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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6-24 20:33:10
  • 수정 2019-06-26 10: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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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백년조류`는 ˝6.25전쟁은 스탈린이 주도하였고 김일성은 2주안에 남한을 점령할 수 있다고 믿은 과격주의자였으며 모택동은 여기에 동조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사진은 당시의 김일성과 스탈린 [사진=Why Times DB]


대한민국의 문대통령이 6월 14일 6. 25 전쟁 참전국인 스웨덴 의회에서 6. 25 전쟁을 쌍방과실이라고 주장하였다.


김정은도 중국의 시지핑이 6월 20~21일 평양을 방문했을때 시지핑과 21일 '조. 중 우의탑'을 함께 참배한 후 남한의 북침론을 폈다.


북한군의 기습남침 전쟁 69주년을 앞두고 역사적으로 밝혀진 사실을 부정하는 주장들을 계기로 그동안의 연구들을 조명해 본다.


송종환 경남대 석좌교수는 1991년 냉전종식 후 1992년부터 러시아측에 의하여 공개된 세 가지 종류의 6.25 전쟁 관련 비밀문서들을 분석하였다.


On the Korean War, 1950-53, and the Armistice Negotiations題下 첫번째 자료는 미국과 전쟁 중인 베트콩에 대한 소련의 지원문제를 중국, 월맹측 관계관들과 협의하려는 소련관계관들에게 배경정보로 제공할 목적으로 소련 외무성이 6. 25 전쟁에의 소련과 중국의 개입관련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두번째 자료는 옐친(Boris Yeltsin)대통렁이 1994년 6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영삼대통령에게 제공키 위하여 정리한 것으로서1949-53년 기간 중 6.25 전쟁에 관한 216건, 총548쪽에 이른다.


세번째 자료의 정식명칭은 The Archive of the President, Russian Federation이며 略稱은 APRF로서 1950.2- 1953.7 기간중의 총 1,200쪽에 이르는 러시아대통령실 문서고 소장 문서들이다.

상기 문서들은 1993년 가을부터 Washington, D.C.소재 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가 발간하는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이하 CWIHP로 略稱)Bulletin에 시리즈로 게재되었으며 http://www.seas.gwu.edu/nsarchive/CWIHP/cwihp.htm에서 검색할 수 있다.


이 방대한 자료들의 분석을 통한 두 가지 결론은 다음과 같다.


o 6. 25 전쟁이 남한의 북침에 대한 북한의 반격이라고 되풀이해 온 구소련과 북한측의 주장이 거짓 선전에 불과하며, 스탈린(Joseph Vissariovich talin)에 의하여 계획되고 소련 군사고문관들이 작성한 군사작전계획에 따라 북한군이 남침한 전쟁임이 밝혀졌다.


o 국내외 일부 학자들이 주장해왔던 것과는 달리 6.25 전쟁이 김일성의 역사적 결단에 의한 전쟁이 아니라 스탈린의 결단에 의한 전쟁임이 밝혀졌다.


위 연구결과는 20년 전 국제정치논총 제39집 2호(1999), pp. 183-208에 '6. 25 전쟁(한국전쟁)에 대한 소련의 전략적 의도 분석'이라는 제목으로와 월간조선 1999년 11월 호 '舊소련 비밀문서에 나타난 전쟁의 起源:스탈린은 6·25 전쟁을 기획하고 연출한 총감독이었다'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공개된 방대한 소련 비밀문서들을 분석한 송종환의 연구 보고와 후에 중국사료를 연구한 천지안(Chen Jian), 선즈화(Shen Zhihua), 김동길의 연구로 북한군의 남침 전쟁은 도전을 할 수 없는 사실로 밝혀졌고 국제사회에서 정설로 확립되어 있다. [편집자 주]


[6.25전쟁의 기원, 북침인가 남침인가?]


