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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3-01 10:38:28
  • 수정 2018-03-01 10:3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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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 위안부 관련 보도자료를 한국 근현대사연구회 이우연 위원의 검증한 내용이다. 서울시 발표가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가?
-이우연 위원은 서울시의 발표가 상당부분 잘못됐고 왜곡되었다고 주장한다. 단편적 사진들을 무리하게 연결하여 해석했다는 것이다.


오늘은 99주년 3.1절이다. 이날에 일제의 학정을 기억하고 또다시 우리가 이러한 치욕을 맛보지 않겠다는 결심을 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3.1정신을 지금에 되살려 대한민국을 지키는 일에 나선다면 더더욱 아름다운 일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역사를 왜곡해 가면서 포퓰리즘적으로 해석하고 또 선동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일 것이다. 역사적 기록에 ‘확증편향’이 MSG로 첨가되면 역사는 소설이 되고야 만다.


본지는 많은 국민들을 흥분하게 만들었던 서울시의 위안부 관련 보도자료를 한국 근현대사연구회 이우연 위원의 검증 내용을 공개하기로 하였다.


앞으로 이 이슈에 대해 언제든지 추가 논쟁도 가능함을 밝혀둔다.


[서울시 보도자료]


<요지>


# 아시아‧태평양전쟁이 패전으로 치닫던 1944년 6월, 미‧중 연합군(Y군)은 중국 송산과 등충에 주둔해있던 일본군을 공격, 9월 7일과 14일 각각 송산과 등충을 함락했다. 당시 이곳에는 일본군에 의해 끌려온 조선인 ‘위안부’ 70~80여 명이 있었다. 이중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혀 생존한 23명을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는 전쟁 막바지 패전이 임박한 일본군에 의해 학살돼 버려졌다.


# 당시 미‧중 연합군(Y군 제54군)이 보고를 위해 작성한 문서에는 등충이 함락되기 직전인 9월 “13일 밤 일본군이 조선인 여성 30명을 총살했다(Night of the 13th the Japs shot 30 Korean girls in the city)”라고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발표내용>


서울시가 99주년 3.1절을 맞아 2월 27일 개최한 한·중·일 일본군 위안부 국제컨퍼런스에서 일본군이 조선인 위안부를 학살했음을 보여주는 영상을 최초로 공개했다.


서울시가 공개한 이 자료는 아시아‧태평양전쟁 패전 직전인 1944년 중국 등충에서 조선인 위안부들이 학살된 후 버려진 모습을 담은 19초 분량의 흑백영상이다. 또 당시 미‧중 연합군이 일본군의 조선인 위안부 학살을 분명히 인지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연합군 보고문서를 비롯한 문서 14점과 사진자료 2점도 공개했다.


영상은 서울시와 서울대인권센터 정진성교수연구팀(이하 ‘서울대 연구팀’)이 2016년과 2017년 두 차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을 방문해 끈질긴 자료조사와 발굴 작업을 거친 끝에 촬영된 지 70여년 만에 세상에 공개될 수 있었다.


이번 자료는 1944년 9월 중국 송산과 등충에 주둔했던 일본군을 공격한 중국-버마-인도 전구(戰區) 미‧중 연합군이 생산한 것이다. 연합군 164통신대 사진중대 B파견대 볼드윈 병사가 1944년 9월 15일 촬영했으며, 영상 속 장소는 중국 운남성 등충성 안팎 장소로 추정된다.


◦일본군의 ‘위안부 학살’ 영상, 사진, 작전일지 공개


서울시가 3.1절 99주년을 기념해 27일 개최한 한‧중‧일 ‘일본군 위안부 국제컨퍼런스’에서 일본군이 조선인 위안부를 학살했음을 보여주는 영상을 최초로 공개했다.


아시아‧태평양전쟁 패전 직전인 1944년 중국 등충에서 조선인 위안부들이 학살된 후 버려진 모습을 담은 19초 분량의 흑백영상이다. 또 당시 미‧중 연합군이 일본군의 조선인 위안부 학살을 분명히 인지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연합군 보고문서를 비롯한 문서 14점과 사진자료 2점도 공개했다.

