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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12-01 12:3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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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Why Times]


나는 무릎이 좋지 않은 편이어서 의자가 있어야 편히 앉아서 쉴 수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산책길에 많은 입식의자가 있어서 잠시 쉬어 갈 수 있어서 편리하다. 그런데 아직까지 동네에 있는 몇 식당은 좌식으로 된 식탁 밖에 없어서 나에게는 상당히 불편하여 그런 식당은 이용할 수가 없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런 좌식의 전통 생활에 익숙했었을 텐데 나이가 들어 늙어지면 무릎과 관절이 좋지 않은 노인들은 생활하기에 상당히 불편했을 것이다.


초기 인류가 현대인보다 다리와 허리가 단련되었더라도 한 동안 서 있으면 피곤해 앉고 싶었을 것이다. 땅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웅크리고 앉아 있거나 평평한 바닥과 적당한 크기의 돌이나 쓰러진 나무에 잠시 앉아서 휴식을 취했을 것이다. 그런 후 차차로 인류가 진화하여 지혜가 발달하면서 의자와 비슷한 받침대를 가공하거나, 나무 덩어리를 석기로 깎아 엉덩이 부분을 평평히 만들어 쓰면서 오늘날의 의자가 탄생했을 것이다.


거의 완벽한 형태로 오늘 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세계의 가장 오래된 의자는 약 4600년 전의 고대 이집트 히데프헤리스(Hetepheres) 왕비가 사용한 황금 의자다. 제 4대 왕조의 초대 파라오 스내프로(Snefuru)의 부인이며, 대 피라미드를 건설했던 쿠프(Khufu)의 어머니이다. 현재는 카이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 의자는 사각형 좌식에 등받이가 있고, 팔걸이 틀도 사각형 형식으로 만들었다. 팔걸이 안쪽은 파피루스 줄기를 끈으로 만든 듯한 부드러운 느낌이 들고, 좌석과 등에는 금박이 붙어 있다. 고대 이집트 시대는 목재 위에다 회반죽을 칠하고서 나무의 진과 수지(獸脂)를 바르고 그 위에 금박을 붙였다.


현대에 들어서 국회나 공식회의 자리 의자는 모두 권위를 상징하는 징표로 활용되는 것을 볼 수 있으나, 16세기까지 의자는 그렇게 흔하지 않았다. 의자의 시작은 고대 이집트 왕조시대 왕좌(王座)로 시작됐다고 본다. 이집트에서 의자란 안락하게 앉는 가구보다는 왕후나 귀족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됐고, 서민은 의자 없이도 지내는 평좌식(平座式) 생활을 했다. 이런 권위를 상징하는 대표적 왕좌(王座)중에는 18왕조 투탕카멘(Tutankhamun)의 의자가 있다. 시트는 높고 은, 보석, 상아 등 호화스럽게 장식한 형태로 모든 왕좌의 원형적 모델이 되었다. 그런 후 그리스 시대에 와서 의자는 점차 권위보다 편리한 생활을 위한 기능적인 측면이 중시되면서 표면의 장식이 억제되고 인체공학적인 면에 부합하는 기능성을 중시하는 형태로 변하여 갔다. 로마시대 의자는 거의 그리스 시대의 의자를 모방하였으나 쾌적한 느낌을 갖는 동시에 권위도 상징하는 호화로운 장식으로 변화를 거듭했다.