6.25전쟁의 기원에 대하여는 그 동안 국내외의 수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되어 다양한 학설과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1992년부터 러시아측에 의하여 공개된 세 가지 종류의 6.25전쟁 관련 비밀문서들은 한국전쟁이 남한의 북침에 대한 북한의 반격이라고 되풀이해 온 구 소련과 북한측의 주장이 거짓 선전에 불과하며, 스탈린(Joseph Vissariovich Stalin)에 의하여 계획되고 소련 군사고문관들이 작성한 군사작전계획에 따른 북한측의 남침임을 밝혀주고 있다. 또한 국내외 일부 학자들이 주장해왔던 것과는 달리 한국전쟁이 김일성의 역사적 결단에 의한 전쟁이 아니라 스탈린의 전쟁임이 밝혀 졌다.


1997년 7월 14일자 뉴스위크지는 「역사의 교훈 제2장」제하 특집기사에서 중국 공산당의 공식 기관지인 「百年潮流」가 지난 40년간 중국 공산당이 고수해온 남한에 의한 북침 주장을 포기하면서 「6.25전쟁은 스탈린이 주도하였고 김일성은 2주안에 남한을 점령할 수 있다고 믿은 과격주의자였으며 毛澤東은 여기에 동조했다고 기술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또한 동 기관지는 모택동의 한국전쟁 참전결정을 비판하면서 「6.25전쟁은 지금까지 중국이 주장해온 것처럼 영광스러운 승리가 아니라 스탈린의 수중에서 놀아나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실익을 침해한 대실수였다」고 주장하였다.


6.25전쟁을 일으킨 소련의 전략적 의도에 대하여 학자들에 따라 많은 견해들이 나누어져 있다.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즉각적으로 한국 구원을 위하여 파병을 한 트루먼(Harry S. Truman)행정부는 6.25전쟁을 東西冷戰의 테두리에서 소련공산주의 팽창의 일환으로 보았고, 이제까지의 전통적 견해가 되고 있다. 성신여대 김영호교수는 6.25전쟁의 원인을 스탈린의 롤백전략(rollback strategy)에서 찿는다.


이 롤백이론은 스탈린이 냉전 개시 이후 최초로 북한군을 이용하여 미국의 봉쇄선을 대담하게 넘어서 韓半島 전체를 소련의 영향권에 편입시키기 위하여 한국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스탈린은 이 롤백전략에 의하여 만일 미국이 만주로 침략해올 경우 중·소 우호, 협력, 상호 원조조약(The Treaty of Friendship, Alliance, and Mutual Assistance, 이하 중·소 동맹조약으로 略稱)을 발동하여 미국을 광활한 황무지인 만주로 끌어들여 미국을 약화시키고 냉전대결에서 결정적 승기를 잡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샬 슐만(Marshall Shulman)은 “소련은 중국이 소련의 참전여부와 상관없이 6.25전쟁 참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에 북한에서의 지배적 위치를 잃을 것을 우려하여 김일성의 한국전쟁 개시 간청을 승인하였다”고 주장하였으며 아담 울람(Adam Ulam)은 “스탈린이 남한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한국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한국전쟁이 일어나면 모택동이 중국대륙에서 새로운 내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소련의 지원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을 예견하고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의 후견적 지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할 목적으로 소련측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주장하였다. 상기 두 학자는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일으킨 동기를 공산주의의 팽창에서 보다 그의 對中國 關係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6.25전쟁에 관한 구 소련 문서의 비밀 해제로 6.25전쟁이 공산측에 의하여 周到綿密하게 계획된 남침전쟁임이 밝혀졌지만, 스탈린이 6.25전쟁을 일으킨 전략적 의도와 관련하여 아직도 분명한 해답을 얻지 못하는 많은 질문들이 있다 :


-스탈린은 전 세계 공산화정책의 일환으로 또는 극동지역에서의 소련의 국가안보이익을 확보하기 위하여 6.25전쟁을 일으켜 한반도 전체 지배를 노렸는가,

