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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2-16 10: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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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학교는 학생 인민이 권력과 자본을 쥔 교사에게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곳이었다
-학생 인민들은 맛있는 도시락 등 앞에서 기본적인 존엄마저 포기할 준비가 돼 있었다
-나는 예의를 차려 말하자면 이상주의자,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사회부적응 또라이였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때는 더더욱 행동가였다. 부조리한 친일독재 정권, 생명연장이 된 군부독재 치하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초등학교 때는 실력이 모자라 결국 제안만 하고 말고 책이나 모여 읽었지만, 중학교 때는 달랐다. 머리도 더 크고, 세상의 중심이 내가 되는 중2병 시절을 거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시절은 활동가로서 좌절을 맛봐야 했던 시절이었다.

 

내가 문제의식을 갖게 된 부분은 앞서도 말했지만 내 생활과 밀착한 학교의 지배구조였다. 내게 학교는 학생 인민이 권력과 자본을 쥔 교사에게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곳이었다. 군사독재의 통제와 강요, 폭압적인 학교문화, 그리고 사회적 환경까지 어우러져 생긴 그 인식은 실망스러웠던 두 명의 담임을 거치고 나서도 변화하지 않았다. ‘좌파는 안 돼’가 아니라 ‘역시 의식이 있다고 해도 선생은 선생, 선생이 지배하는 구조는 안 돼’라는 쪽으로 인식이 발전하게 된 것이다.

 

▲ 세계에서도 공산 혁명은 실패해가고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사실 그 이후에는 더 실망스런 교사들을 계속 만났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 문제의 귀인이 ‘좌파’가 아니라 ‘선생’에 되는 것은 내 경험을 놓고 보면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여전히 학교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폭압이 넘쳤고, 권위주의는 좌우 구분할 것이 없었다.

 

그렇게 나에게 계급계층이라는 것은 교사 계급과 학생 계급이었고, 교사 계급은 타도해야 할 계급이었다. 의식이 깨었거나 착한 교사가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착한 자본가가 있다고 해서 자본가를 타도하지 않을 이유가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택한 길은 학교에서 학생 인민이 주인이 되는 혁명을 하는 방향이었다.

 

그러나 학생 인민 대중은 요새말로 인권이 먹는 거냐고 물을 만큼 인권은 물론이고 주체적인 의식, 교사 계급 타파에 관심이 없었다. 이럴 때 엘리트 운동과 대중 의식의 괴리가 생기는 것이다.

 

나는 흔히 엘리트 운동가들이 하듯이 그것을 계몽으로 극복해보려 했다. 나는 말이 통할 것 같은 친구들에게 열심히 설파했다. 이 불합리한 학교의 권력 구조에 대해. 진정한 학생 인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에 대해. 우리가 가진 기본적 인권과 그것을 보장 받을 방법에 대해.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무지한 니들을 내가 가르쳐주겠다는 접근은 중2병스런 생각이었다. 그런 게 먹힐 리가 없었다.

 

사상과 인민의 현실은 다른 것이다. 인민은 요새말로 하면 미개했고 개돼지였다. 나는 조선불패 드림주니어의 심정을 100% 이해한다. 물론 그것까지 감안해야 하는 것이 정치지, 개돼지라고 비난하거나 가르쳐서 바로잡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학생 인권 따위에 관심 가지는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 소리를 하는 나는 예의를 차려 말해주면 이상주의자였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사회부적응 또라이였다. 학생 인민들은 하루하루 안 맞을 수만 있다면, 맛있는 도시락을 먹을 수만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놀 수만 있다면 인권 신장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존엄마저 포기할 준비가 돼 있었다.

 

사상이 지향하는 세상과 인민의 욕구의 괴리는 너무나 컸기에 장기적인 계몽운동의 필요성을 느꼈지만, 말로 가르치고 설득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논리가 맞다고 해서 인민 대중이 설득되는 게 아니었다. 내가 중2 때 깨달은 걸 보수괴뢰 역적 패당들은 아직도 못 깨닫는 걸 보면 뭐 그렇게 늦은 깨달음은 아니었다.

 

교육의 변화를 불러오겠다는 생각도 이런 학생 인민과 학부모 인민의 상태를 인식하면서 무릎을 꿇게 되었다. 사교육의 압박이 심해지는 중학생 시절의 학부모들을 보니 백날 교육제도를 변화시켜도 이 의식이 개혁되지 않는 한 달라질 것은 없겠다 싶었다. 나의 혁명은 실패했다. 인민 대중의 혁명역량을 일깨우지 못하는 혁명은 애초에 태어나지도 못하는 아이였다.

 

나의 혁명만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세계에서도 공산 혁명은 실패해가고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고첩의 아버지 볼프는 무너진 장벽에서 눈물을 흘렸다. 혁명대국 소련이 해체됐다. 러시아가 소련의 후계자로 미제한테 공인받아야 하는 치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나의 학교 계급혁명도, 세계의 공산 혁명도 실패했다.

 

아직도 우리나라 운동권은 91년 공안정국이니 하며 데모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그들만의 리그가 되고 있다는 현실을 내 삶의 현장에서 체험했다. 87 체제를 가져온 인민 대중은 더 이상 혁명을 원하지 않았다. 인민의 의식과 괴리된 엘리트주의 운동은 공허한 구호일 뿐이었다.

 

물론 나는 여전히 백기완 선생을 존경하고 있었고, 계급 혁명을 꿈꾸고 있었지만, 이런 직접적인 방법은 이제 틀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학생 인권은 내가 내 옆 아이의 인권을 챙겨준다고, 내가 선생과 싸운다고, 내가 구호를 외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긴 호흡으로 사회의 의식을 개조할 필요가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민의 현실이 사상의 이론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기는 했지만 운동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제도 변혁 이전에 의식 개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내가 온전히 주류 좌파와 등을 진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덧붙이는 글]
['제3의 길' 轉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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