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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5-10 08:46:21
  • 수정 2020-05-10 17: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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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4.15 총선거의 와중(渦中)에 나라지킴이 고교연합의 카톡방에서 ‘보수’와 ‘진보’의 차이가 무엇인가에 관한 의문을 제기하는 글을 읽었습니다. 이에 관하여 당시 명지대학 객원교수로 있던 필자가 홍익대학교 대학원신문의 요청으로 이 신문 2000년11월10일자(제13호)에 기고하여 수록되었던 “한국적 보수주의 예찬론”이라는 제목의 글이 카톡방에 의문을 제기하는 글을 올린 분에게 참고가 될 것 같이 생각되어서 여기에 수록합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참고가 되기를 바랍니다.


▲ 한글날인 지난해 10월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세종대로 일대에서 보수성향 시민들이 집회를 열고 조국 법무부장관의 사퇴 촉구 및 정권을 규탄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우리 사회에서 '보수주의'는 지금 매우 억울한 처지에 있다. 그 이유는 많은 경우 이 용어가 '오해'와 '곡해'의 대상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말의 '보수주의'라는 정치사상 용어는 영어의 'Conservatism'을 번역한 것으로 그 어원은 우리말의 '보존', '유지'를 의미하는 'Conservation'이다. 이 어원은 곧 '보수주의'라는 가치가 동양적이 아니라 서양적인 것임을 말해 주기도 하지만 바로 이 어원으로 인하여 '보수주의'의 개념을 둘러싼 혼선이 조장되는 경향이 있다. 즉, '보수주의'란 무조건적인 현상고수(現狀固守)와 동의어로 '곡해'되고 그러한 시각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보수'가 '수구' (Die-hard) 및 '반동'(Reactionary)과 혼동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오해'의 심각성을 보여 준다. '보수주의'의 의미와 개념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가 필요한 소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보수주의'의 교과서적 개념을 정리해 준 사람은 영국의 작가이자 정치인이었던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1797)다. 그는 “새로운 변화의 요소들을 완만하고 신중하게 이미 검증된 기존 제도에 접목시킴으로써 변화의 효과가 극단으로 흐르지 않도록 조절하는 데 성공할 때 그 사회는 정치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고 갈파했었다. 이 같은 정의는 '보수주의'의 무한한 가능성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보수주의'를 '수구'나 '반동'과 동의어로 밀어붙이는 우리 사회 일각의 흐름은 천부당만부당하다. 왜냐 하면, 버크가 정의한 '보수주의'는 '새로운 변화의 수용'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의 요소들을 '완만하고 신중하게' 이미 검증된 기존 제도에 접목'시킴으로써 '변화의 효과가 극단에 치우치는 것을 경계'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보수주의'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보수주의'가 독자적인 실체를 갖는 독립된 정치사상 체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지적할 필요가 있다. '보수주의'는 그 자체로써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보수주의'는 '자유주의'(Liberalism)와 함께 '공산주의'(Communism)와 '파씨즘'(Fascism)을 양극으로 하는 좌(Leftist)와 우(Rightist)의 사상대립 구조 안에서 그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이데올로기들이 혼재하고 공존하며 타협하고 수렴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존재에 불과하다. 이것은 하나의 '그릇'이지 '내용물'이 아닌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역할 때문에 '보수주의'라는 큰 '공간' 속에는 칸막이로 구분된 수많은 '소공간'들이 있다. 예컨대, '기독교(Christian) 보수주의,' '고전적(classical) 보수주의,' '개인주의적(individualist) 보수주의,' '자유방임적(laissez-faire) 보수주의,' '현대적(modern) 보수주의,' '신(neo) 보수주의,' '신 우익(New Right),' '사회적(social) 보수주의,' '사회적 진화론(Social Darwinism)' 등이 그 것들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지금 '진보'(Progressivism)를 '사칭'하는 '좌익' 세력들이 '보수’를 '우익'과 동의어로 왜곡하여 공격하는 작태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부당한 공격이다. 왜냐 하면, 이미 버크가 원론적으로 설파했듯이 '보수'는 '진보,' 즉 '변화'를 거부하지 않고 있고 따라서 '보수'는 '진보'의 적대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보수'의 '적'은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영역에서 과격한 변혁을 추구”하는 '급진주의'(Radicalism)이며, '급진주의'는 좌·우익에 다 같이 존재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이 같은 '급진주의'의 '적'인 '보수'가 '진보'의 '적'으로 좌익의 공격을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사실을 말한다면, 모든 '좌익' 세력은 '폭력혁명론'의 신봉자이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급진주의자'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진보'를 빙자하여 '보수'를 공격하는 것은 하나의 '변장'과 '위장'에 의한 '사기행각'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한국적 보수주의'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많은 국민들이 지금 '한국적 보수주의'의 표류와 실종을 걱정하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국민 대다수가 '보수' 성향의 의식세계를 견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에너지를 조직하고 집결시킬 수 있는 주도세력이 없는 것이다. 그 동안 반세기에 걸쳐 빈곤과 분단, 그리고 북으로부터의 끊임없는 안보위협이라는 삼중고(三重苦)의 악조건 속에서 '보수' 성향의 국민 대중을 이끌고 이 나라 개발시대를 주도했던 기성세대는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무리수를 둔 결과로 집단적으로 '도덕적 해이'의 깊은 늪 속에 함몰되어 도덕적 정당성을 상실한 채 설득력 있는 자기 옹호 논리를 제시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 시점에서 '한국적 보수주의'의 선택은 자명해 보인다. 그것은 버크의 원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한국적 보수주의'는 우리가 그동안 대한민국에서 이룩해 놓은 것을 소중하게 지킴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면서 여기에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합수(合水)시켜 극단을 회피하는 가운데 온건한 변화가 진행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거를 부정·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계승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과거의 잘못은 과감하고 단호하게 인정하고 반성하며 시정하는 것이 긴요하다. 이 과정에서 또한 중요한 일은 선무당의 꾐에 현혹되어 개혁과 변화를 명분으로 하여,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분간함이 없이, 모든 과거를 도매금으로 부정·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적 보수주의'가 역할해야 할 영역은 통일분야이다. 지난 반세기의 분단사는 체제와 이념의 선택에 있어서 남과 북의 상이한 선택 가운데 어느 쪽의 선택이 옳은 선택이었는가에 대한 해답을 이미 제공해 주었다. 따라서 통일의 방향도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거기에 이르는 방법론으로 '보수주의'적 접근이 옳으냐, 아니면 '급진주의'적 접근이 옳으냐의 문제이다. 이에 대한 해답도 자명한 것 같다. 따라서, 앞으로의 국민적 과제는 '보수주의자'들에게 적반하장격의 공격을 가하는 '급진주의자'들의 '궤변'에 더 이상 현혹됨이 없이 ‘보수’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을 되찾아서 보다 많은 국민들 사이에 이에 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공유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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