-북한군의 남침에 대하여 당시 트루먼행정부가 판단한 것처럼 스탈린은 6.25전쟁을 일으켜 미국을 비롯한 서방측의 의지를 시험하려 하였는가,

-스탈린은 중국공산혁명을 이념적 연대 차원에서 시종일관 지원하였는가,

-6,25전쟁은 스탈린의 대중국 전략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스탈린의 당초 예상과는 달리 조기에 달성된 중국공산혁명이 6.25전쟁 勃發에 영향을 미쳤는가,


중국 공산당 기관지 「百年潮流」는 처음으로 북침주장을 포기하면서 왜 모택동이 스탈린에 이용당했다고 비판하였는가 등이 관련된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스탈린의 전략적 의도를 파악하기 위하여 6.25전쟁 開始 前 소련의 한반도 정책, 6.25전쟁 개시 승인과 관련하여 국제정세 변화와 소련의 대중국관계를 차례로 검토한 후 결론에서 6.25전쟁 관련 두 요소를 비교하여 스탈린의 진정한 전략적 의도를 도출해 보고자 한다.


[6.25전쟁 개시 전 소련의 한반도 정책]


러시아제국은 시베리아 진출을 통하여 한반도와 국경을 맞대게 되면서 안보, 통상측면에서 한반도에 접근, 관계를 증진하고 영향력 행사를 시도하였으나 한반도에 대한 관심 수준은 對中國과 對日本 관계에서의 地政學的 價値 이상을 넘지 않았다.


1876년부터 1904년 기간 중 한반도에 대한 日·露간의 지배권 다툼 역사를 보더라도 러시아는 만일 일본측이 한반도를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한반도 전체를 포기할 수는 있으나 19세기 후반부터 영향권을 확대해온 滿洲에 대하여는 전쟁을 피해 가면서 포기할 의향이 없었다.


만주가 극동에서의 러시아 국가이익의 1차적 목표라면 한반도는 부차적이었다.


공개된 소련 비밀문서들을 보더라도 1945년2월 얄타회담으로부터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러 남침문제를 구체적으로 상세히 협의한 1950년 4월 前까지 스탈린은 ‘한반도 전체’에 대한 영향권 확보를 목표로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느 1개 국가가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갖는 것을 방지하는 勢力均衡者 위치를 유지하는 러시아제국 말기의 한반도정책을 그대로 답습하였으며 미국이 세계 제2차대전 終戰 처리의 일환으로 한반도내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하여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잠정적으로 분단할 것을 제의한 것을 수락함으로써 이 목표를 달성하려 하였다.


스탈린은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對日 參戰條件으로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에 대한 지배, 東淸鐵道·旅順(군항)·大連(상항)의 임차 및 외몽고에서의 현상유지를 제시하였지만 한반도에 대하여는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고 미국이 한반도에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만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대통령에게서 확인하고 동 대통령이 제의한 美··中 三國 代表에 의한 신탁통치안에 동의하였다. 3개국에 의한 신탁통치야 말로 제정 러시아 이래 한반도에 대한 전통적 정책과 일치되는 것이었다.


포츠담회담에 대비하기 위한 참고자료로 1945년 6월 소련 외무성 극동2과가 작성한 문서는 얄타회담 후 수개월간 한반도문제에 대한 소련의 의도를 나타내는 좋은 예이다. 동 문서는 역사적으로 한반도가 열강의 각축장이었으며 대륙으로의 일본세력 확장을 위한 교두보이었음에 비추어 극동 소련의 안보를 위하여 한반도가 敵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필수적이며 한반도의 정부는 소련과 우호적이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반도에서 세력균형자를 추구하는 정책에 따라 소련은 포츠담에서도 한반도 전체에 대한 군사적 지배를 확보하려 하지 않았다. 1945년 7월 24일 포츠담에서 있은 제2차 미··영 참모총장회담에서 소련 안토노프(Antonov)장군이 마샬(George C. Marshall)장군에게 한반도에 대한 소련지상군의 공격작전을 알리면서 미군도 그에 상응하는 지상작전을 실시할 의향이 있느냐고 문의한 데 대하여 미국측이 가까운 장래에는 작전의 어려움 때문에 실행계획이 없다고 답변하자 소련측은 한반도가 육상작전을 위한 소련구역으로, 공군·해군 작전을 위한 미국구역에 각기 포함시킬 것을 제의하였다.


