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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2-10 12:3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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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는 나에게 난공불락의 인물이었다.

 

그리고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개인의 性의 비밀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도 않고, 성적인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프로이트 심리학에 대한 어떤 거부감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내가 얼마나 프로이트 심리학에 대해 무지했던지, 아주 오래 전 일이지만,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꿈 해몽에 관한 책으로 오해했던 적도 있었다.

 

프로이트를 이해하려면 19세기 말 의학이 처한 환경을 돌아보면 가장 쉽게 접근이 가능하다. 프로이트가 얼마나 시대를 뒤집은 전복자이며 선각자인지 말이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쓴 논문이 1896년에 발표되었다. ‘정신분석’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처음으로 생겨났던 것이다.

 

19세기 의학은 세균학, 혈청학, 그리고 수술…. 정신이상자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신고하여 정신분열증 환자들이 모인 수용소에 보내는 것, 이게 당시 의술의 전부였다. 그런데 ‘정신분석’이라니? 정신에 의한 치유? 프로이트는 사기꾼에 허풍쟁이, 동료 의사들의 비웃음, 무시… 젊은 의사이자 빈 대학의 강사였던 프로이트의 고난의 시작이었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여러 인물에 대한 평전 중 <프로이트 평전>은 유일하게 동시대를 함께 살았던 인물에 대한 전기문이다. 프로이트와 츠바이크의 나이를 초월한 우정은 츠바이크의 프로이트에 대한 존경과 사랑, 헌사가 담겨있다. 인간 프로이트의 삶, 그의 학문적 이론과 행로가 객관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프로이트 심리학이 어렵고 다가가기 힘들다면, 츠바이크의 <프로이트 평전>은 훨씬 이해가 쉽고 빠르리라 생각된다.

 

누구나 집에 프로이트 저서 한 권 쯤은 있으리라. 하지만 몇 페이지 읽다 포기하기 십상이다.

나 역시도 그랬으니까. 거장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책을 읽는 순서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거꾸로 접근 가능한 방법이 바로 ‘평전’을 읽는 것도 훨씬 이해가 용이하다.

 

그 인물이 처한 그 시대의 환경과 시대적 흐름을 함께 조망할 수 있다는데 평전의 가치가 빛을 발한다. 프로이트는 빈의 임대주택에서 47년을 살았고, 빈 대학의 정교수가 되지 못한 채 평생을 시간 강사로 보내면서도 학문에 몰두하며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다. 65세에 이르러 학문적 업적을 인정받았을 뿐이었다.

 

프로이트 심리학을 함께 연구하던 모임에서 프로이트 제자들은 분열되었다. 프로이트의 성욕 강조 경향에 회의를 품은 융, 아들러, 슈테겔은 프로이트와 절연하였다. 그 전에 프로이트 제자들은 각자 출신지를 바탕으로 쮜리히 학파, 베를린 학파, 빈 학파로 분열되어 있었지만-프로이트 후계자였던 칼 융은 프로이트와 결별 후 나치정권이 들어서자 나치가 만든 어용학회 <국제정신요법학회> 회장을 맡는다. 프로이트의 서적은 모두 불태워지고 있었던 시점이었다.

 

19세기는 겉으로는 도덕과 교양을 내세웠지만, 뒤로는 온갖 추악한 위선적인 일들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었던 시대였다.

 

츠바이크는 말한다. “19세기를 윤리적으로 지배한 것은 칸트가 아니라 위선이다”

 

더구나 性문제는 덮어 두고 말하지 않아야 정상인 시대였다. 교양을 말해야지, 性은 억압해야 하는 문제였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처음으로 히스테리를 언급하며 히스테리 증상의 본질에 性과 관련이 있음을, 또 <남성 히스테리> 보고서를 발표하자 학계에서는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다. 이어서 <성욕도착증>, <여성의 성욕> 등 인간의 가장 비밀스럽고 신비하고 위험한 욕구인 개인의 심리에 천착했다.

 

츠바이크의 <프로이트 평전>의 한 대목을 보자.

 

“프로이트는 그 세기가 얼버무리고 싶어 한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억압과 무의식에 대한 자기 인식과 자기 고백의 문제를 시대의 한복판에 던져놓았다. 그리하여 그들의 억압된 근본적 갈등을 위선에서 학문으로 변모시킴으로써 수많은 개인들뿐만 아니라 도덕병에 걸린 그 시대 전체를 치료하는 일에 착수했다.

