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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1-29 14: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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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첩이 된 것은 가족력… 부계에는 반골 개썅마이웨, 모계에는 씹선비의 피가 흘렀으니
-군사정권의 교육 혜택 못받아 반공 치하에서도 공산주의자 되고, 공산 치하에서 적폐가 되다
-최루탄 냄새 자욱한 청계천 거리에서 싸우는 전경과 전대협 형들… 엄청난 충격과 공포였다



 

 

적폐 동무들 오래 기다릴 거 같아 일단 한 단락 올립네다. 내래 사실은 자본주의 물을 마이 먹어서 이남 말이 더 익숙하니 이남 말로 쓰갔시오. 좀 봐주기오.

이 이야기는 먹고 살기 바쁘니 대충 생각나는 대로 쓸 예정입니다. 문체나 시점의 일관성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와 지금의 관점이나 생각이 뒤섞일 것 같습니다만 그거까지 잡아가며 쓰기에는 자본주의의 압박이 너무 크고 자본주의 최고 발명품인 귀차니즘이 너무 달콤합니다.

 

 

 

#1 주체적 의식화

 

그러니까 벌써 대략 30여년 전 얘기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 고첩이 된 데는 가족력이 있는 것 같다. 부계에는 반골 개썅마이웨의 피가, 모계에는 씹선비의 피가 흘렀으니 어쩌겠는가. 또 한 가지 요인은 어린 시절 군사정권의 교육을 받지 않아서 반공 치하에서도 공산주의자가 되고, 공산 치하에서도 적폐가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최루탄 냄새가 자욱했고, 전경들과 전대협 형들이 싸우고 있었다.


그래,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 내가 어린 시절을 외국에서 보내고 우리나라에 돌아온 것이 대략 열 살 때 즈음이다. 출국할 때 우리나라는 여전히 가난한 빈국이었고, 가서 살았던 나라는 선진국이었다. 그러나 귀국할 때 우리나라는 그 나라보다 더 미래가 찬란해보이는 나라였을 만큼 발전해 있었다. 이후의 일이지만 그로부터 6년 후 다시 그 나라를 방문했던 시점에는 우리나라는 이미 그들에게 선망의 대상인 하이테크의 나라였다.

 

다시 원래의 얘기로 돌아와서.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나는 어릴 때의 상황을 기억하는 게 아니다 보니, 외국생활에 익숙한 내가 본 우리나라는 너무 미개했다. 그 미개함 중에 가장 미개한 것이 바로 군사정권의 강압적인 국뽕반공 교육과 조선식 유교였다. 이건 뭐 전체주의가 따로 없었다. 사실 30여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봐도 이 미개함이 안 해결돼서 망조가 든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군사정권에 대한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문화적 차이가 더 컸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나이 때는 그랬다. 고첩 신분 보안 때문에 자세히 쓸 수는 없지만 아버지는 당신 업계에서 신진 리더셨고, 그 덕에 우리 집에는 민주주의 뽕 맞은 대학생 형들이 숙식을 같이 했다. 미개한 학교의 강압에 지친 내게 군사정권을 절대악과 폭력으로 인식하는 그들의 인식이 스며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귀국 이후 두 번째로 충격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첫 번째는 잠시 부산의 친척 집에 머물면서 가게 아저씨의 찰진 부산 사투리 욕을 쳐먹었을 때였다. 그렇게 무서운 말투는 내 인생에 처음이었다).

 

당시 한 대학생 형을 따라 청계천에 ‘만능킷트’라는 걸 사러 갔다. 어이, 거기 틀딱! 아는 척 하지 마라. 중년 쉰내 들킨다. 그냥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자. 옛날에는 그런 물건이 있었다. 요새로 치면 코딩교육 한답시고 사기 치면서 파는 그런 장난감 같은 거라고 보면 된다. 아무튼 그걸 조금이라도 합리적인 가격에 사기 위해 당시 최대 전자상가거리가 있던 청계천으로 갔다. 그러나 우리는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최루탄 냄새가 자욱했고, 전경들과 전대협 형들이 싸우고 있었다. 그 날은 기억이 흐려 화염병을 봤는지 못 봤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나라에 와서 이전에 살던 나라에 대해 완전 소설 같은 보도가 날 때부터 언론이라는 게 못 믿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씨발, 그렇게 분규가 심하다는 나라에서 한 번 구경 못한 광경을 그 나라 비난하는 보도를 하는 나라의 수도 시내 대로에서 본 것이다. 아, 미안하다. 그 때의 충격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욕이 나오네. 근데 이 언론 놈의 새끼들이나 국뽕 장사하던 개새끼들은 욕을 먹어도 싸긴 하다.

 

그 장면을 겪고 난 나는 이만큼 무섭고 폭력적인 나라가 있나 싶었다. 아마 요새 애들 중에 교사나 부모가 약간만 의식화 힌트 던져주면 박근혜 꼬라지 보면서 그런 충격 받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일을 겪고 나면 체계적인 의식화 교육을 받기도 전에 체험으로, 피부로, 뼈와 살로 의식화되는 것이다. 몸속에 있던 반골의 피가 끓어올랐다. 군사정권은 척결해야 하는 거악이고 적폐였다. 그러나 당장 일상에 적응하기도 바빴던 나는 그냥 그런 의식만 지닌 채 살고 있다가 87년 6월 항쟁 끝에 6.29 선언을 맞았다.

 

당시 대통령이 아닌 후보 노태우가 6.29 선언을 했다는 건 상당히 선거 전략적인 꼼수였다는 생각이 든다. 뭐, 당시에도 형, 누나들이 그런 얘기를 했고 그걸 믿었지만, 그것만큼은 세뇌 구라가 아닌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선 결과는 노태우의 당선이었다. 그 절묘한 삼분지계를 이번에도 바랐건만. 아닙니다, 선배 고첩님들, 이건 그냥 괴뢰패당의 패악질의 극을 달려 인민혁명을 더 빨리 가져오겠다는 전략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여기까지가 이미 반군사정권의 화신이었지만, 아직 공산화되기 전의 얘기다.



[덧붙이는 글]
['제3의 길' 轉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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