스탈린은 한반도에서 세력균형자를 추구하는 정책에 따라 미국측이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단하는 안을 포함한 연합군 태평양 최고사령부 「일반명령 제1호」를 제시하자 이를 받아들였다.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의 대립이 심화되자 소련측은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을 소비에트화하면서 한반도가 對蘇攻擊基地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견지해 나갔다.


2차대전 패전국문제와 그들의 식민지처리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연합국 외상회의가 1945년 9월 12일부터 10월2일까지 런던에서 개최되었으나 東歐와 일본 管理문제에 대한 미·소간의 의견대립으로 결렬되고 말았다. 10월 24일 교착상태를 타결하기 위하여 트루먼대통령의 친서를 가지고 방문한 해리먼(Averell Harriman)주소대사에게 스탈린은 “만일 미국이 일본[점령]으로부터 소련을 제외할 방침을 취한다면 그것으로 좋다. 이것으로 각 전승국은 각자가 점령한 지역에서 자기의 방침에 따라 관리해도 좋다는 이야기가 된다”고 말했다.


미국은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개최된 모스크바 三相會議에서 남북한을 통일하기 위하여 미···소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안을 제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소련 몰로토프(Molotov)외상은 미·소 양국에 의한 신탁통치안을 제시하고 미국측은 거의 수정없이 소련안을 수락하였다. 소련의 신탁통치안은 두 점령지역의 독자적인 존속을 허용하고 있다. 두 점령지역의 폐지는 한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에야 가능했다. 소련안은 임시정부를 구성하는데 있어 좌익성향의 정당·단체를 충분히 참가시킬 것을 내포하고 있어 소련의 국익이 미국보다 우월하게 보장될 것을 예견하고 있다.


몰로토프안은 미국이 원하고 있던 신탁통치 실시를 받아들이는 듯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결국은 소련이 독자적으로 북한통치를 계속하고 신탁통치의 실제적인 시행을 막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놓았다.


실제로 소련은 1946년 3월 20일 서울에서 개최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쉬티코프(Terentii Fomich Shtykov)대표의 연설을 통하여 “소련은 한국(한반도)이 진실한 민주주의적 독립국가가 되기를 바라며, 소련과 우호적인 국가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리하여 한국이 향후 소련을 공격할 기지가 되지 않기를 요망한다”라고 천명하고 미·소공동위원회 회의 기간 중 시종일관 소련의 신탁통치안인 모스크바협정을 반대한 민주주의 인사들의 임시정부 참여 배제를 주장하였다.


스탈린은 제정 러시아의 짜르처럼 2차대전후 만주와 한반도 전체를 소련의 안보를 위한 완충지대(Buffer Zone)로 간주하고 세력균형자로서의 위치를 유지하려 하였으나 2차대전후 미·소관계가 악화되어 가자 한반도가 소련 공격기지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현재 점령하고 있는 지역인 북한지역에서 친소정권을 수립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판단을 하였다.


소련측 입장에서 볼 때 친소위성국가를 북한지역에만 수립하는 것은

(1) 2차대전 종료 後 내부 검토를 한 바 있는 한반도 전체 지배에는 이르지 못하지만 1896년 로바노프 – 山懸(Lobanov – Yamagata) 협정으로 39도선을 경계로 하여 한반도를 일본과 분할한 것에 비하여는 유리하고

(2) 한반도가 극동에서의 소련 국가이익의 부차적 목표임에 비추어 소련이 세계 최강의 유일 핵보유국인 미국과 대결을 하지 않고 극동에서의 소련 국가이익의 핵심인 만주지역을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완충지대를 확보할 수 있고

(3)국경을 맞대는 한반도 북반부가 對蘇 攻擊基地가 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고

(4)소련 점령군이 북한내에 있는 일본 군수ž중공업 시설을 대일 전쟁 참전대가로 몰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선택할 수 있는 차선의 대안이 될 수 있었다.


