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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2-19 17:4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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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 인민, 주권이 확보되지 않은 임시정부헌법이기 때문에 사법부의 독립이나 재정(財政)조항은 실질적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조국은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해방되었지만 이 해방은 임시정부가 주도해서 얻어진 해방은 아니다.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헌법노선을 계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임시정부수립일을 대한민국의 건국일로 삼자는 주장은 논리적으로나 사실관계나 국제법의 어느 것으로 보아도 지나친 비약이 아닐 수 없다.
-영토, 인민, 주권이 없는 임시정부는 소수의 민족운동 지도자들의 독립운동단체로서 정식 정부, 정식국가를 세울 준비단체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국가기능의 어느 것도 행사할 수 없는 존재가 임시정부일진데 이러한 임시정부수립일을 건국일로 삼자는 주장은 특정한 신념이나 가치관의 표현은 될 수 있어도 보편타당한 견해로 받아들일 수 없다

한국헌법제정의 연원(淵源)을 되돌아보면서


1. 들어가면서


대한민국의 국가근본규범으로서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제정한지 금년으로 70주년을 맞는다. 70년이라는 세월은 5000년을 헤아리는 우리나라의 긴 역사에서 볼 때 너무 일천(日淺)하다. 그러나 1인의 자유는 있었으나 만인의 자유가 없던 동양적 전제주의국가(Oriental Despotism)를 청산하고 민주주의 헌법을 갖추게 된 것은 다른 아시아제국들에 비해 크게 늦은 편은 아니다. 


우리 민족은 현재와 같은 민주헌법을 갖기 이전에는 주권이 군주 1인에게 있던 군주국가, 그것의 형태가 외세의 영향으로 국명(國名)만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바뀐 제국(Empire)시대를 살았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일제(日帝)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고 일본에 강제 합병됨으로 말미암아 국가적 존재가 사라졌다. 1910년의 한일합병은 대한제국의 종언(終焉)을 의미함과 동시에 황제1인에게 있던 군주주권의 종말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글은 ‘한일합병에 의해 헌법적으로 소멸된 대한제국의 군주주권이 어떻게 민주주권으로 부활되어 현재와 같은 자유민주주의 헌법으로 발전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경위를 살피고 9차에 걸친 개헌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른 우리 헌법의 연원(淵源)을 밝힘으로써 오는 7월 17일로 70주년을 맞는 제헌절의 의의를 재음미하고자 한다.


2. 제국(帝國)에서 민주공화국으로


한일합병조약에 의해 대한제국은 없어졌다. 그러나 서구 국제법학자들은 합병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되었다고 해서 합병 전에 존재했던 국가가 완전 소멸하는 것은 아니고 주권만 없어졌을 뿐 영토와 인민은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에 합병이전국가는 주권의 회복을 기다리는 상태 즉 법적으로 잠들어 있는(Legally dormant)상태라고 말한다. 


즉 영토와 인민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주권만 회복되면 국가의 소생(蘇生)이나 부활(復活)이 가능할 것을 예상한다. 


또 독일 국제법학계의 Verdross나 스위스의 Gugenheim같은 학자는 사기(詐欺)와 강박(强迫)에 의한 조약의 원천무효(Originally null and void)를 규정한 로마법 정신에 비추어 한일합병조약은 그것이 군사적 점령상태 하에서 강요된 조약인 만큼 원천무효로 보아야 옳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반론도 있다. '사기강박에 의한 조약이 원천무효'라는 법리가 국제법으로 정착된 것은 1932년의 미 국무장관 Stimson Doctrine이후부터이기 때문에 1910년에 체결된 한일합병조약은 원천무효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최근의 다수이론은 인민의 투표 아닌 강박에 의한 조약은 원천 무효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한국에도 이러한 맥락에서 한일합병조약은 원천무효라는 주장을 내세운 분이 있었다. 항일독립운동지도자의 한분이셨던 조소앙(趙素昻) 선생이다. 본명이 조용은(趙鏞殷)인 조소앙 선생은 당초에는 성균관 유생이었지만 고종황제의 각별한 관심과 장학금으로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 중학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명치대학(明治大學)법학부로 진학했다. 그는 졸업 후 귀국하여 국가에 유공한 인생을 살려고 했지만 졸업 1년을 앞두고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기는 비운을 맞이했다. 그는 1911년 졸업과 동시에 망국한(亡國恨)을 품고 만주(滿洲)로 이주하여 험난한 항일독립운동의 대장정에 뛰어 들었다. 


