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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2-04 09: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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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부인 나데즈다, 계급혁명 위한 주체적 학습 돕는 것이 참교육이라는 이론적 기틀 마련
-중학교 역사반 동아리 가입… 3.15, 4.19, 5.18 등 대학생 역사학회 의식화커리 주제로 토론
-전교조 지회장 개처럼 끌려가고 친구들은 “선생님 끌고가지 마세요”라며 교문 부여잡고 울어

잠깐 얘기를 이어가기 전에, 그 시절 생각하니 꼭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분이 어제 생각나서 언급하고 간다. 1987년 대선 기호 8번 백기완 선생. 나는 삼심대 초반까지만 해도 백기완의 이름에 꼭 ‘선생’ 자를 붙였다. 요즘 동무들에게는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의 원전인 시 ‘묏비나리’의 저자로 더 잘 알려져 있을 것 같지만, 당시에는 반체제, 저항, 재야의 상징이었다. 지금 리석기나 한상균 동무 같은 동무들은 애들이다.

 

완전히 공산화되기 전이었다고 해도 나는 87년 그의 절절한 TV 유세 연설을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진솔하고 서민적인 언어. 피를 토하는 울부짖음. 그의 연설 중 가장 기억에 나는 부분은 “어머니는 저에게 버러지가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로 시작해서 “여러분~! 대통령 버러지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로 끝나는, 전설의 쌍김디스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분들은 대통령 버러지가 맞긴 했던 거 같다. 아직도 꾸역꾸역 기어나오는 아들놈들도 그렇고.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나의 정서적 공산화의 또 다른 주역은 전교협, 혹은 전교조였다. 앞서 말했듯이 국딩이었던 내가 느꼈던 가장 큰 불합리함은 내 삶과 밀착돼 있는 우리 교육에 있었다(이래서 생활밀착 투쟁이 중요한 거다). 공공연히 내가 크면 문교부 장관이 돼서 이걸 뜯어고치겠다는 헛소리를 할 정도였다.

 

그러던 와중 민주화가 되고, 1987년 9월말 전교협이 결성됐다. 이후 전교협의 투쟁과 이에 대한 탄압이 지속적으로 이어졌고, 나는 참교육을 실현하겠다는 교사들을 이래 탄압해도 되나 분노했다.

 

물론 그 때는 당성이 부족해서 참교육의 창시자가 레닌 동무의 부인 나데즈다 콘스탄티노브나 크룹스카야(Наде́жда Константи́новна Кру́пская) 여사라는 것을 몰랐다. 크룹스카야 여사는 교사 출신답게 교육 인민위원회 중앙위원을 했고, 소련 교육의 사상적 기틀을 마련한 분이다.

 

그동안 교사가 가르친 지식교육은 가짜 교육이고, 사회 변혁, 그러니까 계급 혁명을 위한 주체적 학습을 하도록 돕는 것이 참교육(Правда Образование)이라는 것이 그 분의 이론이었다. 이 논리는 후에 계승돼 정치적 목적으로 교육을 해야 하며, 교사의 집단화가 필요하다는 안톤 세묘노비치 마카레코(Антон Семенович Макаренко)에 의해 계승된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에 쩔은 남조선 교사 집단이 레닌 동무의 사상을 제대로 배운 건 아니고, 다시 소련의 참교육을 자국에 토착화한 일교조의 참교육(眞敎育)에서 따왔다는 것이 정설이긴 하다.