1945년 가을 개최된 런던 외상회의가 일본 및 동구 관리문제에 대한 미국과의 의견대립으로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자 소련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조약을 위배하면서 중국 공산당과의 연계를 강화, 군사지원을 하기 시작하고 한반도 분단을 고착, 북한 지역에 대한 공산화체제 구축을 추진하였다.


스탈린은 소련군사령부 소속의 연락장교단을 서울에서 철수시켰다. 9월 9일 서울에 진주한 하지(John R. Hodge)중장이 남북한 지역간 정책조정을 위하여 상호 연락장교단 파견을 소련군 치스차코프(Ivan M. Chistiakov)대장에게 제의한 바에 따라 소련측은 연락장교단을 9월 25일 서울에 파견하고 미국측은 9월 30일 평양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치스차코프대장은 10월 11일자 서한에서 “고위레벨에서의 정치·경제적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연락사무소가 필요없다”고 하면서 연락장교단을 철수시켰다.이후 미·소 양측사령부간 몇 차례 접촉이 있기는 하였으나 소련측은 미국측 인원들이 38도선 이북지역에 들어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명확히 하였다. 심지어 소련측은 미군차량이 옹진반도와 왕래하기 위하여 일 주일에 세번 소련점령구역을 통과하는 것을 일 주일에 단 한번으로 줄여버렸다.


스탈린은 1945년 10월 들어 북한 주둔 소련군사령부로 하여금 한반도 분단 고착화를 위한 조치를 취하게 하는 일방 한반도에서 스탈린의 명령에 충실한 지도자를 찾아내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33세의 김일성을 북한지도자로 지명하였다.


스탈린이 김일성을 지도자로 지명했다는 것은 김일성이 1945년 10월 10-13일 극비리에 개최되었던 조선공산당 서북5도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에 참석, “새 조선 건설과 민족통일 전략에 대하여” 題下 강령적 연설을 한 사실에 비추어 알 수 있다.


이어 소련은 1945년 10월14일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 민중대회를 개최하여 그를 대중 앞에 데뷰시키고 1945년 12월 17-18일 평양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 집행위원회를 개최, 당 책임비서로 선출한 후 북조선분국이란 이름 대신 북조선공산당이란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스탈린은 서울의 조선공산당 하부조직으로서의 북조선분국이 아닌 북조선공산당으로 개칭하여 김일성 중심의 공산당으로 새 출발시켰다. 소련 군정당국은 김일성이 당의 지도권을 장악케 한 후 1946년 2월 9일 극비리에 북조선 중앙주권기관으로서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 그를 위원장에 선출하였다.


1940년대에 스탈린의 후계자로 여겨져 왔던 쥐타노프(Zhdanov) 레닌그라드 당 위원회 제 1서기의 충직한 부하로서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하여 1945년 4월 이래 연해주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 1948년- 1951년 북한주재 소련 특명전권대사를 역임하면서 소련의 한반도정책을 입안하고 실천에 옮기는 과정에 주도적 역할을 한 쉬티코프의 「일기」를 검토해보면, 소련 군정이 모든 정책결정의 주도자 및 집행자로 등장하여 북한을 지도하며 계획을 관철시켜 나가는 정치 메커니즘을 잘 보여준다.


쉬티코프를 정점으로 하는 북한주재 소련군 사령부는 정책결정과정에서 주도적이면서도 최종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다. 2차대전 종료 후 북한의 정치드라마는 쉬티코프의 책상에서 기획되어 연해주 군관구와 북한주재 소련군 사령부 지도자들과의 회의에서 확립되면 모스크바의 재가를 얻은 후 북한지도부를 독려하여 기획자의 의도에 충실한 북한인 출연자를 선발하고 기획자의 최종적 결재를 맡아 진행되는 것이었다.