서유럽에서 지배계층에게 의자가 보급된 것은 13세기경부터라 한다. 15세기에 들어서는 의자 등받이가 높고 판자로 팔걸이를 만든 의자가 권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변화했다. 18세기 중엽부터는 유럽 전역에 신고전주의 운동이 일어나서 일반시민용 의자가 많이 보급됐다. 이 시대에 윈저(windsor) 지방에서 농민들이 사용하던 재료를 이용하던 지방색 짙은 의자가 후에 미국으로 수출되어서 미국에서도 윈저 체어로 널리 유행했다. 그러나 세계 제1차 대전 후에 바우하우스(Bauhaus)를 중심으로 하여 디자인 운동이 일고, 과거의 수공예적인 장식과잉 양식을 배제하고 기능성에 중점을 둔 현대 스타일의 의자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런 시대를 거치면서 꾸준히 공업 재료의 개발과 생산기술이 발달해서 의자의 디자인과 구조에도 혁명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


중국은 고대에는 좌식문화였으나 서구 유목민이 “스톨(stool)”이라는 의자를 소개하면서 입식문화가 시작되었다. 스톨은 휴대가 간편하기도 하고 접을 수가 있고 등받이가 없는 앉기 전용의 간편 의자이다. 이러한 스톨이 소개되면서 당나라 시절부터 앉는 방식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이 후 휴대용 접이식 스톨에 변화가 생겨서 등받이가 높고 품위도 있는 안정적인 의자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런 높다란 의자는 당나라 시절에 고관들 사이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의자를 좋아하는 움직임이 사회 각층에 전파되었다. 그런 이후 12세기 무렵에 중국에서 맨바닥에 앉아 있는 경우를 거의 보기 힘들게 되었다.


우리 문화에서 온돌을 사용했던 최초의 역사지리학적 자료에 의하면, 기원전 1세기 전후 북방지역 옥저(沃沮)로 알려져 있다. 옥저는 현재 러시아의 한카(khanka) 호와 중국 연변 자치주 그리고 북한의 두만강 유역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고려 말까지는 입식 생활을 유지했으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조 초기까지도 왕은 나무침대를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귀족도 커튼과 병풍을 사용해 바람을 막고 대부분 난로와 화로를 사용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16세기까지 온돌식 난방 문화는 사대부 집에서 환자 치료나 손님 접대용 등 지극히 제한적 목적으로만 사용되었고 아직 일반 서민에게 일반화 되지 못했다. 조선 초의 기록에 의하면 온돌에서 잠을 자면 몸이 약해지고 뼈까지도 약해진다고 믿어왔기 때문에 온돌은 병자나 노인을 위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온돌은 일부분 서민층에서만 사용되던 주거 문화로 남았었다.


그러나 전 세계가 소빙기(小冰期 : Little Ice Age)를 맞으면서 기온이 낮아지고 가뭄과 홍수로 농수산업의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국가의 기반이 흔들렸다. 현종(1670~1671년) 때 발생했던 경신(庚辛)대기근 시절에 조선의 인구 1400만 중에서 1/5이 굶어 죽었고, 숙종(1695~1696년) 때의 을병(乙丙) 대기근에도 냉해와 수해로 농사를 망쳐서 전체의 인구 중 1/4에 해당하는 142만 명이 굶어 죽었다. 중국에서도 아사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중국인구사”에 의하면 1644년에는 인구 1억 9천만 명 중 21%가 감소하여 1억 5천만 명으로 감소했고, 결국 명(明)을 마감하고 청(青)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유럽에도 큰 차이가 없어서 프랑스, 에스토니아, 스코틀랜드, 핀란드 등의 인구도 평균 20~30% 정도 줄어들게 되었다. 모든 국가는 연료용 나무를 구하지 못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영국에서는 이런 위기를 기회로 바꾸며 세계의 강자로 등장하였는데, 바로 연료를 석탄으로 전환하면서 세계 1차 산업 혁명의 시대를 열었다.