 

아무튼, 그런 것을 까맣게 몰랐던 나는 참교육은 그야말로 참되고 올바른 교육을 의미하는 줄 알았다. 전교협에 대한 지속적인 탄압에 분노한 나는 투쟁의 열망은 강렬했다. 그 열망이 결국에는 어제 말한 담임선생님의 혁명역량의 한계를 인식하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아마 겨울방학을 앞둔 시점이었을 것이다. 학기 진도도 다 나갔고 해서 아마 학기를 마무리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스스로의 교육에 대한 피드백도 받을 겸 선생님은 묻고 싶은 것, 자신에게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 하셨다. 나는 당시 그래도 사회변혁의 사상과 의지를 가졌다고 믿었던 담임선생님께 어느 정도 기대를 걸고, 학생들을 조직해 전교협 합법화(마침 시의성 있는 주제군)를 요구하는 시위를 국회 앞에 가서 할 테니 선생님께서 좀 지원을 해 달라. 적어도 학교 차원의 압박을 무마해달라 요청했다.

 

담임선생님은 운동권의 물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훌륭한 교육자였다. 선생님의 답은 “그렇게 나서서 투쟁하는 건 어른들의 몫이니 지금 학생들은 아직 인생이 창창한데 그런 희생을 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학생들에게 주어진 몫은 공부하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라는 취지로 답하셨다. 당시 나는 이 대답을 듣고 혁명역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자신의 사상적 지향보다는 어린 학생들의 교육과 안위를 걱정하셨던 분이었다. 전교협이나 전대협 골수분자는 못 되셨던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전교협 시기를 보내고 중학교로 올라갔다.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골수 전교협이었다. 그 때는 확실히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전교조들이 갖고 있는 특성을 고스란히 갖고 있었다.

 

역사교사였는데, 수업 때 툭하면 정치 얘기, 나라 비판했던 얘기는 둘째로 치고 동아리 활동에 당시에는 보기 힘든 역사반을 만들었다. 나는 작가 지망생, 그것도 궁중 암투 사극 작가 지망생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역사반에 들었다.

 

역사반의 커리는 지금 생각해보면 딱 대학생 역사학회 의식화 커리였다. 월 1회로 주제를 하나씩 잡는데, 3.15, 4.19, 5.18. 이미 독학과 대학생 형들에게 들은 얘기가 많아서 그다지 새로운 주제들은 아니었지만 워낙 그런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풀어주셨다. 그런데 나는 그 분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는 다음 회에 모아서 해보고, 전교협 이야기를 계속하자.

 

▲ 전교조 출범의 열기에 이어 탄압의 광풍이 몰아쳤다.


5월이 되자 나는 전학을 갔다. 그리고 28일 전교조가 출범했다. 전교조 출범의 열기에 이어 탄압의 광풍이 몰아쳤다. 아무리 전교조 동지들이 우리 조국의 혁명전사들이라고 해도 지금 생각해도 그건 군사정권의 후신이 아니었다면 할 수 없는 탄압이었다.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는 성호스급이 아니면 그걸 용인할 수는 없는 수준이었다.

 

내가 전학 가기 전 학교에는 저 골수 담임조차 서열에도 못 끼었다. 지회장 학교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지회장이 지역마다, 설립별로 다 있지만 당시에는 출범 초기라 지회장은 곧 중앙 당서열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지회장에게도 수업을 들었는데 오히려 그 분은 서열이 있어서였는지 딱히 운동권 냄새도 안 나고, 그냥 착한 도덕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TV 뉴스 화면을 통해 그 선생님이 개 끌려가듯 끌려가는 장면을 봐야 했다. 전교조 지회장이라는 이유 하나로. 내 친구들이 “선생님을 끌고가지 마세요!”하면서 교문을 부여잡고 울고 있었다. 이미 의식화가 된 어린 아이가 이런 감정이 폭발하는 장면을 봤으니 그들이 가르쳐온 친일 독재 정권이 뼛속에 각인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이후 <죽은 시인의 사회>를 봤을 때 이 장면이 오버랩돼서 키팅 선생을 희생자로 인식한 나는 지금 생각해보면 역시 중2병 병신이라 자아비판할 일이지만, 그 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부조리한 친일독재 정권의 거악에 분노하면서 나의 청소년기가 다가왔다.



[덧붙이는 글]
['제3의 길' 轉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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