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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2-09 19:2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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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향한 운동권과 젊은 우파, 일부 전문가 그룹이 보수의 각성과 개혁 촉구한 게 ‘뉴라이트 운동’
-기존 보수진영은 ‘2007년 정권교체가 시급하다’며 시민운동 등 저변확산보다 정치참여 우선시
-박정희의 경제성장 모델 긍정하나 유신과 5공은 비판. 5.18, 6월 항쟁 ‘민주화 운동’ 차원 평가

제2차 보수의 몰락. 최순실 사태로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된 후 1년여의 과정을 이와 같이 표현하는 이유는 13년 전 한 차례 보수의 몰락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애초 보수우파 운동가 중 일부는 연방제 통일이나 햇볕정책을 추진하는 것 자체가 ‘헌법위반’이라며 이를 근거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와같은 주장은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힘든 것이었고, 오히려 정치개혁을 부르짖는 노무현 정권과 친노진영으로 인해 한나라당과 보수진영은 ‘차떼기당’이란 말로 상징되는 구시대 부패 정치인의 프레임이 씌워졌었다.

 

그러다 노무현 대통령의 ‘민주당 찍는 것은 한나라당 도와주는 것’이란 말이 제대로 불을 질렀다. 민주당-열린우리당 분당과정에서 남은 이른바 ‘잔류 민주당’ 세력은 옳다구나 하며 선거법 위반이란 점을 지적하며 ‘대통령 탄핵’을 추진했고, 결과적으로 탄핵안은 국회를 통과하였다. 그러나 일반국민 대다수의 눈에는 부패한 구시대 정치인들이 정치개혁을 주장하는 노무현 대통령을 쫒아내는 모양새가 되어버려 거센 ‘탄핵역풍’을 불러왔고, 그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민주당 계열 정당으론 최초로 과반수의 원내 제1당이 되었으며, 한나라당은 보수계열 정당으론 처음으로 제1당 자리를 내주며 120석의 소수파 야당으로 내려앉아야만 했다.

 

잘하면 열린우리당 정권이 천년만년 갈 수도 있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보수진영은 수구, 부패, 친일, 독재의 후예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진 상태에서 일부 전향한 운동권 출신과 젊은 보수우파 운동가들 그리고 일부 전문가 그룹들이 ‘이대로는 안된다’며 보수의 각성과 개혁을 촉구하며 일어났던 게 ‘뉴라이트 운동’이었다. 특히 뉴라이트 운동을 최초로 주장했던 핵심세력인 전향한 운동권 출신들 중 상당수는 그전까지 ‘북한인권운동’을 주장해온 사람들이란 점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초창기 뉴라이트 운동을 주류사회 일각과 보수언론이 주목한 것은 탄핵 역풍으로 잔뜩이나 보수가 몰락 직전까지 간 상황에서 과거의 ‘수구꼴통’ 이미지를 극복하고 보수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 같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중심세력이 운동권에서 전향한 사람들이었거나 북한인권 운동가 출신 혹은 전문가 그룹이란 점에서도 기존 보수와는 다른 새 바람을 불러올 것이라는 기대감에 이들을 주목했었고 그런 배경에서 뉴라이트는 급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뉴라이트가 성장하면서 기존 보수진영과 두 개의 갈등이 생겼다. 하나는 뉴라이트 운동의 진행방향이었고 또 하나는 역사관 문제였다. 사실 뉴라이트 초창기 멤버들은 뉴라이트 운동이 ‘시민운동’으로 저변을 확대하고 보수의 외연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가길 바랬다. 그러나 기존 보수진영은 ‘우선 2007년 정권교체를 하는 게 시급하다’며 정치참여를 제일 먼저 주장했다.

 

또 하나는 역사관 문제였다. 뉴라이트 초창기 멤버들은 대체로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들이었다. 박정희의 경제성장은 인정하나 유신체제는 비판하며 5.18 광주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인정하고 전두환과 5공정권은 비판하는 게 뉴라이트 초창기 핵심멤버들의 역사관이었다. 뉴라이트 운동가들 상당수가 80년대 학생운동을 하던 사람들이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기존 보수진영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추종하는 사람, 박정희 대통령을 세종대왕급으로 추종하는 사람, 심지어 5공을 찬양하는 사람까지 뒤죽박죽이었다. 게다가 뉴라이트에 뒤늦게 참여한 사람들의 상당수는 ‘2007년 정권교체’를 제1목표로 삼고있는 보수우파 운동가들의 노선에 대체로 동조하고 있었고 이런저런 정치철새, 정치잉여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며 뉴라이트 운동은 서서히 꼬여갔다.