이 같은 기후 변화는 추운 겨울이 왔음을 뜻하고, 자연히 추운 겨울을 대비하는 난방 시설의 확충에 눈을 뜨게 되었다. 따라서 연료용 나무가 부족하여 가난했던 서민은 가성비를 걱정해 온돌 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잠을 잘만한 작은 공간만 온돌방으로 꾸미는 “쪽구들” 형태로 시작했으나, 점차로 전국적 일반화 추세가 이어지면서 서민들이 모두 활용하는 난방 기구가 되었다. 그동안 지켜왔던 전통적 입식주거 형태에서 좌식주거 형태로 바뀌면서 식탁에도 변화가 일어나서 소반(小盤) 문화가 도입됐고, 좌식 문화에 익숙해지게 되자 농사일을 할 때도 편리하게 앉아서 일할 수 있는 편한 “호미”와 같은 자그마한 농기구들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세계에서도 드문 좌식문화의 전통을 갖게 되었다. 그 중에서 특히 온돌(温突)은 우리들을 좌식문화로 바꾸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온돌은 세계에서 우리만 갖고 있는 독특한 난방문화다. 온돌이란 “따뜻할 온(温)”과 “구들 돌(堗)”을 합한 “구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구운 돌”이라는 뜻의 “구들”이라는 말을 “온돌(温突)”로 바뀌어 쓰게 된 것은 조선 세종 때의 일로서, 순수한 우리말을 식자들이 한문으로 옮겨 쓴 한문 글이다. 그리고 1425년인 세종 7년에는 세종이 성균관 학생의 습질(아토피와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기숙사에 온돌과 목욕탕의 설치를 명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우리의 전통 좌식문화인 “엉덩이의 귀소성” 습관은 1970년대부터 입식문화를 탑재한 양옥집이 보급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양옥집에 살면서도 여전히 안방에서 밥상을 받아 식사를 했고, 보통 아랫목에 온 가족이 둘러 앉아 정담을 나누거나 TV를 시청했었다. 따뜻한 온돌방에 이불을 덮고 둘러앉아서 가족(Family = Father And Mother l love You)의 우의와 예의범절을 논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1980년 초반부터 불어닥친 아파트 붐으로 좌식문화는 결정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고, 여기에 난방 시스템도 새롭게 도입되면서 아궁이 문화까지 바뀌게 되었다. 이제 전통을 보존할 목적의 가옥이나 일부의 농촌지역을 제외하면 좌식문화의 상징들을 찾기 어려워 졌으며, 전통문화의 대표적 상징이던 밥상머리 문화도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해서 지식제일주의와 개인주의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제는 도덕 윤리와 예의범절의 중요 학습장이던 “밥상머리 교육”이 사라졌다. 극단적인 지식 제일주의 사회로 변하면서 도덕, 예의에 대한 교육이 실종된 지 오래됐고, 그래서 지금 우리 사회에는 배운 자들이 더 큰 비양심적인 문제를 일으키면서 사회를 더욱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일반 국민들도 양심과는 거리가 먼 한탕주의 사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학교에서는 지식중심적인 교육에만 집중하고 있으며 가정에서 학부모는 오로지 신체적인 발육과 영양공급만 책임지려는 이른바 영양사 역할에만 집중한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우리 전통 문화로 자랑하던 동방예의라는 위상은 과거 역사 속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그래도 “온돌(ondol)”이란 난방 시스템은 한글과 금속활자와 더불어 한민족의 3대 발명품 중에서 하나로 알려져 있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옥스퍼드 사전(OED) 등에 “한국의 바닥 난방장치”라고 설명한 고유의 단어로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한옥의 세계화도 추진되고 있는 반가운 소식까지 들리고 있다. 방탄소년단(BTS)이 뮤직 비디오의 배경에 한옥을 소개한 이래, 한 지방 대학 한옥학과의 도움으로 알제리와 베트남 등에 한옥 어린이집과 한옥 정자를 수출하였고, 미국 호주 독일 등의 국가들과도 한옥 수출을 위한 협상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미국 조지아주 엘리제이(Ellijey)에 한옥 단지를 신축하여 시민들에게도 분양할 계획이라 한다. 한옥과 온돌 문화와 도덕과 예의범절을 존중하는 가족주의 문화가 다시 한 번 꽃피는 세상을 만들어 세계인들에게 긍정적 화제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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