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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11-04 09:25:45
  • 수정 2020-11-04 14: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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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BBC Capture]


[2020년 大選의 勝者가 가려지지 않을 경우에는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이에 관한 先例들을 살펴본다]
Yahoo Life / Liz Cantrell 기자 /2020년 11월 2일


미국의 2020 대선(大選)은 고함지르기 대통령후보 TV 토론과 유례없는 대규모의 사전 투표 및 선거일 8일 전에 이루어진 대법관 임명 인준 등으로 특징지워진 역사상 유례없는 가장 혼란스럽고 기괴한 대통령선거가 될 것 같다. 이번 대선은 특히 도대체 선거의 승자(勝者)가 언제 결정될 것인지는 물론 그보다도 두 명의 경쟁자 중 어느 한쪽이 선거 결과에 승복을 거부하면 어떤 사태가 일어날 것인지가 분명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선거일을 맞이하고 있다.


다행히, 앞으로 며칠 사이에 일어날 사태에 대해서는 역사적 선례(先例)를 통해서 예상해 보는 것이 가능할 것 같기는 하다. 미국의 헌정사에서는 대통령선거의 결과가 선거가 아니라 하원에서 결정된 선례도 있고 또 대법원에서 결정된 선례도 있다.


1800년 대선은 두 후보의 득표 수가 동일했기 때문에 하원에서 무려 36차례의 선거 끝에 대통령 당선자가 결정되었었다. 이 선거에서는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과 아아론 버(Aaron Burr)가 획득한 선거인단 표수가 73표로 동수가 되었기 때문에 헌법에 따라 하원에 당선자를 결정할 임무가 부여되었었다. 각 주가 각기 한 표씩을 행사한 하원에서의 첫 투표가 1801년 2월에 시작되었는데 이때 미합중국은 16개 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 당선자는 9주의 지지가 필요했었다. 그런데, 제퍼슨과 버 가운데 어느 누구도 1주일에 걸쳐서 실시된 35차례의 선거에서 필요한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했다. 그런데 36번 째로 실시한 선거에서 제퍼슨이 10개 주의 지지를 획득함으로써 미합중국의 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기이하게도 당시의 헌법은 대통령선거에서 차점으로 낙선한 사람이 부통령으로 선출되도록 하고 있었기 때문에 버는 제퍼슨 대통령 아래서 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방식의 모순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미국은 1804년에 제12차 개정헌법에서 선거인단의 선거인들은 2개의 별개의 투표용지를 사용하여 한 개에는 대통령을, 다른 한 개에는 부통령을 기명하는 것으로 방법을 변경시켰다.


미국에서는 선거인단에서의 선거 결과가 번복되는 일이 1824년에 발생했다. 1824년 실시된 선거인단에서의 제6대 대통령선거에서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이 가장 많은 득표를 했다. 이해의 대통령선거에는 잭슨 오로 헨리 클레이(Henry Clay)와 존 퀸씨 애담스(John Quincy Adams) 및 윌리엄 크로포드(William H. Crawford) 등 3명이 후보로 출마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많은 표를 득표한 잭슨의 득표 수는 헌법에 요구하는 과반수인 131명에 못 미쳤기 때문에 대통령 결정권이 하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하원에서 실시된 투표에서는 하원의장이었던 클레이가 자신의 지지자들의 표를 애담스에게 몰아주었기 때문에 애담스가 잭슨을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는 이변(異變)이 일어났다.


이 같은 결과에 대해 잭슨이 “클레이에 의한 선거부정 행위”라고 비난하면서 애담스 대통령에 대한 협조를 거부하여 애담스 대통령은 1828년에 재선에 성공하지 못하고 재도전한 잭슨에게 대통령 자리를 물려주었다. 1824년의 대통령선거를 마지막으로 미국 헌정사에서 대통령선거의 결정이 하원에서의 투표를 통하여 결정되는 일이 다시는 발생하기 않았다.