그는 독립운동에 나서면서부터 막연한 항일독립이 아니라 법학도답게 독립의 법적근거를 모색하던 끝에 ‘강박에 의한 조약의 원천무효’라는 법리를 생각하면서 한국독립의 법리적 토대를 쌓는데 주력하였다. 그는 1917년 7월 샹하이에서 독립운동지도자 14인의 연서로 발표한 대동단결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주권승계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전략, “융희황제가 3보(三寶:토지와 국민과 통치)를 포기한 경술년 8월 29일은 바로 우리 국민들이 삼보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 그 사이에 한순간도 정식(停息)이 없었다. 우리 국민은 완전한 상속자이다. 저 제권(帝權)소멸의 시기가 바로 민권발생의 시기요 구한(舊韓)최초의 1일은 신한(新韓)최초의 1일이다. 우리 한국은 태고 때부터 한국 사람의 한국이요 비한인(非韓人)의 한국이 아니다. 한국인 사이에 주권을 주고받는 것은 역사상 불문법의 국법이요 비 한인에게 주권을 양도한 것은 근본적으로 무효이며 한민족성의 절대 불허하는 바이다. 경술년 융희황제의 주권포기는 곧 국민에 대한 묵시적 선위(禪位)다. 우리 국민들은 당연히 삼보를 계승하여 통치할 특권이 있고 또 대통을 상속할 의무가 있다.”>고 선언하였다.     


 이런 논리에서 조소앙은 대한민국임시정부(臨時政府)론을 제창한다. 그는 경술년(庚戌年)의 합병조약으로 이 땅에서 군주주권은 사멸하고 인민에게 주권이 넘어왔기 때문에 대한제국의 복국(復國)이 아닌 대한‘민국’을 새로 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일을 위해 해외에서 우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말로 혁명적 발상이었다. 


그러나 당시 독립운동에 참가한 인사들은 대부분이 구한말의 관료들이어거나 충효사상에 물든 유생들이었기 때문에 조소앙의 혁명적 발상에 공감하기보다는 반발하는 경우도 많았다. 


다행히 이승만, 안창호, 김규식, 여운형 등 개명된 인사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주장을 적극 옹호하였고 특히 한일합병 후 7개 지역에 세워진 임시정부들이 한성(漢城)임시정부로 통합된 것을 계기로 중국의 샹하이(上海)에 새로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움으로써 독립운동의 목표가 대한제국의 복국이 아닌 대한민국의 수립으로 정착되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고종황제를 망명시켜 망명정부(亡命政府)를 만들려는 기도가 이회영(李會榮) 선생을 중심으로 추진되었지만 이 공작이 실패하면서 망명정부 론은 사라지고 임시정부를 세우는 쪽으로 독립운동이 가닥을 잡았다. 임시정부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등장된 논의의 핵심은 곧 임시정부의 헌법제정이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3. 임시정부의 헌법과 6차에 걸친 개정         


임시정부헌법은 1941년 4월11일 전문 10조로 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이었다. 이 헌장은 전문에서 정부설립의 근거를 1919년 한성(漢城)에서 기의(起義)한 3.1운동에 나타난 주권의지와 이 의지를 구현하기위해 설립된 대조선공화국(세칭 한성정부)을 샹하이에서 다시 조직한다고 밝히고 있다.


 즉 임시정부수립의 법원(法源)을 주권자인 국민의 독립의지가 발현된 3.1독립운동으로 정하고 정식 정부를 수립하기위한 준비정부로서 임시정부를 세운 것이기 때문에 조소앙 선생이 기초한 최초의 헌법은 임시정부헌장이라고 하여 전문 10조로 독립운동의 지향방향만을 선언하고 있다. 


우선 헌장은 제1조에서 민주공화제를 선언하고 제2조에서 임시의정원의 결의로서 통치한다는 대의제를 명시했다. 제3조에서는 인민의 기본권으로서 평등권, 자유권, 참정권을 정하고 제10조에서는 ‘광복 후에는 1년 내에 국회를 소집한다.’는 등 선언적 항목을 나열했다. 


 당시 6차에 걸친 임시정부 헌법개정상황을 개괄하면 헌법으로서 체제를 갖춘 것은 8장58조로 된 제2차 개헌(安昌浩주도)과 7장 62조로 된 6차 개헌이다. 그 밖의 3차, 4차, 5차 개헌은 이른바 약헌 이라고 말할 정도로 상황, 상황에 따라 필요한 개정을 삽입 내지 삭제하고 있다. 


영토, 인민, 주권이 확보되지 않은 임시정부헌법이기 때문에 사법부의 독립이나 재정(財政)조항은 실질적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정부형태도 독립운동세력들 간의 갈등이나 견해대립을 반영, 1919년에는 대통령제, 1925년에는 내각책임제로서 국무령이 권력의 수반이었고 1927년에는 관리정부형태, 1940년과 44년에는 주석을 수반으로 하는 절충식정부형태로 진화되어 왔다. 


