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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1-29 14:2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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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무역 활발했던 고려시대의 경제 인프라가 조선시대보다 훨씬 우월했을 것이다
-고려 이전과 조선 시대의 결정적인 차이는 우리 역사에서 ‘바다’가 존재하느냐의 여부
-조선시대 정책 논의가 공리공론에 빠진 결정적인 역할을 한 주역이 조광조 등 사림파

조선시대 초기 태종~세종 대의 국운 융성이 왜 두번 다시 재현되지 못하고 조선은 줄곧 국력 하락이 이어진 끝에 결국 나라를 잃게 되었을까? 저는 지금까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비교가 좀 잘못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일반인들의 인식에서 고려시대는 구체적인 이미지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조선시대의 경우 갓쓰고 흰 도포 입고 다니던 선비의 이미지가 딱 머리에 떠오르는데 고려시대는 그런 게 없습니다. 그냥 책에서 읽은 원나라의 침공, 왜구의 발호 그리고 승려들의 횡포와 무신정권의 막장과 혼란, 공민왕의 에피소드 등이 고려의 이미지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고려는 조선시대보다 훨씬 더 상황이 좋았을 것으로 봅니다.
 
고려시대는 대외무역이 활발했던 시기입니다. 고려가요 [쌍화점]에서 ‘회회 아비가 내 손목을 잡더라’ 어쩌구 하는 묘사가 나오는데, 회회아비가 바로 위구르 족이라고 합니다. 즉, 외국인들이 들어와 고려 여인의 손목을 잡고 희롱하는 것이 유행가 가사에 천연덕스럽게 올라올 정도로 개방된 시대였다는 얘기입니다. 조선시대 같으면 정권이 무너졌을 일이죠.
 
저 외국인들은 대부분 국제 무역상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일 것입니다. 실제 당시 예성강 일대가 국제 자유무역지대 비슷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압니다. 굳이 예성강 지역뿐만이 아니라 고려시대 국가 전체가 대외 교역에서는 무척 자유로웠던 것이 확실합니다.
 
저는 고려 이전과 조선 시대의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우리 역사에서 ‘바다’라는 공간이 존재하느냐의 여부라고 봅니다.
 
고려시대에도 바다라는 공간은 그냥 피난처 또는 왜구의 침입 루트 정도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삼별초가 강화도를 버리고 진도로 옮겨갔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큽니다. 당시 진도에는 최씨 정권이 소유한 대규모 농장이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그냥 농장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농작물 등을 거래할 수 있는 해상 교통망 나아가 국제 무역 네트워크의 존재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제주도 역시 그 네트워크에 포함됐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겁니다. 삼별초가 진도와 제주도를 근거로 항쟁을 이어갈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지역의 경제적 인프라 그리고 해상교통 네트워크가 그만큼 발달했다는 증거라고 봅니다.
 
장보고의 청해진(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기반으로 국제 무역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전부터 오랫동안 축적돼왔던 해상 무역의 경험과 교통 인프라, 인적 노하우 등이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합니다. 저 모든 것을 한 개인의 힘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고려 말엽에 왜구의 남해안 침입이 기승을 부렸던 것도 따지고 보면 평상시에도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왕래가 활발했다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임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등 기록을 보면 장군이 당시 호남 남해안 일대 어민 등의 지혜를 많이 참고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조선시대 들어와 엄격한 해금(海禁) 정책으로 국제무역 등이 진행되지는 못했지만 몇 천년 동안 그 지역에서 쌓여온 해상 교통의 노하우 등이 그대로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한반도는 육지보다도 바다를 통해서 훨씬 많은 무역 거래와 생활 그리고 역사가 진행되는 곳이었다고 봅니다. 일본에 남아있는 한반도 문명의 흔적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 범위는 일본 외에도 중국 해안지대와 동남아 일대 나아가 인도까지 이어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조선시대는 이 거대한 공간을 전력을 기울여 역사에서 삭제해버린 시기입니다. 유교 이념과 나아가 명나라의 영향력 때문이었죠. 한국인들이 비좁은 반도에 갇혀서 악착같고 옹졸하고 가까운 이웃을 먼저 공격하는 심성을 갖게 된 출발점이 바로 조선시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바다를 향해 열린 가능성을 마주하게 되면 그런 심성을 갖기 어렵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유물에서도 고려 시대의 물적 풍요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고려청자의 화려한 미적 감각과 소박한 이조백자를 비교해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건 그냥 취향의 차이가 아닙니다.
 

▲ ‘청자 음각연화절지문 매병(靑磁 陰刻蓮花折枝文 梅甁)’ [사진: 문화재청]


도자기 산업은 지금의 반도체나 스마트폰 산업과 비견할 수 있는 첨단 산업이었습니다. 그런 첨단산업의 생산물이 단순히 미적 취향 때문에 저렇게 소박해질 수는 없습니다. 아니, 실은 경제력의 추락 때문에 미적 취향이 소박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하는 게 맞을 겁니다.
 
팔만대장경을 보십시오. 조선시대에 그것에 비견할만한 거대한 국책 프로젝트를 한 적이 있나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금속활자나 최무선의 화포 등도 고려시대 전반의 경제력과 기술력의 뒷받침이 없었으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조선시대 초기 태종과 세종 대의 번성은 물론 두 영명한 지도자의 능력도 중요했겠지만 결정적으로 고려시대의 물적 인프라에 부분적인 개혁을 가해서 이뤄진 성과라고 봅니다. 세종 대의 과학 기술적 발전이나 대외 군사력의 행사도 조선시대 일반의 분위기와는 동떨어진 현상입니다.
 
고려 말기에 불교 사원의 횡포 그리고 귀족들의 토지 겸병으로 인해서 민중들의 삶이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었고 이것이 유학 이념으로 무장한 신진 귀족들의 개혁을 요구하는 상황이었다고 봅니다. 조선 초기는 그런 개혁의 효과가 극대화된 시기였고 그것을 체계화한 것이 정도전의 국가 설계안이었겠죠. 태종과 세종 당시가 바로 그 시기였구요.
 
하지만 무역을 금지하고, 상공업을 억압하고 말도 안되는 도덕 정치가 계속되면서 조선 초기의 개혁효과는 사라지고 이념과 체제의 중압감이 조선의 혁신과 부국강병의 가능성을 모두 압살했다고 봅니다.
 
바다라는 공간을 기껏해야 세곡선 나르고 어부가 생선 잡는 현장 정도로 비하했죠. 역사적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바다는 어업의 현장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거대한 무역의 공간이었습니다. 바다와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비하하는 체제는 폐쇄적이고 쇠퇴하는 기운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조선시대 조정의 정책 논의가 공리공론에 빠진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조광조 등 사림파였다고 봅니다. 훈구파는 그나마 고려시대의 실용주의적 영향이 살아있었는데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가 등장하면서 조선의 국정은 실사구시와 민생 및 부국강병의 추구가 아니라 그냥 예송논쟁과 유교 도그마의 아무말 대잔치로 전락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조선 시대의 경제적 인프라가 고려나 심지어 통일신라, 삼국시대보다 후퇴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봅니다. 백제 의자왕이 일본에 선물한 바둑판을 보세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조선 시대는 고려시대까지 이어져온 한반도의 물질 생산의 인프라가 완전히 붕괴한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태종과 세종대의 융성이라는 것도 그런 점에서 재평가해야 하지 않을까요?



[덧붙이는 글]
['제3의 길' 轉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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