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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2-07 10: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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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이후 글로벌 해양국가 네덜란드를 문물의 도래지 삼아 메이지 유신의 토대 닦아
-진주만 기습직전에 선전포고 도착해야 한다고 강조… 기습공격 이후 2시간 지나서야 도착
-미국과 전쟁은 승산 없다고 판단, 기습공격 이후 강화와 협상으로 영토 인정받는 길 추구


1894년의 청일전쟁 중 풍도해전, 1904년의 러일전쟁 개시였던 여순항 공격, 1941년 진주만 기습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일본이 공식적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느닷없이’ 기습공격하는 방식으로 전쟁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앞의 두 전쟁에서 일본에 대한 비난은 별로 크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대륙국 청과 러시아의 위상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일본이 두 대륙국가를 이길 수 있는가가 주요 관심사였고, 해양세력에게 이 두 대륙국가는 극복할 장벽이었기에 그러했습니다.

 

오늘날 관점에서 이는 자본의 글로벌 확장에 관련된 설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입니다. 대륙국가 러시아와 청은 당시에 아직 상업과 무역의 대열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특히 1877년의 러시아 오스만 전쟁 이후부터 다시 본격화된 유럽 G2의 글로벌 확장에 관련되기도 합니다. 영국과 러시아입니다.

 

청일전쟁과 거문도 점령, 러일전쟁은 당대 G2 대립의 흐름 속에서 파악됩니다. 거문도 점령 전후한 시기 러시아가 대마도나 절영도를 할양받으려던 이유도 분명한데 석탄 전함을 위한 석탄 보급기지를 위해서였습니다. 왜 중유 디젤전함이 혁신인지 알 수 있습니다. 디젤 전함은 연료 보급기지가 증기 전함만큼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161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사카성을 함락시키면서 거의 50년 이어진 전국시대를 종식하고 평화를 정착시킵니다. 그리고 나서 바로 이 시기에 포르투갈을 물리치고 글로벌 해양국가로 성장한 네덜란드를 문물의 도래지로 삼습니다. 네덜란드에서 직접 문물을 수입하여 메이지 유신의 토대가 닦아집니다. 홍대용이 청나라에 가서 서양 선교사를 통해 전래된 지전설과 무한우주론을 귀동냥할 때 일본에는 유럽에서 한창 유행중인 정전기 발전기 같은 과학적 탐구의 결과이고 수단인 물품이 전래됩니다. 일본에서 노벨 물리학상이 다수 나오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며 이런 역사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메이지 유신은 그러므로 이런 양적 축적의 질적 비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본의 글로벌 확장에서 결정적인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해양세력 영국의 입장에서 일본을 아시아의 영국처럼 만들어서 대륙세력 러시아의 태평양 확장을 막는다는 전략도 작동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페리호 타고온 미국까지 여기 포함되며 이런 이유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선전포고 없는 기습이 어느정도 용인된 채 이루어졌습니다.

 

▲ 야마모토는 진주만 기습직전에 선전포고가 도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청일전쟁시기 대위였고 러일전쟁에도 참전했으며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이 된 야마모토는 잘 알았던 것입니다. 미국과의 전쟁은 전혀 승산이 없고 다만, 기습공격을 통해서 강화와 협상으로 점령한 영토를 인정받는 것 밖에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한반도가 그냥 일본 영토로 굳어져 버린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처음부터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전략은 강화 협상을 통해 점령한 영토를 인정받는 것이었습니다.

 

허나 영국과 미국은 일본을 키운 나라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전략은 통할 수 없었습니다. 야마모토는 진주만 기습직전에 선전포고가 도착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기습공격 이후 약 2시간이 지난 미국 시간 오후 2시나 되어서야 선전포고가 도착합니다. 유명한 당시 국무장관 헐의 대사가 나옵니다. “돌아가시오. 공직생활 30년간 이토록 비겁하고 비열한 행위를 나는 들어본 적이 없소.”

 

아래 인용 영상은 일본 영화 <연합 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일부입니다. 과거 영화 <도라 도라 도라>를 리뷰하듯 영상을 제작했습니다. 야마모토가 당시 입장을 대변합니다. 아가키의 나구모는 ‘후회’의 상징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히류’의 야마구찌 사령관이 현재 일본인들의 ‘리뷰’ 결산 같습니다. <도라 도라 도라>와 다른 점은 야마구찌를 등장시켜 ‘리뷰’한다는 데 있는 듯 합니다. 이미 진주만에서 야마구찌는 후치다, 겐다와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2차 공격대를 보내 유류 저장고를 폭격하자고 나구모 사령관을 재촉합니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말합니다. “나구모는 2차 공격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연원을 영상에서 제공합니다. 나구모는 야마모토가 아니라 해군성에서 “단 한 척의 전함도 손실되면 안된다”라는 명령을 받기 때문입니다. 나구모는 ‘소극적으로’ 작전에 임한 것이 아니라 해군성의 명령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미드웨이 해전의 ‘운명의 5분간’에 야마구찌는 그냥 지상 공격용 폭탄을 단 그대로 전투기를 출격시키자고 주장했습니다. ‘시간을 구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구모는 망설인 끝에 어뢰로 바꾸고 출격한다고 결정합니다. 그렇게 폭탄을 어뢰로 교체하는 틈에 미국의 급강하 폭격기대가 무방비 상태의 일본함대 상공에 동시에 도착했던 것입니다. 허나 히류는 요행히 발견되지 않아 살아 남습니다. 히류만 남았지만 이날 오후 야마구찌는 요크타운 폭격에 성공합니다. 그런데 요크타운의 보수반 병사들이 나무갑판 구멍을 너무도 훌륭하게 보수하는 바람에 일본의 재출격한 공격대는 요크타운을 다른 항모로 착각하고 또 폭격합니다. 2척을 침몰시켰다고 오인하게 됩니다. 결국 멀쩡한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의 폭격기대는 히류까지 침몰시키고 1942년 6월 4일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해군은 일본군 항공모함 4척을 침몰시킵니다.

 

일본 해군은 초기 홍콩 함락, 싱가포르 점령, 뉴기니 상륙, 프린스 웨일즈호 침몰에서 보듯 영국군과 네덜란드군을 손쉽게 물리쳤습니다. 필리핀에서 맥아더 지휘의 미군과 필리핀군도 일본군을 당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구모의 실수가 이후 반복 나타납니다. 산호해 해전에서 포트 모리스비 공략 함대를 너무도 쉽게 돌려버린 일, 과달카날에 육군을 축차적으로 투입하여 축차적으로 소멸되게 한 것 등이 그러합니다.

 

포트모레스비 점령을 오웬 스탠리 산맥을 넘는 작전으로 바꾸고 거의 포트모레스비의 50킬로미터 코앞까지 왔었지만 후퇴했습니다. 결정적으로는 레이테만 상륙작전에서 코딱지만한 미해군 구축함과 호위항모대의 분전으로 야마토를 포함한 거대 전함들이 후퇴하는 실수도 저질렀습니다. 태평양 전쟁에서 만세돌격이라는 자멸적 전투를 반복하고 결정적 순간에 전력을 보존해야 한다면서 후퇴하는 소극성의 공존은 아마도 현대 일본이 자신의 역사를 리뷰할 때 거듭 되씹어보는 지점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래 영상은 미드웨이에서 히류호와 운명을 함께한 야마구찌를 리뷰의 중심에 두는 것 같습니다.

 

Pearl Harbor: The Day of Infamy, and Af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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