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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8-07 12:23:09
  • 수정 2019-08-07 12:2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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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대한언론인회’ 회보 2019년8월호에 수록된 것입니다.


▲ 북한이 여전히 ‘6.25 북침’ 주장을 고수하고 있고, 바로 그 때문에 남북간에 신뢰의 기반이 조성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덮어놓고 남북간에 ‘평화’에 관한 논의가 진행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연목구어(緣木求魚)가 아닐 수 없다. [사진=Why Times DB]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비밀 평양 방문 도중 1972년5월4일 낮 평양의 내각수상실에서 김일성(金日成)과 오찬(午餐)을 겸하여 두 번째로 ‘대좌(對坐)’한 이후락(李厚洛)은 김일성으로부터 기대하지 않았던 말을 듣게 된다.


이후락은 평양에서 김일성∙김영주(金英柱) 형제와 각기 두 차례씩 만나는 동안 끈덕지게 ‘6.25 전쟁’을 거론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후락은 “통일을 포함하여 남북간의 모든 문제를 대화를 통하여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면 신뢰 조성이 필수인데 북쪽이 ‘6.25 전쟁’ 북침(北侵) 주장을 고수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신뢰가 조성될 수 있느냐”는 주장을 거듭 제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일성의 입에서 엉뚱한 말이 튀어 나왔다. “남조선에서는 ‘6.25’와 같은 동란(動亂)의 재발을 염려하면서 ‘남침(南侵)’을 걱정하는 데, 그런 일은 다시는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서울로 귀환한 이후락으로부터 이 같은 김일성의 ‘말’을 보고 받은 박정희(朴正熙) 정부는 김일성의 이 말을 가지고 “북한이 6.25 남침 사실을 시인한 것”이라고 치부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박정희 정부의 오판(誤判)이었다. 김일성의 문제의 ‘말’은 이후락을 ‘단독’으로 만난 자리에서의 ‘사담(私談)’이었을 뿐이지 북한의 공식적인 입장은 아니었다. 김일성과 이후락의 만남이 있었던 1972년의 남북관계의 ‘해빙(解氷)’은 그 한 해에 한정된 ‘신기루(蜃氣樓)’이었고 다음 해인 1973년부터 남북한은 다시 유엔총회에서의 표대결을 연례행사화 하는 대결관계로 복귀했다.


1973년 가을 유엔총회에 제출한 비망록에서 북한은 여전히 “6.25 전쟁은 미군이 벌인 북침”이라는 주장을 다시 제시했고 그 같은 북한의 ‘6.25 북침“ 주장은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는 오늘에 이르도록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엄청났던 인명 피해와 전 한반도를 폐허로 만들었던 참담한 6.25 전쟁의 1차적 피해자는 당연히 군인들이었지만 민간의 인명 및 재산 피해 또한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통계 수자의 부실성이 거론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현재까지 파악되고 있는 군의 인명 피해만 하더라도 한국군 인명 피해가, 수만명의 미귀환 국군포로를 제외하고, 도합 984,400명(전사 227,800명/부상 717,100명/실종 43,500명)이며 그 다음으로 미군의 인명 피해가 도합 169,365명(전사 33,652명을 포함한 사망 54,246명/부상 103,284명/실종 8,196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그밖에 영국∙터키∙오스트랠리아∙캐나다∙프랑스∙타일랜드∙그리스∙네델란드∙콜럼비아∙이디오피아∙필리핀∙벨기/룩셈버그∙뉴질랜드∙남아연방 등 참전 14개국 군대의 인명피해도 도합 17,260명(전사 3,218명/부상 11,280명/실종 1,675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공산군측의 인명피해는 이보다 훨씬 컸다.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미확인 통계에 의하면 북한군은 60여만명(전사 215,000명/부상 303,000명/실종 및 포로 12만명), 중공군은 90여만명(전사 40만명/부상 50만명/포로 21,000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가 되어 있다.