그런데, 미국은 1876년에 미국 역사상 가장 논란거리가 된 대통령선거를 치렀다. 이해의 제19대 대통령선거는 공화당의 러더포드 헤이스(Rutherford B. Hayes)와 민주당의 새뮤엘 틸던(Samuel J. Tilden) 후보간의 각축전이었다. 1876년은 남북전쟁이 끝난 뒤 11년이 경과한 해이고, 전후 부흥(Reconstruction)이 대대적으로 진행 중이었지만 남북간의 대립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었다. 이때 미국의 정치 판도는 공화당 지지 기반은 남북전쟁 때 미합중국(Union) 지역이었던 북부 사람들과 과거 남부에서 해방된 노예인 흑인들이었던 반면 민주당의 지지 기반은 과거 남부 지역의 백인들이었다.


역사학자들의 객관적 견해에 의하면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도 각자의 영향력하에 있는 지역에서 선거 부정이 자행되었지만 특히 남부 지역에서는 민주당에 의한 흑인 유권자들을 상대로 하는 대대적인 폭력 행위와 투표자에 대한 협박 행위가 공공연하게 자행된 것이 사실이다. 결국 민주당 소속 틸던 후보의 당선이 선포되었지만 공화당은 루이지애나(Louisiana)와 폴로리다(Florida) 및 사우스캐롤라이나(South Carolina) 등 3개 주에서의 선거 결과에 불복하여 두 벌의 서로 다른 선거인단 명부를 제출했고 오레곤(Oregon) 주에서도 두 벌의 선거인단 명부가 제출되는 혼란이 조성되었다.


1877년 1월 의회는 이 이중(二重)의 선거인단 명부 문제를 해소시키기 위하여 민주 • 공화 양당에서 각기 7명과 무소속 1명, 그리고 대법원이 참가하는 초당적 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 위원회가 결국 민주당이 공화당 소속 헤이스 대통령 당선을 수용하고 그 대신 공화당이 남부 여러 주에서 연방군을 철수하고 ‘전후 부흥 사업(Reconstruction)’의 중지를 수용하는 것을 교환하는 내용의 ‘1877년 대타협(The Compromise of 1877)’이 성립되었다.


‘TV 토론’이 최초로 등장한 1960년의 제35대 대통령선거는 미국 정치사상 전무했던 박빙(薄氷)의 접전(接戰)이었다. 현직 부통령이었던 공화당의 리차드 닉슨(Richard M. Nixon) 후보는 매사추세츠(Massachusetts) 주 출신 상원의원이었던 존 케네디(John F. Kennedy) 후보에게 전체 투표 6,800만표 가운데 11만3천표를 지는 신승(辛勝)을 거두었다. 이때 케네디가 확보한 선거인단 표수는 303표로 닉슨의 219표보다 84표가 많은 것이었는데 사실은 닉슨의 219표 가운데 캘리포니아(California) 주의 32표는 원래 케네디의 표였으나 닉슨 쪽의 집요한 공작으로 이루어진 재검표를 통하여 닉슨의 표로 넘어간 경우였다.


이 해 대선에서는 케네디 진영에서 조직적인 선거부정이 자행되었다는 논란이 크게 일었었다. 우선 케네디가 겨우 8,800표를 이긴 일리노이(Illinois) 주의 경우 ‘민주당의 기계(機械)’라고 통치되던 전설적 인물인 리차드 데일리(Richard J. Daley) 시장이 장악하고 있던 시카고(Chicago)에서, 비록 증명이 되기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대대적 선거부정이 자행되었다는 의혹이 대대적으로 거론되었다.


그리고, 케네디의 러닝메이트였던 린던 존슨(Lyondon B. Johnson)의 출신 주인 텍사스(Texas)에서도 케네디는 46,000표의 표차로 닉슨을 이겼는데 이 주는 1948년 상원의원 선거 때 개표 종료 6일 후에 정체불명의 202표가 난데없이 나타나서 존슨에게 87표 차의 승리를 안겨 준 “Box 13 스캔들”의 고장이기도 했었다.


