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18-02-09 08:24:59
기사수정
-무소불위 나폴레옹조차 첫부인 조세핀 버리고 합스부르크 왕가 마리 루이즈를 황후로 맞아야 했는데
-독일 출신 황후, 프랑스어 서툴러 사교계에서 소외… 연회의 주인공으로 정보와 친구 얻는 일도 못해
-‘극비’ 황태자의 혈우병… 민간요법과 신통력에 의존하는 신비주의에 빠진 황후가 라스푸틴 불러들여


26세의 니콜라이 2세와 22세의 알렉산드라 피오도로프나는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결혼으로 골인하였다(1894년).

 

조금 주제에서 벗어나지만 니콜라이 2세의 부친과 모친의 결혼도 화제가 되었던 결혼이므로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시베리아 철도 건설의 아버지로 알려진 부친 알렉산드 3세는 그의 둘째 형 니콜라이가 22세의 젊은 나이로 죽음에 임박하게 되자 그의 임종을 지키며 형의 약혼자인 덴마크 왕국의 공주 다그마르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형 니콜라이가 편안하게 최후를 맞게 해 주었던 것이다. 알렉산드 3세는 이 약속을 지켰고 그렇게 해서 형의 약혼녀와 결혼하였다.

 

결혼 후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여 새로운 이름을 얻은 덴마크 공주가 바로 니콜라이 2세의 모친인 마리야 표도로브나(Fjodorowna )다.

 

이와 같이 러시아 황실에는 결혼에 대한 ‘낭만적 전통’이 이어지고 있었다. 알렉산드 3세는 러시아 땅이지만 냉전 종식 후 우크라이나 영토가 되었던, 근년에 푸틴이 러시아로 강제 병합한 크림 반도 휴양지에서 신장병으로 사망했다.

 

그 뒤를 이어 첫째 아들 니콜라이 2세가 25세에 제정러시아의 권좌를 물러받았다. 대관식이 거행되었던 날 일반 국민들에게 공짜로 빵과 음료가 제공되었는데, 먼저 갖겠다고 서로 밀고당기고 하던 군중들이 서로 얽혀서 깔리는 가운데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고가 있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니콜라이 2세의 결혼식은 황제의 결혼식으로는 역사에 남을 만큼 검소하게 상트페트르부르크에서 치뤄졌다. 황제가 사랑의 결혼을 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창녀를 황후로 만들 수 있을 만큼 천하의 권력을 다 갖고 대륙 전체를 정복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황제조차도 첫 부인 조세핀을 버렸다. 나폴레옹조차 유럽 정통 왕가의 정통성을 빌려오기 위해 합스부르크 왕가의 공주 마리 루이즈를 새 황후로 맞아들였던 것이다.

니콜라이 2세의 부인 알렉산드라는 독일 헤센-다름슈타트 대공의 딸이고 독일 출생이란 이유로 그녀의 앞날에 어둠이 깔리는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특히 러시아 상류사회는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했는데 독일 출신 황후는 프랑스어를 잘 구사하지 못해 사교계에서부터 소외되었다. 저녁마다 상트페트르부르크에서 열리는 연회에 주인공으로 나타나 자신을 드러내고 정보도 얻고 친구들을 얻고 해야 하는데, 그녀의 성품은 남편 니콜라이 2세만 쳐다보고 그의 사랑 하나만 있으면 행복하다는 식이었다.

 

▲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


새로운 젊은 황후에 대한 러시아 상류 사회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도 없었고 우호관계를 만들고 유지할 수도 없었다. 어느 나라를 불문하고 오만과 편견 그리고 정략적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곳이 귀족사회다. 새 황후는 사교적으로 처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우호세력을 구축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잠재적 적대 세력들의 싹이 황실과 귀족 사회에서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세계 제1차 대전(1914~1917)에서 독일과 러시아가 교전국이 되자 황후의 입지는 결정적으로 더욱 좁아졌다. 그녀의 오빠가 독일 헤센 대공이며 러시아의 주적국인 독일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와는 4촌 혈족 관계에 있었으므로 알렉산드라 황후를 중심으로 독일 황실이 러시아에 대한 어떤 음모에 가담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도 유언비어와 함께 퍼져나가고 있었다.

 

황후에 대해 모든 것이 불리하게 작용하였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 전의 상황은 러시아 황실 반대 세력의 잠재적 힘을 키워주는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적대적 분위기에서 그녀는 그녀의 편이 될 수 있는 황실 가족들과도 가깝게 지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사람들과의 접촉과 행사 참여 등 모든 대외관계를 최소화했다(이 점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매우 닮았다).

 

거기에다 그녀는 4명의 공주만 생산했을 뿐 제국을 이어갈 후계자가 될 황태자를 1904년까지 낳지 못했다. 확실한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황실과 눈치 빠른 음모 술수꾼들이 독일 출신 황후에게 아직 줄을 설 수 없었다. 황후는 남편인 니콜라이 2세를 사랑하며 따랐을 뿐이다.

 

1904년 황태자 알렉세이가 드디어 태어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대망의 황태자가 혈우병을 갖고 내어났다. 당시에 이병은 매우 위험한 유전병으로 서로 혈족 관계에 있는 유럽의 왕가에서 나타난 병이었다.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룩했던, 알렉산드라 황후의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의 네 명의 아들 중 1명은 혈우병으로 생명을 잃었고, 딸들은 영국, 스페인, 독일, 러시아 왕가로 시집가서 후손들에게 혈우병을 퍼트렸던 것이다. 러시아의 황후 알렉산드라의 아들인 왕세자가 유전병인 혈우병을 갖고 태어났던 것이다.

 

혈액 응고 인자 제제가 개발된 현재에는 혈우병은 수명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치명적이었다. 독일제국의 왕가에서도 이 병이 나타났다. 알렉산드라의 삼촌과 남자 형제도 이 병으로 생명을 잃었다. 알렉세이 왕세자가 이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은 극비에 붙여졌다. 알렉세이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러시아의 고명한 의사들은 모두 초대돼 치료를 시도했으나 당시에는 특별한 치료법이 없었다.

 

황후는 황태자를 구하기 위해 마지막 수단으로 민간요법과 신통력에 의존하는 신비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황태자는 한 궁정 출입 귀부인(Anna Wyrubowa)을 통해 기도로 많은 불치병을 치료한다는 승려 그리고리 라스푸틴(Grigori Rasputin)을 소개받았다.

 

황태자 알렉세이의 혈우병은 국가기밀 중 특급 극비 사항이었으므로 농촌 하층계급 출신 승려 라스푸틴이 궁중에 들어오는 첫날부터 황실 친족과 황실 관료 그리고 일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사교계는 무슨 일 때문에 라스푸틴이란 승려가 궁정에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던 탓으로 이상한 방향으로 해석하기도 했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제3의 길' 轉載]
관련기사
TAG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hytimes.kr/news/view.php?idx=538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정기구독
최신 기사더보기
교육더보기
    게시물이 없습니다.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