북한은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창설, 4월 29일 북조선인민회의 특별회의에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초안 승인, 8월25일 최고인민회의 선거, 9월 8일 헌법 채택, 9월 9일 공화국 정부수립 선포와 같은 順으로 정치 드라마를 진행하게 되는데 이러한 모든 일들이 소련의 기획과 적극적 추진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더 이상 상세히 언급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북한의 김일성체제는 대부분의 동구 공산국가들의 지도체제와 같이 스탈린의 의도대로 소련의 치밀한 계획과 지원에 의하여 성립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국제환경 변화와 6.25전쟁에 대한 소련의 전략적 의도]


스탈린은 소련 주도로 한반도 북반부에서 공산화체제를 구축하고 있었지만 1950년 1월까지는 세계 제2차대전 기간 중 미국 등 연합국과의 합의에 의하여 정한 경계선을 넘어 남한에 까지 적극적으로 소련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오히려 무력에 의하여 통일을 성취하려는 북한 지도자들의 주장을 거부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옐친대통령이 1994년 6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영삼대통령에게 제공키 위하여 6.25전 개전에 관하여 정리한 216건의 소련측 문서에 의하면,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무력통일을 위한 대규모 남침의사를 최초로 밝힌 것은 1949년 3월5일 모스코바에서의 스탈린 김일성간 회담에서 김일성이 무력통일을 위한 남침에 대한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에 대하여 스탈린은 한국군과 한국주둔 미군규모, 남북한 군대의 優劣을 질문한 후 북한군이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답변하고 남한에 미군이 아직도 주둔하고 있음(소련군은 1948년12월 북한에서 철수)과 미 소간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를 상기시켰다. 또한 스탈린은 북한의 남한에 대한 공세적 군사활동은 남한의 북한 침공을 반격하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남침을 승인하지 않았다.


북한측은 1949년8월12일 김일성 쉬티코프대사 면담 및 9월3일 김일성의 로어통역관 문일과 툰킨(Tunkin)공사 면담 시 1949년7월 남한에서 미군이 철수한 후 38선은 이미 그 의미가 상실되었다고 하면서 대남 전면 공격과 최소한 옹진반도 점령 계획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9월11일 스탈린은 김일성의 요청이 대부분의 주한미군이 철수한 시점에 제기되었음을 감안하여 호의적 관심을 보이면서 김일성을 조속히 면담, 8월12일 및 9월 3일자 북한측 제의 사항과 관련하여 남북한의 정치 군사정보와 현지 대사관 의견을 보고토록 지시하였다.


9월14일자 전문 보고시 툰킨공사는 9월12일과 9월13일 김일성과의 면담시 김이 종전과는 달리 확신을 주지 못하는 어조로 현 상황에서 속전속결에 의한 승리는 期待難望이므로 전면전을 早期에 개시하는 대신 옹진반도와 해주인근까지를 점령할 것을 제의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아울러 동 공사는 인민군이 남침시 남한내 빨치산의 지원을 받는다고 하여도 신속히 승리할 만큼 강하지도 못하고 미국의 강력한 군사개입으로 전쟁이 장기화될 것이므로 남침이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다는 현지 대사관 의견을 보고하면서 옹진반도 점령과 같은 제한적 작전 수행이 내전으로 확대되지 않더라도 이는 미국의 성공적 反蘇캠페인에 이용되어 소련에 유익하지 않으므로 가치가 없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평양주재 대사관의 보고를 받고 소련공산당 정치국은 9월24일 평양주재 대사에게 하달한 훈령에서 남한내 빨치산 활동 강화계획은 승인하되, 전면적 남침이나 옹진반도 점령작전은 미국의 개입으로 분쟁이 장기화됨으로써 통일이 지연될 것이라는 이유로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옹진반도 점령도 남한의 공격이 있을 경우 이들이 북한 영역으로 들어오도록 한 뒤 반격작전을 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해가 바뀌어 1950년 1월17일 북경향발 이두연 북한대사를 위한 박헌영 외상주최 오찬시 김일성은 소련대사관원들에게 이제는 중국의 통일이 완료되었으므로 남한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언급하면서 그 동안 남한측의 대북한 공격이 없었기 때문에 1949년3월5일 스탈린에게서 승인을 받은 반격형태로서의 대남공격을 할 수 없었으므로 남한해방을 위한 인민군의 대남 공격 승인을 받기 위하여 스탈린을 방문할 것을 제기하였다.


