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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2-01 09:4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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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펠러, 가솔린 디젤 정유를 연구, 대량 생산하므로써 가솔린 연료의 공급 문제 해결한 게임체인저
-리튬 배터리, 기존 배터리의 3배 이상 에너지 밀도 저장 가능. 휴대용 전자제품군들이 쏟아져 나와
-GM의 EV1은 100km 내외 주행거리, 100km 내외 최고시속의 2인용 자동차로, 3만 달러 중반대

인류가 수천년 동안 먼거리를 이동하기 위한 유일한 교통 수단은 말이었는데요. 말(馬)은 요즘은 도박쟁이들이 재테크 수단이자 골프대중화로 인한 부자 형아들의 취미수단이기도 하죠. 하지만 19세기가 오기 전까지 대중적으로 성공한 유일한 개인 교통수단이었죠.


하지만 19세기 말이되자, 도시화로 거리가 말똥판이 되고 이제 여자들도 말 타고(?) 싶다는 페미 아니 여권신장운동 영향으로 교통수단에도 일대 혁명의 기운이 불어오는데요. 바로 새로운 교통수단 자동차의 등장입니다.

지금은 전기차 특이점이 온다 !!!!를 외치고 있는 시점이지만, 당시는 세 개의 유력 특이점(?) 후보들이 경합을 벌이고 있었는데요. 산업혁명의 엔진으로 유명한 증기기관을 장착한 증기자동차(주의 : 전기자동차의 사투리가 아니닷ㅋㅋ), 요즘 인기있는 청정에너지(?) 전기자동차,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재의 대세 교통수단 가솔린/디젤 자동차였죠.


증기자동차는 역사가 오래된 만큼 기계적 안정성이 검증되어 있어서 단번에 자동차 1차 혁명(?)의 첨병으로 떠올랐는데요. 하지만 말을 대체하기에는 문제가 많았죠. 일단 비가 오면 불이 꺼져서 레커차 아니 레커 마차를 불러야 했고, 트렁크에 나무나 석탄을 싣고 다니면서 연료를 주입해야 했고, 무엇보다 연기 때문에 한번 몰고 나가면 무료로 흰머리를 검게 염색이 가능한 장점(?)이 있었죠.



반면 전기차는 청정에너지(?)라 연기, 매연이 없고 기어도 없어서 딱 여성취향(?)이라 대도시 귀족 부인들의 사랑을 받았죠. 19세기에 뉴욕의 자동차는 50%가 전기차였을 정도로 대도시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고, 각거리에 전기차 배터리 교환시설 즉 전기차 주유소가 있을 정도로 성업중이었죠. 하지만 당시의 배터리 기술로는 수십킬로 밖에 갈수 없고 힘이 약해 요즘 애들의 워너비 성탄 선물인 전기 씽씽이 수준에 알맞는 한계가 있었죠(실제 이시대 전기차 상당수가 전기 씽씽이 ㅋㅋㅋ)


마지막 후보는 오늘날의 대세 가솔린 자동차입니다.


가솔린 자동차는 독일의 니콜라우스 오토가 1864년에 가솔린 내연기관을 발명하고 이를 삼각별사의 창업주 칼 벤츠가 자동차 엔진을 넣어서 탄생하게 됐는데요. 증기차, 전기차에 비해 수십년이나 늦게 발명되어 들어온 늦둥이였죠. 증기차에 비해 매연이 적고, 전기차에 비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죠.


사실 단점도 있었는데요. 당시는 가솔린 인프라가 전무해서 당근만 주면 가는 말보다 연료 인프라가 부족했고, 가장 막둥이 기술이라 기계적 안정성도 부족했고, 시동도 레버를 돌려서 거는 방식이라 레버를 돌리다 보면 갈비뼈가 동시에 탈곡되는 갈비뼈 탈곡기로도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가솔린이 세계의 대세가 된 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는데요. 1차대전으로 가솔린/디젤 기관에 사용과 개량이 급격하게 이루지고, 결정적으로 혁신적 기업가가 탄생했기 때문이죠. 전에도 등장한 록펠러는 미국 최고 부자인데요. 뭐 많은 분들이 석유 정유를 독점해서 부자가 된 걸로 알지만 단순히 그 때문만은 아니죠.

당시 석유는 지금의 양초나 고래기름 대체재로 난방류나 조명류로 사용되는 등유만 주로 쓰이고 나머지는 버리는 상품이었죠. 하지만 록펠러는 가솔린/디젤 혁명을 캐치하고 가솔린 디젤 정유를 연구, 이를 대량 생산하므로써 가솔린 연료의 공급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결국 요즘 말하는 전환기의 게임체인저를 먼저 개척해서 세계최고의 부자가 된거죠.