 임시정부는 이처럼 상황변동에 따라 헌법의 틀을 바꾸면서 중국의 샹하이에서 출범하여 충칭(重慶)에서 끝마칠 때까지 27년간 존속했지만 영토, 인민, 주권은 없고 오직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나선 우두머리들뿐이었기 때문에 당시 임시정부는 영일(寧日)없이 정쟁에만 휩싸여 단 하루도 민족독립운동지도부로서 제 구실을 못했다고 역사학자 한시준(韓詩俊)교수는 그의 임시정부연구논문에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임시정부는 역시 임시정부였던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조국은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해방되었지만 이 해방은 임시정부가 주도해서 얻어진 해방은 아니다. 연합국의 승리로 이루어진 해방이었기 때문에 한반도는 전승국인 미소양군의 점령 하에서 군정을 실시하게 됨에 따라 임시정부는 광복된 조국에서는 그 존재가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임시정부인사들의 귀국도 임시정부요인으로서가 아니라 독립운동자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광복 후 1년 내에 국회를 구성하고 정식정부를 세운다.”는 임시정부헌법이 정한 절차마저 사문화(死文化)하고 말았다. 


결국 임시정부는 중국이나 구미(歐美)지역에 산재했던 수많은 독립운동단체의 하나로 전락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수립은 광복 후 3년 이내에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를 통해 국회를 구성하고 국회가 대통령을 선출하여 정부가 수립되는 등 임시정부헌법이 정한 원칙과 절차를 그나마 제대로 구현할 수 있었다. 나아가 임정의 마지막 개헌에서 중시했던 경제민주화조항도 대한민국헌법에서 대폭 수용, 사회국가적 요청도 반영하였다. 이점에서 소련군정이 임의(任意)로 만든 북한정권과는 달리 임시정부의 헌법노선은 대한민국으로 그대로 승계 구현되었던 것이다.  

   

4. 글을 마치면서 


이글을 맺으면서 두 가지 이야기를 첨언하고 싶다. 


첫째 일본의 한일합방은 원천무효(Originally Null and void)라는 것이 이승만 대통령이래의 한국외교의 확고한 원칙이었다. 조소앙이 부르짖었던 원천무효론이나 융희(隆熙)황제의 묵시적 선위 론 역시 대일외교에 적용할 논리적 기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1965년에 타결된 한일국교정상화는 원천무효를 관철시키지 못했다. 당시 이동원 외무장관과 시나 에이사부로(推名)일본외상 간에 합의된 것은 원천무효가 아니라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였다. 원천무효가 아닌 한 35년 동안 한민족이 일본에게 당한 피해를 전면 보상하라는 법적 근거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하기위한 경제적 필요성에서 일본으로부터 우선 급한 경제지원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원칙문제를 양보했다는 사정은 이해하지만 그 당시의 잘못된 ‘원칙 양보’가 결국 오늘날 까지 한일양국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하는 요인으로 크게 작용하고 있음은 반성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헌법노선을 계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임시정부수립일을 대한민국의 건국일로 삼자는 주장은 논리적으로나 사실관계나 국제법의 어느 것으로 보아도 지나친 비약이 아닐 수 없다. 


국제사회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한 치의 영토도 갖지 못한 임시정부를 법적존재로 승인한바 없다. 프랑스의 드골이 영국에 세운 임시정부가 어렵사리 법적존재로 승인받은 것은 프랑스 본토는 나치에게 점령당했지만 알제리라는 식민지영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토, 인민, 주권이 없는 임시정부는 소수의 민족운동 지도자들의 독립운동단체로서 정식 정부, 정식국가를 세울 준비단체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미국의 루스벨트대통령이나 투르만대통령은 국민의 선거에 의하지 않고 몇몇 지도자가 중심이 된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는 것을 외교원칙으로 삼았다. 이유는 미국정부가 법적으로 승인한 정부가 국내선거에서 패배했을 경우 미국의 국익에 반할 수 있고 심지어 반미운동의 명분이 될 수 있다는 견지에서다. 


정부는 어느 경우에나 영토, 인민, 주권을 가진 존재로서 국민을 법에 의해 통치하고 조세로 재정을 충당하고 병역의무를 통해 국가를 방위하고 법을 위반한자에 대해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국가기능의 어느 것도 행사할 수 없는 존재가 임시정부일진데 이러한 임시정부수립일을 건국일로 삼자는 주장은 특정한 신념이나 가치관의 표현은 될 수 있어도 보편타당한 견해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소신이다. 


임시정부지도자들이 중국대륙에서 풍찬노숙하면서 겪었던 고통과 아픔은 필설로 형언할 수 없다. 그러나 해방의 역사, 광복의 역사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고생에 부응한 처우를 못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한 임시정부수립일을 대한민국건국일로 바꾼다고 해서 해방 후 임시정부지도자들이 받았던 상처가 치유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제70주년 제헌절이 우리 헌법에 대한 국론을 통일하고 국가적 권위와 국민적 애정을 되살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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