김일성은 이어 “자신이 공산주의자이며 상부의 규율을 지키는 사람이며 스탈린이 그에게 법이기 때문에 [그의 승인 없이는] 공격을 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김일성의 상기 언급 내용을 청취한 참사관급 2명의 소련외교관 이그나티에프(Ignatiev)와 페리센코(Pelishenko)가 이 문제에 대한 대화를 회피하고 일반 문제로 대화주제를 바꾸려 하자 김일성은 쉬티코프대사에게 접근하여 1949년 6월 모택동도 중국혁명이 끝나면 북한을 돕겠다고 약속한 바가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남한공격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스탈린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어 김일성은 3일만에 끝날 수 있는 옹진작전을 스탈린이 허가해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총공격시에는 몇일 내에 서울을 점령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으나 쉬티코프는 옹진작전은 불가능하다고 답변하였다.


스탈린은 상기 대화에 관한 쉬티코프의 비밀 전문을 비신스키(Andrei Vyshinsky) 외상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후 1월30일 쉬티코프대사에게 하달한 전문에서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그가 남한에 대하여 하고자 하는 큰 일은 많은 준비가 필요하며 위험이 없도록 잘 조직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김을 만나 동 문제를 의논할 용의가 있으며 그를 도울 의사가 있다”는 자신의 의사를 김일성에게 전달토록 지시하였다.


스탈린은 북경측과 한 차례 더 상의한 후, 2월 9일 군사적 방법으로 통일을 달성하겠다는 평양측의 의도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의사를 표명하면서 한반도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의 준비를 시작해도 좋다고 허락을 하였다. 그 후 소련은 북한을 향해 탱크, 탄약, 군장비, 대포, 의약품 및 석유 등을 적극적으로 공급하기 시작하였다.


스탈린은 자신이 선택한 시기의 6.25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1950년 2월과 3월중 북한내 전쟁준비를 감독하기 시작하였다. 2월 4일 김일성은 북한의 추가 창설 3개 보병사단용 무기 구입을 위하여 1951년도 소련의 대북한 차관을 1950년도 중에 사용할 수 있도록 스탈린의 허가를 구해줄 것을 쉬티코프대사에게 요청하고 3월 9일 추가로 1억 2천-5천만 루불 상당의 무기 구입을 요청하는 공한을 쉬티코프대사를 통하여 소련 정부에 송부하였다.


이에 대하여 소련측은 3월 12자 비신스키외상의 쉬티코프대사앞 전문과 3월 18일자 스탈린의 김일성앞 메시지를 통하여 동의하였다.


또한 스탈린은 2월 23일 쉬티코프대사가 겸직하고 있던 북한인민군 군사고문단장직에 전쟁영웅 바시리에프(Vasiliev)중장을 임명하였다.


러시아정부가 한국정부에 제공한 소련측 비밀문서는 김일성과 박헌영이 1950년3월30일 평양을 떠나 [모스크바를 방문한 후] 4월25일 평양으로 귀환하였음을 밝히고 있지만, 상세 모스코바 체류 일정과 스탈린과의 대화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스탈린과 김일성간의 대화시 스탈린이 강조한 내용은 5월 김일성이 방중하여 남한공격에 대한 스탈린의 방침을 설명하자 모택동이 이를 스탈린에게 확인하는 전문을 타전한 데 대하여 스탈린이 답변을 해주는 5월14일자 전문에 나타나 있다.


스탈린은 1950년 4월 모스코바 회담에서 김일성에게 국제환경이 변하고 있다고 하면서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데 동의하되 이 문제의 최종 결정은 중국과 북한이 함께 내려야 하며 만일 중국측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 질 때 까지 이 문제의 결정을 연기하자고 제의하여 북한측과 합의하였다고 하면서 김이 모택동에게 설명한 내용을 확인해주었다.


스탈린은 북한의 남침을 승인하면서 중국을 한국전쟁에 끌어들였는데, 이는 소련이 직접 싸우지 않고 중국을 내세우려는 의도였다.