그리고 20세기 가장 혁명적 남자 원조 혁명아(?) 헨리 포드의 T모델의 등장인데요. 당시 가솔린 자동차는 요즘 말 타는 부자형아들 마냥 부자들의 경주놀이 대상이었는데요. 소수의 자동차회사들이 특허를 독점하고 소량생산하는 사치품이었죠.


포드는 대량 컨베이어 시스템을 도입, 자동차를 대중화시키죠. 포드가 등장한 시점부터, 드디어 가솔린 자동차의 특이점이 오고, 전기차 증기차는 완전 쩌리행이 됐을 뿐아니라, 말은 전부 경주마가 되면서, 오늘날의 자동차의 시대가 옵니다.


가솔린/디젤 자동차 100년 왕국이 된 어느날 다른 분야 화학에서 혁명적 발명이 이어지는데요. 바로 리튬 배터리의 발명이죠.


리튬 배터리가 나오기 전에는 휴대용 전자기기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는데요. 휴대용(?) 노트북에는 자동차에 쓰는 납 축전지를 달고 다녀서 들고다니는 블록체인(?)급 무게였죠. 오래동안 찍을 수 있는 휴대용 캠코더도 생각할 수 없었고, 휴대폰이란 것도 뭔 벽돌모양으로 생겨서 그것도 자동차에서만 쓸 수 있는 벽돌 수준이었습니다.


1991년 일본 소니는 최초의 리튬 배터리를 출시하면서 매우 가벼우면서 기존 배터리의 3배 이상의 에너지 밀도를 저장 가능해지고 드디어 휴대용 전자제품 군들이 쏟아지면서, 소위 전자제품의 소형화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비슷한 시기 하늘나라로 간 이라크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침공 걸프전쟁을 일으키고, 천조국은 하늘에 스틸레인을 쏟아부으며 이라크군을 궤멸시켰으나 쿠웨이트 유전에 불지르고 달아나면서, 국제 유가는 70년대 오일쇼크 이후 최대의 상승폭을 맞는데요. 90년대 오일가격 상승과 그 시점부터 대중화되기 시작한 지구온난화 이슈 등으로 자동차회사들은 차세대 자동차 개발에 나서게 되는데요.


90년대 리튬배터리 혁명에 자극받은 GM은 전기 자동차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90년대 중반 야심찬 자동차 EV1을 출시하는데 EV1은 납 축전지를 쌓아만든 최초의 상업용 전기차로(나중에 니켈 수소전지로 전환), 당시기 준으로는 100km 내외의 주행거리, 100km 내외의 최고시속을 낼 수 있는 2인용 자동차로, 장기리스로 3만 달러 중반대로 판매를 했죠. 뭐 지금 3만 달러 중반이면 몽구스모터스 차량 평균 구매단가라고 생각하겠지만, 90년대 중반 기준으로는 매우 비싼 가격이었고, 우락부락한 천조국 형님들은 죽어도 8기통 아니면 유모차(?)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서 크게 사랑받지는 못했죠.


GM 입장에서도 3만 달러 중반의 가격대는 적자제조기 가격이라 팔면 팔수록 손해보는 입장이었습니다. 일각에서는 GM이 당시 민주당 클린턴 행정부와 읍읍(?)해 보조금 어떻게 빼먹을려고 만든 개수작(오해하지 마라 개는 매우라는 뜻의 접두어고 수작은 秀작 ㅋㅋㅋ)이라고도 했죠.


뭐 진짜 읍읍설(?)이 맞는지 아닌지 몰라도, 2000년대 부시행정부가 들어오면서 EV1은 단체 쓰레기행 고철행으로 떨어져 버리는데요. 부시는 클린턴행정부 특히 부통령 고어를 누르고 당선된 인물이죠. 부시는 요즘 트형마냥 지구온난화 그거 다 무식한 놈들이 퍼트린 개소리라며 뭔 교토의정서 비준을 거부하기도 했죠.


또한 악의 축(?)을 혼내주기 위해 911사태 이후 아프칸, 이라크전쟁을 벌이게 되는데요. 중동과 친한 부시 부자의 2차 중동전 콤보로 국제 유가가 다시 오르자, 부시와 친구 딕 체니는 국가에너지위원회에서 새로운 국가 에너지 정책을 발표하는데요. 바로 수소차 지원 정책입니다.



[덧붙이는 글]
['제3의 길' 轉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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