닉슨은 1960년 대선 선거일 다음날 아침에 “당보다는 국가가 우선”이라는 명분을 앞세우면서 공식으로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었다. 그러나,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면피(面皮)했지만 그의 캠프에서는 일리노이와 텍사스 주에서 끊임없이 재검표를 포함하여 선거소송을 제기했었다. 이들 선거소송에서 닉슨은 아무런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1960년 12월 중순의 어느 날 닉슨이 그의 친구들에게 “사실은 내가 이긴 선거인데 케네디가 훔쳐 갔다”고 불평했다는 것은 그 뒤에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된 유명한 어록(語錄)이다


2000년에 공화당의 조지 부시(George W. Bush) 후보와 민주당의 앨 고어(Al Gore) 후보 사이의 제41대 대통령선거전은 미국 대통령선거 사상 가장 기억되는 선거였다. 이 선거가 유명해진 것은 투표용지의 펀치 카드 구멍과 플로리다 주에서의 537표 때문이었다.


선거일 밤의 개표 결과는 고어가 일반 투표에서 승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플로리다 주에서의 개표 결과는 너무나 박빙이었다. 일부 방송은 한 때 25표 차이로 고어가 승리했다고 보도했다가 잠시 뒤에 이 보도를 취소하고 부시의 승리를 보도했을 정도였다. 한 때 고어는 부시에게 승리를 축하하는 전화를 걸었다가 몇 시간 뒤에 승리 축하를 취소하는 전화를 걸기도 했다.


다음날이 밝자 플로리다에서 부시가 승리하기는 했지만 표차가 너무 적어서 주 법에 따라 재검표가 실시되었다. 전국의 유명 변호사들이 플로리다 주로 몰려들어서 한달 동안 계속된 선거 소송이 진행되었다. 플로리다 주의 일부 군에서는 투표자가 투표기의 자판을 너무 가볍게 누른 나머지 뚫린 구멍의 잘라져 나가야 할 종이 조각이 그대로 붙어 있는 경우가 문제가 되었다. “붙어 있는 종이 조각”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선거 관리관들은 몇일을 걸려서 손으로 투표지의 뚫린 구멍을 점검하여 투표지의 유 • 무효을 판별해야만 하게 되었다.


결국, 이 법정 다툼은 결국 대법원으로까지 올라갔고 대법원 판결에 의하여 재검표를 종결하게 되었다. 결국 플로리다에서는 부시가 전체 투표 수의 0.009%인 537표를 이겼고 그 덕으로 부시가 271표의 선거인단 표를 획득하여 선거의 승자가 되었다.


우리는 이번 대선에서 무슨 일이 발생할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법정 다툼으로 이어질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번 선거의 경우, 어쩌면, 우편투표 때문일지 아니면 당일 투표 때문일지 아직 알 수 없지만, 반드시 재검표의 문제가 제기될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지금 미국에서는 주에 따라서 우편투표지를 언제 개봉할 것인지가 다르게 되어 있고, 펜실베니아 주의 경우에는 투표용지의 개봉과 집계를 선거일 투표가 끝난 뒤에라야 할 수 있게 되어 있는가 하면 플로리다 같은 주에서는 이미 개표가 진행되고 있는 곳도 있다.


트럼프와 바이든 캠프에서는 수많은 변호사들을 동원하여 대기시켜 놓고 있으며 곳에 따라서는 우편투표의 시한 및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하여 변경이 불가피한 투표 절차 때문에 이미 법정 소송이 제기되고 있는 사태가 전개되고 있다.


만약 선거인단 표수가 동수가 될 때는 대통령 당선자의 결정은 1800년과 1824년의 경우처럼 하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주 차원에서 발생하는 선거소송은 대부분 연방 고등법원의 판결로 결말이 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장기전(長期戰)이 되어야 했던 2000년 41대 대선 때의 선거 소송전 경과와 아울러 이번에는 대선을 코앞에 두고 벌어졌던 에이미 카니 배렛(Amy Coney Barrett) 대법관 인준 파동을 고려하면 이번 대선이 소송전으로 발전할 경우 대법원에서의 심판 결과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는 짐작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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