 

진보진영에서 바라보는 뉴라이트 운동은 ‘변절자’ 아니면 ‘경계의 대상’ 정도였다. 초창기 뉴라이트의 주된 타겟은 80년대 학생운동의 이념적 성향 문제, 친노 패거리주의 또는 일부 진보 지식인들의 위선 등이었다. 좌파들의 아픈 곳을 콕콕 찌르는 게 뉴라이트였기 때문에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차후 자신들의 가장 힘든 경쟁자가 될 것 같다는 우려에서 그 정도로 성장하기 전에 미리 싹을 밟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여기에 뉴라이트가 ‘식민지 근대화론’을 역사관으로 채택하는 결정적 패착을 던졌다. ‘친일-극우’ 프레임에 제대로 걸려들었던 것이다. 좌파에게 반격의 빌미를 준 것이다. 허나 일단 2007년에 정권교체는 되었고, 여기까진 ‘2007년 정권교체’를 제1목표로 삼았던 기존 보수진영의 전략이 성공하였다.

 

뉴라이트의 첫 발의자이자 초창기 멤버들은 섣부른 정치참여보다는 시민운동을 통한 ‘신 보수운동’의 저변 확대를 주장했다. 그들은 이미 시민사회나 언론, 방송, 학계, 출판계 등에 넓고 무섭게 퍼져있는 86 진보 지식인들의 힘과 그들의 사회적 여론형성 능력을 알고 있었다. 노무현 정권 초창기에 친노 지식인들이나 청와대 핵심 참모들은 막상 정권을 잡고보니 공무원 사회라던가 재계, 사법부 등 주류 권력이 전혀 움직여주지 않는다고 푸념했지만, 오히려 언론, 방송, 학계 등 문화 방면에선 진보그룹이 여론 형성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2007년에 보수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다 해도 다시 진보진영에게 패퇴할 수 있음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 우려는 이명박 정권 첫해 ‘광우병 파동’으로 현실화되었다. 막상 정권을 잡고도 친노 86 지식인 그룹의 여론형성 영향력에 제대로 발목잡히고 말았던 것이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진보진영의 뉴라이트에 대한 ‘친일-극우’ 프레임 덧씌우기가 시작되었다. 광우병 사태 때 촛불시위에 반대하거나 색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뉴라이트’ 딱지 붙이기가 시작된 것이다.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 때 젊은 청년이 이 시위에 반대하는 1인시위를 벌이자 다른 시위대가 몰려들어 “뉴라이트”라고 외치며 항의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그때부터 진보진영은 조금 젊은 사람이나 방송, 문화계 인사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않는 발언을 하거나 촛불시위 같은 흐름에 조금이라도 반대하는 모습을 보일 경우 무조건 ‘뉴라이트’ 딱지 붙이기를 시작했다. ‘뉴라이트’ 이미지 씌우기. 진보판 ‘색깔론 공세’라고나 할까. 촛불시위나 진보측 여론에 맞지 않는 발언이나 행동을 하면 ‘뉴라이트’ 딱지를 붙여 그 입지를 약화시키면서 ‘뉴라이트 운동’의 이미지까지도 부정적으로 대중들에게 인식되게 만드는 ‘1석2조’ 전략을 꾀한 셈이다.

 

그 절정은 역사논쟁의 장에서 이루어졌다. 유사역사학계와 정통사학계 사이의 논쟁에서도 엉뚱하게 ‘뉴라이트 논쟁’이 불거진 것이다. 소위 환빠라고도 불리는 유사역사학계가 정통사학계를 ‘뉴라이트’라 부르는 해괴한 현상이 벌어졌는데 근래 들어서는 거꾸로 정통사학계가 ‘유사역사학’을 ‘뉴라이트 역사관’이라 공격하는 아이러니한 상황까지 만들어지고 있다.

 

뉴라이트 초창기 참여 멤버이자 ‘뉴라이트 닷컴’ 논객 출신으로 분명하게 말하는데 지금 시점에서 ‘뉴라이트 역사관’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박근혜 정권에서 ‘국정교과서 개정’ 문제나 그 이전 교학사 역사교과서 문제 때도 이 ‘뉴라이트 역사관’ 논란(?)이 빚어졌지만 적어도 2007년 이후로 ‘뉴라이트 역사관’이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뉴라이트 자체가 망했는데 무슨 ‘뉴라이트 역사관’이란 게 존재하는가.

 

▲ 역사교과서 문제 때도 ‘뉴라이트 역사관’ 논란(?)이 빚어졌다.