영상은 서울시와 서울대인권센터 정진성교수연구팀(이하 ‘서울대 연구팀’)이 2016년과 2017년 두 차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을 방문해 끈질긴 자료조사와 발굴 작업을 거친 끝에 촬영된 지 70여년 만에 세상에 공개될 수 있었다.


이번 자료는 1944년 9월 중국 송산과 등충에 주둔했던 일본군을 공격한 중국-버마-인도 전구(戰區) 미‧중 연합군이 생산한 것이다. 연합군 164통신대 사진중대 B파견대 볼드윈 병사가 1944년 9월 15일 촬영했으며, 영상 속 장소는 중국 운남성 등충성 안팎 장소로 추정된다.


◦패전 직전, 자결 거부하자 학살


일본군이 위안부를 학살했다는 증언, 기사 등이 공개된 적은 있지만 조선인 위안부를 포함해 일본군의 위안부 학살 현장이 촬영된 영상이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서울시가 2016년 발굴한 위안부 학살 사진 (촬영일 1944.9.15)


패전이 임박한 1944년 9월 중국 송산과 등충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당시 일본 작전참모였던 츠지 마사노부 대좌는 “지원병력이 도착하는 10월까지 계속 저항하라”는 사실상 ‘옥쇄’(강제적 집단자결) 지시를 내렸다. 이를 거부했던 조선인 위안부들은 일부 민간인들과 함께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당시 중국 송산에는 24명, 등충에는 최소 30명 이상의 위안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2016년 수집한 사진(좌)과 2017년 발굴한 영상(우)이 동일 장소에서 촬영된 것임을 보여주는 근거, 사진 속 시체의 옷차림


▲ 2016년 수집한 사진(위)과 2017년 발굴한 영상(아래)이 동일 장소에서 촬영된 것임을 보여주는 근거, 중국군 병사 등장


◦2016년 수집한 위안부 학살현장 사진과 같은 장소에서 영상 촬영


이번에 공개된 영상은 서울시와 서울대 연구팀이 앞서 2016년 수집한 조선인 위안부 학살현장 사진 원본 2장과 같은 곳에서 촬영된 것으로 확인돼 역사적 입증자료로서 무게를 더한다.


연구팀은 전쟁 당시에는 사진촬영과 영상촬영이 함께 이뤄졌었다는 점에 주목, 2016년에 위안부 학살 사진을 수집한 이후 그 후속작업으로 영상에 대한 수개월간의 타겟팅 및 목록화 과정을 진행해 1년 만에 영상 발굴에 성공했다.


연구팀은 2017년 발굴한 영상과 2016년 수집한 사진원본이 각도만 다를 뿐 동일한 장소에서 촬영된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근거로 영상과 사진 속 시체의 옷차림, 매장을 하러 온 것으로 보이는 사진 속 중국군 병사가 영상 속에도 등장하는 점 등을 제시했다.


2장의 사진 자료는 등충에서 사진병 프랭크 맨워렌이 촬영한 것으로 조선인 위안부가 학살된 모습을 담았다. 영상 속에는 사진에 등장하는 중국 병사가 시체의 양말을 벗기는 모습이 나온다.


◦서울시,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관리사업 계속 추진


강성현 교수(성공회대)는 “일본정부가 위안부 학살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쟁 말기에 조선인 위안부가 처했던 상황과 실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시와 연구팀은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특히 전시에 여성을 전쟁터로 동원하고 성적 ‘위안’ 도구로 사용하다가 최후에 ‘특종군수품’ 폐기라는 발상으로 학살하는 일은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하며, 이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사과해야만 이런 상황의 반복을 막을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울시는 올해도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관리사업을 추진한다. 국내‧외 발굴조사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관련 사료를 수집하고 기록물로 관리해 역사적 자료로 활용하고, 위안부 관련 연구와 외교적 역량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는 계획이다.


지금까지 발굴한 문서, 증언, 사진, 영상 자료는 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중 콘텐츠 제작 등에 활용할 예정이다. 그 시작으로 오는 3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증언과 사료를 교차분석한 사례집을 시리즈로 출판할 계획이다.


