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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10-12 21: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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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 그러나 역사의 평가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사진=Why Times DB]


얼마 전 우리는 피우진이라고 하는 기괴한 이름의 붉으죽죽한 여자가 보훈처장 벼슬을 해 가지고 갖가지 행악(行惡)을 저지르는 가운데 전방 DMZ 인근에서 북한군의 ‘목함지뢰’로 두 다리를 잃는 중상(重傷)을 입은 하재헌 중사(中士)를 ‘공상(公傷)’으로 처리하는 터무니없는 일이 발생하여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항의한 끝에 보훈처장이 박삼득(朴三得) 예비역 육군중장으로 바뀌는 소동이 벌어지면서 하 중사의 부상이 ‘전상(戰傷)’으로 바뀌는 소동을 겪은 바 있다.


그런데, 박 예비역 중장을 처장으로 맞이한 보훈처가 이번에는 최근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최근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의 영웅 김좌진(金佐鎭) 장군과 상해 임시정부에서 분파적인 공산당 활동으로 많은 물의(物議)를 일으켰던 이동휘(李東輝)를 놓고 비교 검토한 끝에 김좌진을 제키고 이동휘를 2019년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는 터무니없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이래서야 보훈처는 예비역 육군중장 출신 처장도 바지저고리로 만들 정도로 공산주의자들 또는 ‘종북∙좌파 세력’의 콤뮨(해방구∙解放區)으로 이미 변질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금하기 어렵다.


아무래도 예비역 육군 중장 출신 처장을 포함하여 보훈처 전 직원들이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새로이 공부하지 않으면 ‘보훈처’에 ‘대한민국 보훈처’가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보훈처’로 간판을 바꿔달아야 할 지경에 이른 것 같다. 우선 그 같은 독립운동사 공부의 첫 걸음으로 필자는 이들에게 ‘범우사’가 2002년에 중간(重刊)한 ‘백범일지(白凡逸志)’에서 인용하는 다음 대목들을 읽어 보기를 권고한다.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에는 국내나 국외를 막론하고 정신이 일치하여 민족 독립운동으로만 진전되었으나 당시 세계 사조의 영향을 따라서 우리 중에도 점차로 봉건이니, 무산혁명이니 하는 말을 하는 자가 생겨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선에서도 사상의 분열,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도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하여 음으로 양으로 투쟁이 개시되었다.

심지어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가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이에 반하여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은 민주주의(데모크라시)를 주장하여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고 대립과 충돌을 보는 기괴한 현상이 중생첩출(重生疊出)하였다. 예하면, 국무회의에서는 러시아에 보내는 대표로 여운형(呂運亨), 안공근(安恭根), 한형권(韓亨權) 세 사람을 임명하였건만, 정작 여비가 손에 들어오매 이동휘는 제 심복인 한형권 한 사람만을 몰래 떠나보내고 한이 시베리아를 떠났을 때쯤 하여서 이것을 발표하였다.


이동휘는 본래 강화진위대 참령으로 군대 해산 후에 해삼위(우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서 이름을 대자유(大自由)라고 행세한 일도 있다. 하루는 이동휘가 내게 공원 산보 가기를 청하므로 따라갔더니 조용한 말로 자기를 도와 달라 하기로 나는 좀 불쾌하여 내가 경무국장으로 국무총리를 호위하는 데 내 직책에 무슨 불만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 씨는 손을 흔들며, “그런 것이 아니라 대저 혁명이라는 것은 피를 흘리는 사업인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니 이대로 독립을 하더라도 다시 공산주의 혁명을 하여야 하겠은 즉 두 번 피를 흘림이 우리 민족의 대불행이 아닌가 그러니 적은이(아우님이라는 뜻이니 이동휘가 수하 동지들에게 즐겨 쓰는 호칭)도 나와 같이 공산 혁명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나의 의향을 묻는 것이었다.이에 대하여 나는 이 씨에게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 데는 제3국제공산당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하였다. 이 씨는 고개를 흔들며 “안 되지요” 한다. 나는 강경한 어조로 “우리 독립운동은 우리 대한민족의 독자적 운동이요. 어느 제3자의 지도나 명령에 지배되는 것은 남에에 의존하는 것이니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오. 총리가 이런 말씀을 하니는 것은 대(大)불가이니 나는 선생의 지도를 받을 수가 없고 또 선생께 자중하시기를 권고하오” 하였더니 이동휘는 불만스러운 낯으로 돌아갔다.