 

프로이트가 새로이 제시한 이 방법은 인간의 개인 심리에 대한 견해를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우리 문화의모든 근본적 의문과 우리의 계보를 다른 방향으로 틀어놓았다…. 반기독교주의자 니체 직후 프로이트가 등장하자, 그들은 두 번째의 거물급 파괴자가 출현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구시대의 판도를 부숴버리는 막강한 자, 몽상을 용납하지 않는 자, 냉혹한 뢴트겐의 눈길로 모든 겉모습을 꿰뚫어보는 자, 리비도 뒤에 숨어 있는 성을, 해맑은 아이 뒤에 숨어 있는 원초적 인간을, 허물없는 친족 관계에서 태곳적부터 시작된 부자간의 위태로운 긴장을, 아무런 악의 없는 꿈에서 뜨거운 피의 용솟음을 폭로하는 자가 왔다는 것을!.”​

 

그렇다. 프로이트 이전에 누가 인간이 가진 ‘무의식’을 정신분석이라는 학문의 틀에 넣었던가. 프로이트 이전 심리학, 철학은 이성으로 충동을 억압하라고 요구했지만, 프로이트는 단호하게 “충동은 결코 억압되지 않는다”를 역설했다.

 

츠바이크는 프로이트가 겪었던 학문적, 인간적 수난에 대해 몹시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말한다.

 

“프로이트가 자신의 이론을 ‘성욕’ 대신 ‘에로틱’으로, ‘리비도’ 대신 ‘에로스’로 신중하게 포장할 줄만 알았어도…”

 

내가 읽었던 책은 <프로이트 평전>과 함께 츠바이크와 프로이트가 31년 동안 주고받았던 서신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두 거장의 내밀하고도 격조 있는 편지를 읽는 재미는 매우 컸다. 이 서신에는 츠바이크 작품의 산물인 전기문학의 인물들, 발자크, 디킨스, 니체에 대해 서로 대화를 나눈다. 특히 프로이트는 츠바이크의 <도스토예프스키 전기>를 두고 긴 편지를 썼는데, 도스토예프스키의 간질에 대해 조언을 한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간질에 대해 “거장의 간질환자들은 틀림없는 히스테리 환자”라고 진단하기도 한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츠바이크의 <프로이트 평전> 중 한 대목을 보자.

 

“프로이트는 이전 심리학의 추상적, 학술적, 이론적 폐쇄성에서 벗어나 현실의 삶으로 들어왔다. 이전 심리학은 참을 수도 없고, 읽을 수도 없는 상투어로 책을 만들어 내는 일개 학과, 일개 이론적 전공이었다. 프로이트 덕분에 개인의 중요성, 인간 영혼의 가치를 새롭게 생생하게 깨닫게 했다.”

 

프로이트는 평생동안 단호하게 자신의 이론을 설파했지만, 자신의 말대로 “100%의 진리는 없다”며 겸허했다. 프로이트는“정신분석이 세계관을 형성하거나 조작하는 일에 반대한다”라고 분명히 말하였다.

 

프로이트는 나치 정권이 극에 달한 1938년에 영국으로 망명했다. 70살이 넘어 발병한 구강암으로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였다. 1939년 더 이상 치료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자 모르핀을 투여한 안락사를 선택하였다.

 

임종하기 전 최후로 읽은 책이 발자크의 단편 소설이었다고 한다.

 

프로이트가 살았던 시기는 성의 억압 시대였다. 지금 이 시대는 성의 과잉 시대다. 성도착자 만연, 성 문란, 억제하지 못하는 성 충동과 성 중독 , 성 산업 등이 사회문제를 야기하는 시대다.

 

극과 극은 언제나 극단에서 만나 듯 프로이트가 살았던 시대에 프로이트의 성의 개념은 다시금 프로이트를 불러내고 있지 않을까? 내가 프로이트를 다시 읽어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프로이트가 젊은 의사 시절 프랑스의 어떤 의사와 나누었던 대화

 

“하지만 언제나 성적인 문제에요. 언제나!”

 

성의 과잉 시대, 여전히 이 말이 맞지 않을까? 다시 프로이트를 읽자!



[덧붙이는 글]
['제3의 길' 轉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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