<팩트체크>


서울시의 이러한 발표에 대해 한국근현대사연구소의 이우연 위원이 팩트체크에 나섰다.


1. 6명의 시신을 찍은 19초의 동영상이 미국국가기록원(NARA)에 소장되어 있다.


2. 미중 연합군은 1944년 9월 14일에 텅충(등충)을 점령하였고, 미군이 15일에 작성한 보고서에는 함락 하루 전 "13일 밤, 그 도시에서 일본군은 한국 여성 30명을 총살했다(Night of the 13th the Japs shot 30 Korean girls in the city)는 기록이 있다.


3. 텅충(등충) 점령과 함께 포로가 된 사람 속에는 조선인 위안부 23명이 있었다.


강성현`정진성 교수는 이 세 가지 사실을 한 데 묶어 “당시 텅충(등충)에는 일본군에 의해 끌려온 조선인 위안부가 7~80여 명 있었는데, 일본군은 옥쇄를 명령하였다. 이에 불응한 30여명은 학살되었고, 23명이 살아남아 포로가 되었다”고 한 모양이다.


그러나 위 세 가지는 단일한 자료로부터 나온 사실들이 아니며,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아래와 같은 의문에 답하거나,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위 주장은 강성현·정진성 교수가 상상력을 과도하게 발휘, 엮어 만든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1번 관련, 이 영상이 2번의 "총살"된 "30명의 한국인 여성"이라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투 중 발생한 무고한 민간일 수 있고, 군기가 서지 못했던 중국군의 함락후 폭행과 그후 살해로 희생된 사람일 수도 있다. 여하튼 2번과 연결할 수 있는 증거가 없다.


2번 관련이다. 위 세 가지 중에서 유일하게 새로운 사실은 미군이 "Night of the 13th the Japs shot 30 Korean girls in the city"라는 기록을 남겼다는 점이다. 그러나 해당 기록이 일본군이나 조선인 위안부 포로의 심문결과, 목격자의 증언, 풍문 등,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점령한지 바로 뒷날에 작성된 문서이므로, 체계적인 포로 심문 등 자세한 조사결과는 아닐 것이다.


그 "학살"이 사실이라면, 미군이 대규모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전면적으로 조사하지 않고 넘어간 이유는 무엇일까? 급박한 전황? 화면에서 스쳐간 것으로는 문서의 내용을 알 수 없고, 그 전체를 찾아 읽을 수 없다(혹시 발견하신 분이나 관련 연구자께서는 알려주시면 대단히 고맙겠다).


3번 관련,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 23명이 '총살'을 면하고 살아남은 자들이라는 근거가 무엇인지, 즉 2번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해당 미군 기록을 통해 '한국인 위안부 30 여명을 총살하였고 살아남은 자가 23명'이라고 기록되어있는가? 그것이 없는 한, '30명 총살'設 ,그리고 '23명의 위안부 포로'라는 사실은 전혀 관계가 없다. 전자는 진위를 밝혀야할 "設"에 불과하며, 후자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사례다.


요컨대, 1번과 3번은 2번의 미군 기록을 입증하는 증거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들은 심각한 논리적 비약이라는 비판을 무릅쓰고 그를 무리하게 주장했고, 언론은 어떠한 비판의식도 없이 그대로 받아쓰는 것으로 부족해 일본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를 크게 높여 덧붙였다. 동영상이 있다니 얼마나 주목받겠는가? 이로 인해 '한일관계 정상화'는 더욱 미루어질 것이다.


일부 위안부 연구자들의 "연구"나 언론의 "보도" 행태에 대한 유감, 한마디만 하자면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이우연 위원의 글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밴드에 올려져 있다. *이 기사는 천세영 논설위원이 자료 제공을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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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푸단대학교 한국연구원 객좌교수
    -전 EDUIN News 대표
    -전 OUR NEWS 대표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책기획팀장
    -전 대통령실 홍보기획비서관
    -사단법인 한국가정상담연구소 이사장

    -저서: 북한급변사태와 한반도통일, 2012 다시우파다, 선거마케팅, 한국의 정치광고, 국회의원 선거매뉴얼 등 50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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