스탈린은 김일성이 끈질기게 남침승인을 요청하였기 때문에 승인을 한 것이 아니라 1949년 수차에 걸친 김일성의 남침 승인 요청을 거부하였던 것처럼 당시 국제정세와 한국전 개전시 소련의 손익을 면밀히 계산한 기초 위에 남침을 승인하는 결정을 내렸다.


스탈린이 1949년 기간 동안 계속 김의 남침승인 요청을 거부하고 38선에서의 무력충돌이 전면전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쉬티코프대사로 하여금 철저히 감독을 하도록 10월 이후 수차에 걸쳐 지시하였던 것과는 달리 태도를 바꾸어 1950년 1월30일자 전문에서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게 된 이유를 밝히는 자료로서는 상기 5월 14일자 스탈린의 모택동앞 電文과 “변화된 국제환경”에 대한 스탈린 자신의 설명을 수록한 보고서가 있다.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승인하게 된 스탈린의 “변화된 국제환경”의 첫번째 요소는 국제정세 일반에 대한 스탈린의 인식이다. 그는 중국에서의 공산당 승리, 소련의 원자탄 획득(1949년 8월 첫 실험),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군사개입 의지 약화 등으로 인해 공산진영의 힘에 자신감을 가지면서 상대적으로 미국의 힘을 낮게 평가하고 공산 진영의 동향에 대한 서방권의 반응에 덜 개의하게 되었다.


두번째 요소는 1월 12일 한국이 미국의 방위선 밖에 위치한다고 한 애치슨(Dean Acheson) 국무장관의 새로운 방위정책 선언이다. 만일 미국이 한국방위를 분명히 하였다면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번째 요소는 1950년 1월 중 구체화되어 가고 있던 모택동과의 중ž소동맹조약 체결이다. 동 조약의 前文에 밝힌 바와 같이 양국간의 동맹은 공산진영에 대한 반대세력에 국제적 차원에서 공동 대처하기 위한 것으로서, 중국 공산혁명, 소련의 원자탄 확보와 아울러 2차대전후 확대되고 있는 공산진영의 勢를 과시할 수 있는 것이었다.


러시아대통령실 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는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에 관한 구 소련공산당 국제부 보고서는 “변화된 국제환경”에 대한 스탈린 자신의 설명을 기술하고 있다. 그는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중국이 북한을 도울 수 있게 되었으며 중·소 동맹조약, 소련의 원자탄 보유로 미국이 아시아지역에서 공산주의에 도전하는데 더욱 주저하게 될 것이라고 김일성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1월에 발표된 애치슨선언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다.


미 행정부는 1949년 8월 소련의 원폭 실험 성공, 10월 중국공산정부의 수립 등 국제환경 변화에 대처하기 위하여 1950년 1월 NSC68과 같은 對蘇戰略을 검토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배경에서 그 동안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평가하였던 한반도에서 6월 북한군의 남침이 있자 즉각적인 지원에 나섰다. 미국은 북한의 남침이 서독, 이란 등 다음 목표에 대한 공산진영측의 공격으로 이어지는 소련의 세계적화전략의 일환으로 보았다.


요약하면, 스탈린이 1950년 1월30일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승인한 배경에는 스탈린 자신이 설명하고 트루먼 행정부가 우려한 바와 같은 1949년 기간 중에 있은 국제환경 변화가 그 원인을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소련이 미국과 함께 원자탄을 보유하게 되고 중국공산혁명의 성취로 아시아지역에서 전략적 상황이 공산권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시기에 미국이 한반도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음을 선언하자 스탈린은 세계적화전략의 일환으로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고 이러한 견해가 이제까지 전통적 견해가 되어왔다.


따라서 1949년 기간 중의 국제정세 변화는 스탈린이 6.25전쟁을 일으키는 계기도 되고 미국이 공산진영의 팽창을 저지하는 차원에서 그 동안 전략적으로 輕視해왔던 한국에 대하여 즉각적 지원을 제공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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