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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3-13 18:08:57
  • 수정 2018-04-05 10: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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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돌이켜 보면 이명박 정부 시기에 중국과의 관계가 그나마 나았다고 판단하게 될 것
-중국의 개헌투표는 전국민 직접투표도 아니고 전인대회의의 간접 공개투표 등 비민주방식
-북한, 공개검증으로 핵폭탄과 미사일 해체 거쳐서 미군의 원산주둔에 합의하는 것이 살 길

“이는 전인대 대표가 각 지방ㆍ조직 별 엘리트와 모범 당원들로 구성됐다는 점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또 이날 투표가 진행된 방식도 감안해야 한다. 표결장에 26개의 투표함이 설치되긴 했지만 비밀을 보장하기 위한 기표소는 없었다. 전인대 대표들은 각자 좌석에서 투표용지에 찬반을 표기한 뒤 순서에 따라 걸어나가 투함(投函)했다. A4 크기의 투표 용지는 접지 않고 그대로 투표함에 넣게 했다. 무기명 투표이긴 했지만 완전한 비밀 투표라 보기 어려운 방식이었다.”
‘시진핑 황제 개헌’ 贊2958 反2…비밀보장 기표소는 없었다


한반도에 점점 어려운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앞으로 돌이켜 보면 이명박 정부 시기에 중국과의 관계가 그나마 나았다고 판단하게 될 것입니다.


중국 입장에서, 중앙집중 권력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1972년 한국의 10월 유신도 유사했는데 사실 주변 여건의 변화에서 더 심각했습니다.

10월 유신의 계기는 미국과 중공의 화해에서 비롯된 역관계의 역전처럼 보이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 전자산업 육성의 완성과 같은 ‘산업과 경제의 비약 과제 달성’이라는 명분이 추가됐지만 결국 그 평가는 역사에 맡겨져 있습니다.


당대 민주화 투쟁 세력의 관점에서 10월 유신은 ‘독재체제의 강화’였습니다.

그래도 국민투표를 할 때 직접•보통•비밀투표의 원칙은 어느 정도 지켰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개헌투표는 전국민 대상의 직접투표도 아니고 의회격인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 의한 간접투표인데다가 거의 공개투표였다고 합니다. 99%를 넘는 찬성율은 그렇게 나온 것입니다.


민주화투쟁 세력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번 중국의 개헌은 한국의 10월 유신보다 더 심한 반민주적 폭거일 것입니다.

한국의 민주화 투쟁을 자처하는 세력 중 특히 친중세력은 이제 인지부조화와 혼란에 빠져들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친중’이라는 입장 하나로 모든 것이 정당화될 것 같습니다.


루이14세 시기의 네덜란드의 상황과 딱 맞아 떨어집니다.

당시 프랑스는 점점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가 되면서 스페인을 대체하여 유럽의 곳곳에서 전쟁을 벌이면서 영토확장을 추구하는 ‘제국’으로 변신했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네덜란드 상인자본 세력이 ‘명예혁명’이라는 계기를 이용하여 영국으로 이주했던 것입니다. 이후 네덜란드는 독립을 전후한 시기만큼 번영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제국과 국경이 인접한 국가는 이렇게 압박을 받아 성장하지 못하게 됩니다.


지금 한반도의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는 유일한 방법은 북한이 ‘진정성 있게’ 유엔에서 핵 포기를 선언하고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하기 전 2달간 공개검증 속에 핵폭탄과 미사일 해체를 거쳐서 회담을 한 후에 미군의 원산 주둔에 합의하는 것입니다.


▲ 군수공장이 들어서 있는 원산시 [사진; 구글]


최근 중국이 한반도 문제에 침묵하는 것은 아마도 한법개정에 온 힘을 기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트럼프 미국이 눈감고 있는 것도 한 이유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틈에 북한도 미국과 원교(遠交)하면 될 것입니다.

원교의 대상이 다행스럽게도 세계최대 강대국인 것입니다.

중•일•러 등은 충분히 견제할 수 있습니다.


미군이 원산에 주둔하면 중•일•러의 삼각형 한가운데에 미군이 위치하면서 동아시아에서 어떤 전쟁도 예방하는 ‘균형자’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북한이 만일 베트남 공산당 정도의 원교근공 혹은 강력한 원교(遠交)를 기반으로 하는 ‘자주성을 침해 당하지 않는 근교(近交)’를 하고자 한다면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타당합니다.


그나마 북한과 조건이 비슷한 스웨덴이 대북방전쟁 패전 이후 영국과 ‘원교’하는 힘에 근거하여 러시아의 자주권 침해를 물리쳤던 사례를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웨덴이 영국과 원교를 실행할 때 프랑스가 여전히 영국의 위협세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스웨덴은 프랑스를 전통적인 원교(遠交)의 중심으로 삼았지만 대북방전쟁 이후에는 영국으로 중심축을 옮겼던 것입니다.


러시아의 자주성 침해를 결국 이겨낸 힘은 영국과의 원교(遠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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