가면서 대한제국과 제정러시아의 외교관계는 단절되었다. 근대의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는 약 20년간 공식적인 외교 관계가 이어졌던 것이다.


이때 양국의 국가 리더는 고종과 니콜라이 2세이다. 고종(1852-1919)은 조선의 마지막 국왕(1863-1897)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1897-1907)이며, 니콜라이 2세(1868-1918, 황제재위 1894-1917)는 제정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이다.


고종과 니콜라이 황제 사이에는 많은 공식 문서와 비공식 서한이 오고갔다. 주로 고종이 니콜라이 황제에게 군사와 재정에 관한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조선과 러시아 사이에 군사와 재정에 관한 비밀교섭도 오고갔다. 그러나 영국, 일본 등의 러시아에 대한 견제와 제정러시아 측의 내외 사정에 의해 고종이 요청한 지원은 대부분 실현되기 어려웠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 양국 사이에 ‘비밀협약설’만 남아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


그렇지만, 양국의 역사에서 가장 우호적이고 협력적이었던 시기가 있다. 다름 아닌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피난과 러시아공사관 체류 시기(1896.2-1897.2)가 그것이다. 이때 고종을 위해 충성하며 아관파천을 이끌어낸 조선 측의 인물들이 초대 상주러시아공사를 지낸 이범진 등이었고, 서울에서 협조한 러시아 공사관 측 인물이 베베르와 스페이어 공사였다.


그렇다면, 근대의 한국사에서 아관파천 자체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아울러 이후 이범진은 어떤 활동을 했고, 그의 역할이 갖는 의미는 어떠한 것인가.


청일전쟁과 직후 조선에 나타난 사태는 고종은 물론 조선의 관료와 백성 모두에게 더 할 수 없는 큰 충격이었다. 일본의 조선 왕궁 장악, 조선보호국화기도, 조선왕후시해(명성황후시해) 등이 그의 일부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탈출한 사건은 고종의 생명은 물론 국가의 위기로 인해 만부득이한 상황에서 택한 비상수단으로 해석이 된다.


흔히 “한 나라의 국왕이 왕궁을 버리고 외국공사관으로 피난하는 일이 과연 있을 수 있느냐”, “당장 돌아와 자주권을 확립해야 했다“는 비난이 당시에도 많았고, 현재도 그러하다. 그러나 아관파천은 이미 이루어진 일이었다. 당장 러시아공사관에서 왕궁으로 돌아와 나라의 자주권을 확립하는 일은 고종도 관료들도 간절히 바라는 일이었다. 가공할 물리력으로 위협하는 일본 제국 앞에서 자결 외에 선택할 길이 없는 상황에서 어떠한 묘안이 있을까? 아관파천과 같은 비상수단을 취하지 않았다면 조정과 나라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에 의해 청국의 영토였던 타이완은 1945년까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고종이 일본의 포로가 된 상태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탈출하지 않았다면 나라는 1910년이 아니라 이미 1895년 무렵 타이완과 같은 식민지로 전락했을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 아관파천을 치욕적인 일로만 볼 것이 아니라 19세기말의 한반도와 만주를 둘러싼 러ㆍ일의 경쟁, 나아가 근대 한국사에서 지니는 현실적 의미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한국내의 상황만을 놓고 보아도 아관파천이 갖는 의미는 분명하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1896년 1년 동안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다. 최초의 근대적 정치사회단체인 독립협회가 창립되었다. 그리고 독립국가의 상징물로서 독립문 건립운동이 시작되어 이듬해 완공되었다. 경운궁으로 환궁한 후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1897.10) 다음해에는 청국과 평등한 조약을 체결하였다.(1899) 이로써 과거 5백년간 지속되어 온 중국과 한국의 군신관계를 청산하고 비로소 국가주권을 확립한 것이었다.


아관파천이 없었다면 이 모든 것이 가능했을까? 아관파천은 만부득이한 일이었고, 아관파천을 계기로 독립신문, 독립협회, 독립문이 등장하였고, 대한제국의 탄생이 가능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아관파천은 긍정적으로 볼 측면도 적지 않다.


아관파천 이후 이범진은 어떠한 활동을 했나? 1896년 봄 고종은 그를 워싱턴 주재 미국공사로 파견하였다. 일본 측의 암살 위협으로부터 그를 보호하려는 조치였다. 이후 이범진은 유럽주재 공사, 러시아주재 공사를 지냈다. 서울을 떠날 때 동반한 아들 이위종은 1907년 헤이그특사로 활약했고, 이범진은 미국인 헐버트 등과 함께 헤이그특사 일행을 결정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헤이그특사의 활동은 양육강식이 당연시 되던 제국주의 시대의 국제 환경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대한제국은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잃었다. 나라가 멸망하자 이범진은 모든 유산을 처분하여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전한 후 고위 관료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한 책임감에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러시아에 최초로 파견된 고종의 특사는 민영환, 최초로 주재한 공사는 이범진이다. 두 사람 모두 대한제국이 국권을 상실할 때 황제와 국민들에게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자신들도 지하에서 도울 것이니 용기를 잃지 말고 국권을 회복하도록 노력하라 하였다.


역사속의 모든 국가나 개인이나 절망적인 상황을 맞는 경우는 흔하다. 어떤 경우는 자포자기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어려울수록 용기백배하여 다시 힘차게 일어나기도 한다. 20세기의 대한민국은 후자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보인다. 그 배경에는 제국주의 시대의 시련에도 불구하고 민영환, 이범진과 같은 애국자들의 헌신이 중요한 정신적 자산으로 작용하였고, 대한민국 탄생 이후 역대 주요 리더들의 애국적 의지와 새로운 시대를 보는 국제적 안목, 그리고 군인, 기업가, 교육자 등 모든 한국인들의 피와 땀이 큰 역할을 하였다.


(필자:이민원(문학박사, 대한민국 역사와 미래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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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력>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문학박사(역사학)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연구위원
    -원광대 사범대 초빙교수
    -국제한국사학회(회장)
    -현재: 동아역사연구소(소장)
    현대의전연구소 자문위원

    <주요저술>
    『이상설-신교육과 독립운동의 선구자』』(역사공간, 2017)
    『대한민국의 태동』』(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5)
    『조완구-대종교와 대한민국임시정부』』(역사공간, 2012)
    『조선후기 외교의 주인공들』(백산자료원, 2007)(공저)
    『Q&A한국사: 근현대』(청아출판사, 2008)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국학자료원, 2002)
    『한국의 황제』(대원사, 2001)

    <번역서>

    『국역 윤치호영문일기』 2(국사편찬위원회, 2014)
    『국역 윤치호영문일기』 3(국사편찬위원회, 2015)
    『나의 친구 윤봉길』(도서출판 선인, 2017)(原著: 金光, 『尹奉吉傳』, 上海: 韓光社,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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