그밖에 남북에서 발생한 민간인 인명피해도 모두 300만명에 이를 뿐 아니라 그에 더하여 수백만명의 이산가족과 전몰군경 유가족 그리고 피학살자 유족들의 단장(斷腸)의 인도적 고통이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다.


6,25 전쟁의 물질적 피해도 천문학적이었다. 성균관대학의 이종원 교수는 영문 학술잡지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Studies' 2001년 여름/가을호에 게재한 “Impact of the Korean War on the Korean Economy (한국경제에 끼친 6.25 전쟁의 영향)”이라는 제목의 영문 논문에서 6.25 전쟁 기간 중 대한민국의 경제가 섬유산업의 70%, 화학산업의 70%, 농업업기계산업의 40%의 파괴와 함께 60만동의 가옥파괴, 철도 46.9%의 소실(消失)의 피해를 입었으며 이에 더하여 44%의 공장 건물과 42%의 산업시설이 폐허화 되었다고 집계한 바 있다.


이 논문에 의하면, 광산 부문에서는 파괴된 전체 산업 시설의 23.3%에 달하는 5억4천만 달러(당시 화폐) 상당의 피해가 발생했으며 전쟁 발발 전 8만 kwh였던 발전 시설의 80%가 파괴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재산상의 피해 총액은 당시의 화폐 가치로 412억원(공식 환률에 의하면 69억 달러)에 상당한 것으로 1953년 GNP의 86%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 결과로 1948년에는 2억8백만 달러였던 해외 무역 규모가 1950년에는 290만 달러로 축소되었고 1950년의 농업 생산마저 1545∼1950년의 년평균 생산량의 65%로 줄어들어 심각한 인플레를 초래했다. 이 같은 6.25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는 북한의 경우 남한의 경우보다 당연히 훨씬 더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이 막대한 재산상의 피해를 초래한 6.25 전쟁은 일요일인 1950년6월25일 새벽 4시경 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전면적 기습 남침을 감행함으로써 일어난 전쟁이다.


전화(戰火)는 1953년7월27일의 ‘군사정전협정’ 체결로 일단 멈추었지만 ‘전쟁 당사국’ 사이에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결시키는 평화조약 체결이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그로부터 66년이 경과한 오늘에 이르러서도 한반도에서는 여전히 155마일 군사분계선 남북으로 각기 2km 폭의 실제로는 중무장(重武裝)된 명목상의 ‘비무장지대(DMZ)’를 사이에 두고 ‘비전비화(非戰非和)’의 불안정한 휴전(休戰)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 하에서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결하고 완전한 평화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등장하는 것이 ‘평화협정’ 논의다.


인류 역사를 통하여 무수하게 일어난 전쟁은 대부분 ‘평화협정’ 또는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마지막 수순으로 하여 공식으로 종결되고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 통례(通例)였다.


근세(近世) 이후에 이루어진 ‘평화조약’의 대표적 사례로는 유럽에서의 ‘30년 전쟁’을 마무리한 1648년의 ‘웨스트팔리아 조약’(Westphalia Peace Treaty);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을 마무리한 1815년의 ‘비엔나 조약’(Vienna Peace Treaty);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한 1919년의 ‘베르사이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한 1952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Treaty of San Francisco) 등이 있다.


이들 ‘평화조약’들이 갖는 공통의 특징은 그 가운데 어느 ‘평화조약’도 영속적인 ‘평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전쟁 재발을 허용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 ‘평화조약’들은 한결 같이 ① 전쟁 책임의 규명을 통한 전범(戰犯) 처벌과 이재민 및 포로 처리 그리고 전쟁 피해 배상(賠償) 등 전후 처리 방안, ② 평화조약 당사국간 국경선의 획정, 그리고 ③ 향후 발생하는 분규의 평화적 해결 방안 등을 명시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다만, 최근 이 같은 통상적인 ‘평화조약’과는 내용과 형식을 달리 하는 이단적(異端的)인 ‘평화조약’의 사례가 등장했다. 월남전(越南戰)의 종식을 가져 온 1973년의 ‘파리 평화협정’이 그것이다.