뉴라이트 닷컴은 2007년에 문을 닫았고 김진홍 목사가 주도하여 한동안 세몰이를 했던 ‘뉴라이트 전국연합’도 이명박 정권 중,후반기를 거치면서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그나마 ‘뉴라이트 닷컴’의 사상,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던 ‘자유주의 연대’마저 문을 닫음으로써 뉴라이트의 명맥은 완전히 끊겨져 버렸다. 뉴라이트가 그나마 잘 나가던 때 이런저런 정치단체들이 ‘뉴라이트’란 명함을 내걸고 활동하긴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런 단체들은 애초의 뉴라이트는 물론 ‘뉴라이트 전국연합’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이비 단체들이다.

 

필자가 뉴라이트건 기존 보수단체 모임이건 일절 발길을 끊은 지가 어느덧 10년 가까이가 되어가는데, ‘식민지 근대화론’을 역사관으로 채택했던 건 이후 9,999번을 다시 생각해봐도 뉴라이트의 실책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식민지 근대화론 문제는 둘째치더라도 뉴라이트가 극우나 독재를 옹호하는 세력이란 비난을 받는 것은 초창기 뉴라이트 멤버이면서 ‘뉴라이트 닷컴’ 논객으로 활동했던 필자의 명예와도 관련있는 부분이라 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겠다.

 

원래 뉴라이트 초창기 멤버는 전향한 운동권 멤버거나 전문가 그룹(가령 변호사나 CEO 등) 그 외 젊은 보수성향의 인사들이었고, 이들의 역사관이나 노선은 대개 박정희의 경제성장 모델은 긍정적으로 평가하나 유신과 5공은 비판하는 입장이었고 4.19와 5.18, 6월 항쟁을 ‘민주화 운동’의 맥락에서 평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산업화와 민주화의 긍정적 가치를 계승해가고 부정적 유산은 청산하자는 게 뉴라이트 초창기 멤버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후 뉴라이트의 정치참여 문제가 논란이 되고 이런저런 정치권 주변 인사들이 꼬이기 시작하면서 뒤죽박죽,엉망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적어도 초창기 뉴라이트 멤버들과 이후 참가한 그룹들의 구분이라도 좀 해야할 것 같다. ‘극우’나 ‘독재옹호세력’이란식의 비난은 적어도 초창기 뉴라이트 멤버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부당한 음해이다. 다만 이후 정치참여에 생각을 갖고 몰려든 이런저런 어중이떠중이급 인사들을 두고 하는 소리라면 그건 그런대로 틀린말은 아니라고 하고 싶다.

 

지금 와서 ‘뉴라이트 역사관’ 어쩌구 하는 식의 논란이나 비난은 뉴라이트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전혀 엉뚱한 소리다. 뉴라이트는 이미 망했기 때문에 ‘뉴라이트 역사관’이란 게 적어도 2017년 현 시점에선 존재할 수가 없다. 박근혜 때 국정교과서 논란이건 그 이전 교학사 교과서 문제건 뉴라이트하곤 상관이 없다. 더욱이 정통사학계와 유사역사학계 사이에 이런저런 논란 사이에서 엉뚱하게 ‘뉴라이트’나 ‘뉴라이트 역사관’ 문제가 불거지는 것은 진짜 뉴라이트와 전혀 상관이 없는 그냥 사학계에서 지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과정에서 나오는 비난적 수사라고 보면 된다.

 

뉴라이트는 망했다. 망한 지 이미 오래고 더 이상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긍정적 가치 계승’을 기치로 내걸었던 초창기 순수했던 정신을 이어가는 단체도 인사도 이젠 거의 없다. – 굳이 있다면 지금 이 글 쓰고 있는 필자다 –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실체 자체가 없어진 지 오래인 뉴라이트를 갖고 ‘뉴라이트 역사관’이 어쩌구저쩌구 하며 뉴라이트와 아무 상관도 없던 인사, 단체들한테까지 여전히 ‘뉴라이트’ 딱지를 붙이는 좌파들의 부당한 음해와 행태를 더 이상 두고볼 수가 없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거듭 말하지만 2017년 연말 현재 대한민국 땅엔 더 이상 ‘뉴라이트 역사관’도 존재하지 않고 뉴라이트의 정신이나 명맥을 잇는다고 볼 수 있는 단체나 인사도 없다. – 다만 뉴라이트가 한참 뜰 때 정치좀 하겠답시고 여기저기 ‘뉴라이트’ 명함 팔고 다닌 어중이 떠중이급 정치잉여들은 꽤 있었다. 이제는 사라진 뉴라이트. 헌데 그 죽고 없어진 존재나 다름없는 ‘뉴라이트 유령 딱지’를 마치 색깔론 딱지 붙이듯 여기저기 덕지덕지 처바르고 다니는 좌파들의 부당한 음해만 존재할뿐이다.

‘훼드라의 세상만사’ 블로그


[덧붙이는 글]
['제3의 길' 轉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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