이동휘가 보낸 한형권이 러시아 국경 안에 들어서서 우리 정부 대표로 온 사명을 국경 관리에게 말했더니 이것이 모스크바 정부에 보고되어서 그 명령으로 각 철도 정거장에는 체류 한인 동포들이 태극기를 두르고 크게 환영하였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여서는 러시아 최고 수령 레닌(Vladimir Lenin)이 친히 한형권을 만났다. 레닌이 독립운동 자금은 얼마가 필요하냐고 묻는 말에 한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200만 루블이라고 대답한 즉 레닌이 웃으면서 “일본을 대항하는 데 200만 루블로 족하겠는가?”라고 반문함으로 한은 너무 적게 부른 것을 후회하면서 본국과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자금을 마련하니 당장 그만큼이면 된다고 변명하였다.


레닌은 “재 민족의 일은 제 민족이 하는 것이 당연하다”면서 곧 외교부에 명하여 200만 루블을 한국 임시정부에 지불하게 하니 한형권은 그 중에서 1차분으로 40만 루블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이동휘는 한형권이 돈을 가지고 떠난다는 기별을 받자 국무원에는 알리지도 않고 몰래 비서장이요 자기의 심복인 김립(金立)을 시베리아로 마중 보내서 그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고 자기 손에 받으려 했으나 김립은 제 속이 따로 있어서 그 돈으로 우선 자기 가족을 위하여 북간도에 토지를 매수하고 상해에 돌아와서도 비밀히 숨어서 광동(廣東) 여자를 첨으로 들이고 호화롭게 향락 생활을 시작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이동휘에게 그 죄를 물으니 그는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러시아로 도망하여 버렸다.


한형권은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통일 운동자금이라고 칭하면서 20만 루블을 더 받아가지고 몰래 상해로 돌아와서 공산당 무리에게 돈을 뿌려서 소위 국민대표대회라는 것을 소집하였다. 그러나, 공산당도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세 파로 갈렸으니 하나는 이동휘를 수령으로 하는 상해파요, 다음은 안병찬, 여운형을 두목으로 하는 일쿠츠크파요 그리고 셋째는 일본에 유학한 학생으로 조직되어 일본인 복본화부(福本和夫)의 지도를 받는 김준연 등의 ML당파였다. ML당은 상해에서는 미미했으나 만주에서는 가장 맹렬히 활동하였다.


있을 것은 다 있어서 공산당 외에도 무정부당까지 생겼으니 이을규, 이정규 두 형제와 유자명 등은 상해와 천진 등지에더 활동하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들의 맹장들이었다.


한형권의 붉은 돈 20만 루믈로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대회라는 것은 참말로 잡동사니라는 것이 옳을 것이었다. 일본, 중국, 조선, 아령(俄領) 각저에서 무슨 단체 대표, 무슨 단체 대표 하는 형형색색의 명칭으로 200여 대표가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서 일쿠츠크파, 상해파 두 공산당이 민족주의자인 다른 대표들을 경쟁적으로 끌고 쫓고 하여 일쿠츠크파는 창조론, 상해파는 개조론을 주장하였다. 창조론이라는 것은 지금 있는 정부를 해체하고 새로 정부를 조직하자는 것이요, 개조론이라는 것은 현재 있는 정부는 그대로 두고 개조만 하자는 것이었다.