정식 명칭이 ‘월남에서의 전쟁 종식과 평화 회복을 위한 조약’(Agreement on Ending the War and Restoring Peace in Vietnam)인 이 조약은 월남전 계속 수행의 의지를 상실한 나머지 주월 미군 철수에 급급하고 있던 미국 정부가 “월남전은 ‘민족해방전쟁’ 차원의 내전(內戰)”이고 “미군은 월남의 내전에 개입한 외세(外勢)”라는 월맹측의 주장을 수용한 사실상의 ‘항복문서(降伏文書)’였다. ‘파리평화협정’은 월맹이 1975년 무력으로 월남을 정복하여 무력 통일을 성취하는 문호를 열어 주었고 미국 상원(上院)이 아직까지도 이를 비준하지 않고 있는 비정상적 상황의 주인공이 되어 있다.


한반도에서 6.25 전쟁의 공식적인 종식을 위해서는 앞에서 열거한 ‘평화조약’들처럼 ‘전쟁 당사국’ 사이의 ‘평화협상’을 통하여 내용과 형식이 완비된 ‘평화조약’이 논의되고 합의되어서 체결되는 것이 필수적인 수순이다.


그리고, 그 같은 내용의 ‘평화조약’이 남북을 포함한 ‘전쟁 당사국’ 사이에 성실하게 논의되기 위해서는 우선 남북 사이에 실질적인 상호 신뢰의 기반이 마련되는 것이 선결조건이라는 사실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남북간에 이 같은 신뢰의 기반이 마련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비록 6.25 전쟁 발발로부터 7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 2차 세계대전 후에 있었던 ‘뉴렘버그 전범재판’이나 ‘도쿄 전범재판’이 열리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북한 정권이 “6.25 전쟁은 북한이 일으킨 전쟁”이었음을 “시인, 사과”하고, 재발(再發) 방지를 보장하며 이 같은 사실을 공식적으로 역사에 기록하는 수순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데도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북한이 여전히 ‘6.25 북침’ 주장을 고수하고 있고, 바로 그 때문에 남북간에 신뢰의 기반이 조성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덮어놓고 남북간에 ‘평화’에 관한 논의가 진행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연목구어(緣木求魚)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이 이끄는 ‘종북∙좌파’ 정권이 ‘평화조약’이 구비해야 할 논의 절차와 수순 그리고 내용을 모조리 무시한 채 김정은(金正恩)의 북한을 상대로 덮어놓고 북한이 주장하는 사이비 ‘평화’를 수용하는 기만적인 ‘평화협정’ 놀음을 펼치는 망국적(亡國的)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그 가운데 압권은 지난 작년 9월19일 이 정권이 평양 정권과 합의하여 발표한 ‘남북 군사분야 합의서’이지만 최근에 와서는 이 나라 국방부 차원에서 “내년(2020) 6.25 때 남북이 공동으로 ‘6.25’를 기념(記念)하는 행사를 갖자”는 듣기에도 끔찍한 논의가 거론되는 일이 세간에 알려지는 사태에 이르고 있다. 6.25 전쟁의 책임이 규명되지 않고 ‘남침’설과 ‘북침’설이 여전히 대치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도대체 6.25 전쟁을 어떻게 “기념”한다는 것인가? 실로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은 논의가 국방부 안에서 거론되는 지경에 이른 것이 사실이라면 이 나라의 국토방위와 국가안보는 물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국가정체성은 도대체 어떻게 지켜내야 할 것인지 실로 하늘이 꺼지는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여전히 “6.25를 상기(想起)하자”(Remember June 25, 1950)는 구호 아래 군∙관∙민과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전 국민이 일치단결하는 임전태세(臨戰態勢)를 확고하게 유지할 절대적 필요성이 지속되고 있는 나라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진정으로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에 대비하는 데 소홀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은 만고불변(萬古不變)의 금언(金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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