이 두 파는 아무리 싸워도 귀일(歸一)이 못되어서 소위 국민대회는 필경 분열되고 말았다. 이에 창조파에서는 제 주장대로 ‘한국정부’라는 것을 ‘창조’하여 본래 정부의 외무총장인 김규식이 그 수반이 되어서 이 ‘한국정부’를 끌고 해삼위로 가서 러시에 출품했으나 모스크바에서 돌아보지도 아니 함으로 계불입량(計不入量)하여 흐지부지 쓰러지고 말았다.


이 공산당 두 파의 싸움 통에 순진한 독립운동자들끼리도 창조니, 개조니 하는 공산당 양파의 언어 모략에 현혹하여 시국이 요란함으로 당시 내무총장이던 나는 국민대표대회에 대하여 해산을 명하였다. 이 것으로 붉은 돈이 일으킨 한 막(幕)의 희비극이 끝을 맺고 시국은 안정을 되찾았다. 이와 전후하여 임시정부 공금을 횡령한 김립은 오면진, 노종균 두 청년에게 총살을 당하니 인심이 쾌하다 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한형권의 러시아에 대한 대표권을 파면하고 안공근을 대신 보냈으나 효과가 없어서 임시정부와 러시와의 외교관계는 이내 끊어지고 말았다.


상해에 남아 있는 공산당원들은 국민대표대회가 실패한 뒤에도 좌우 통일이라는 미명으로 민족운동자들을 달래어 지금까지 하여 오던 민족독립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자고 떠들었다. 재중국(在中國) 청년동맹, 주중국(住中國) 청년동맹이라는 두 파 공산당의 별동대로 상해에 있는 우리 청년들을 쟁탈하면서 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민족주의자가 통일하여 공산혁명운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또 희극이 생겼다. “식민지에서는 사회운동보다 민족독립운동을 먼저 하라”는 레닌의 새로운 지령이 내려 온 것이었다. 이에 어제까지 공산주의자였던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민족독립운동가로 표변하여 민족독립이 공산당의 당시(黨是)라고 부르짖는 일이 생겼다. 공산당이 이렇게 되면 민족주의자들도 그들을 배척한 이유가 없어졌음으로 ‘유일독립당 촉성회’라는 단체가 새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입으로 하는 말만 고쳤을 분이요. 속은 그대로여서 민족운동이라는 미명 하에 민족주의자들을 끌어넣고는 그들의 소위 헤게모니(주도권)로 이들을 옭아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민족주의자들도 그들의 모략이나 전술을 다 알아서 그들의 손에 쥐어지지 아니 함으로 자기네가 선도하여 만들어 놓은 유일독립당 촉성회를 자기들 음모로 깨뜨려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생긴 것이 한국독립당이니 이것은 순전한 민족주의자들의 단체여서 이동녕, 안창호, 조완구, 이유필, 차이석, 김붕준, 송병조 및 내가 수뇌가 되어서 조직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다른 조직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민족주의자들이 단결하게 되매 공산주의자들은 상해에서 할 일을 잃고 남북 만주로 달아났다. 거기는 아직도 동포들이 민족주의적 단결이 분산, 박약하고 또 공산주의자의 정체에 대한 인식이 없었음으로 상해에서보다 더 맹렬하게 날뛸 수가 있었다.


예를 들면, 이상룡의 자손은 공산주의에 충실한 나머지 살부회(殺父會)까지 조직하였다. 그러나, 제 아비를 제 손으로 죽이지 않고 회원끼리 서로 바꾸어서 아비를 죽이는 것이라고 하니 아직도 사람의 마음이 조금은 남은 것이었다. 이 붉은 무리는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正義附)∙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남군정서(南軍政署)∙북군정서(北軍政署) 등에 스며 들어 가서 능란한 모략으로 내부로부터 분해시키고 상극(相剋)을 시켜서 이 모든 기관을 혹은 붕괴하게 하고 혹은 서로 싸워서 여지없이 파괴해 버리고 동포끼리 많은 피를 흘리게 하니 백광운(白狂雲)∙김좌진(金佐鎭)∙김규식(金奎植: 나중에 박사가 된 김규식은 아니다) 등 우리 독립운동에 없어서는 안 될 큰 일꾼들이 이 통에 아까운 희생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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