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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2-03 11: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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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련으로 가는 일행은 네 명이었다. A사의 A사장, 선경의 B이사와 C차장 그리고 D잡지사의 D기자(나).

떠나는 날짜는 1991년 7월 초순이었다. 대충 기사를 마감하고 김포공항으로 나간 것이 10일 전후가 아닐까 짐작한다. 또, 10박 11일 현지 취재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서 한 달쯤 지났을 때 쏘련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던 기억으로 미뤄봐도 대충 그때쯤이 아닐까 싶다.

김포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할 때 문제가 생겼다. 당시만 해도 쏘련이 공식적으로는 적성국가였기 때문에 출국자에게 병역 관련 증명을 요구했는데, 나에게도 예비군 관련 서류를 요청했던 것이다.

나야 특별히 예비군 훈련을 빠진 일이 없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될 게 없었는데, 문제는 여행 수속을 맡았던 여행사 실무자의 실수로 나에게 사전에 이런 서류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전혀 말해주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비행기 탑승 시간은 다가오는데 다시 거주지 동사무소로 가서 서류를 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요즘같은 인터넷 서류 발급 따위는 생각도 못할 시절이었다. 하긴 요즘에야 그런 서류 자체를 요구하는 일도 없지만.

나는 난생 처음 떠나는 해외여행이나 비행기 탑승 모두 물거품이 되나보다 생각하면서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이야 내 책임은 아니니 마음편하게 A사장과 B이사, C차장에게 잘 다녀오라는 인사나 해주고 사무실로 터덜터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던 A사장이 나를 매섭게 몰아붙였다.

“아니, 기자란 사람이 이런 상황에서 그냥 손놓고 남의 일 보듯이 그렇게 주저앉아 있으면 어떻게 해요? 되든 안되든 여기저기 쫓아다니면서 하소연도 하고 그러면서 일이 되도록 만들어야지, 지금 뭐하는 겁니까? 그런 자세로 평소에 취재는 어떻게 합니까?



▲ 아르바트 거리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모스크바 거리를 걸으면서 찍었던 사진의 하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무안했고 너무 적나라한 지적이 내심 불쾌하기도 했지만 솔직히 100%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지적이었다. 나는 일단 그 지적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물어보았다.

“아니, 도대체 어디를 어떻게 찾아가서 얘기하라는 겁니까? 그거라도 가르쳐주셔야죠.”

A사장은 한심하다는듯이 나에게 “그건 나에게 묻지 말고, 애초에 병역관련 서류를 제시하라고 한 공항직원에게 물어보세요. 그 사람이 실무자니 그 사람이 그 문제의 책임자도 알 것 아닙니까?” 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듣고보니, 그것 역시 맞는 말이었다. 나는 애초에 출국 수속을 처리하려 했던 창구를 찾아가 “누구를 찾아가서 이 문제를 상의하면 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김포공항에 안기부 출장소가 있는데, 거기에 가면 담당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안기부라… 솔직히 말해 듣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고 공포감이 생기는 이름이었지만 이것저것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나는 창구 담당자에게 안기부 출장소의 위치를 물어 그리로 찾아갔다.

안기부 출장소에는 달랑 중년의 사내 혼자서 지루한 표정으로 책상에 앉아 있었다. 분위기나 인상 모두 대공전선의 첨병에서 국가의 안전을 기획하고 실무를 담당하는 사명감과는 거리가 있어보였다. 그런 분위기 때문에 나는 좀 마음 편하게 내 사정을 그 중년의 사내에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중년의 사내는 별 관심도 없이 내 얘기를 듣더니 내 주민등록증과 명함 등을 요구했다. 그걸 보고 나더니 내게 서류 한 장을 내어주면서 그 양식을 채우라고 했다. 양식이라야 별 게 없고 그냥 무슨무슨 사유로 어느 나라에 가는데 아무튼 사고치지 않고 잘 다녀오겠다는 것을 다짐하는 내용이었다. 그걸 작성해서 제출하니 그 사내는 다시 무슨 서류 한 장에 뭔가를 써서 날인하더니 내게 건네면서 “출입국 수속 창구에 제출하라”고 일러주었다.

그걸 갖다 내는 것으로 내 병역서류 문제는 그냥 해결됐다. 허무할 정도로 우스운 절차였다. 그런데 이런 절차가 사람을 잡을 수 있다니… 게다가 이런 식으로 해결하면 된다는 사실을 공항 출국수속 창구 직원은 왜 전혀 말해주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걸 따질 만큼 한가하지는 못했다. 나는 다른 일행들과 함께 급하게 출국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비행기 좌석에 앉아서 주위의 승객들을 살펴보니 우리나라 사람과 러시아인들이 거의 반반 가량이었다. 물론 그 비행기 안 서양인들은 거의 대부분 러시아인이라는 전제를 깔고 하는 얘기다. 내 바로 앞좌석에도 러시아인들이 앉아있었다. 신기하게 둘러보는데, 흔히 노린내라고 말하는 냄새가 역하게 코를 찔렀다. 나는 옆 자리 A사장에게 무심코 말을 건넸다.

“아, 말로만 들었는데 러시아 사람들 정말 냄새가 지독하네요.”

그러자 A사장은 나에게 예상치 못한 두번째 타격을 안겼다.

“이 사람들 다 듣습니다. 그런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그리고 이 사람들에게는 한국 사람 냄새가 향기로울 것 같아요?”

기억이 정확하지 않아 설마 저렇게까지 신랄한 표현을 썼을까 싶기는 하지만 아무튼 A사장의 지적은 날카로웠고, 나로서는 여행 출발부터 뭔가 사정없이 짓밟힌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저조하게 가라앉았던 내 기분은 비행기가 이륙하고 눈 아래 생전 처음 보는 전망이 펼쳐지면서 눈 녹듯이 사라졌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와 들판, 길거리의 모습이 나를 매료시켰다.

무엇보다 압권은 비행기가 쏘련 경내로 들어가면서 눈 아래로 펼쳐지는 시베리아 평원의 모습이었다.

잘은 몰라도 아마 7월 하순쯤이 시베리아 평원이 일년 중 가장 푸르고 가장 풍요로운 시기 아닐까?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는데, 그때 내가 탄 비행기는 동해로 빠져 러시아 경내로 들어가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코스를 타고 날아가고 있었다. 그건 정말 두번 다시 누리기 어려운 내 눈의 호사였다.

비행기 창 아래로 초록색 초원이 끝없이 펼쳐졌다. 그냥 푸른색이었다. 다른 색이라면 그 푸른 초원 사이를 구불구불 꿰뚫고 흐르는, 초원보다 더 짙은 파란색 강줄기들 그리고 선연한 황토색으로 마치 혈관처럼 여기저기 뻗어있는 도로의 광채 뿐이었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황토색 길도 그리 자주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거의 대부분은 오직 파란 초원과 강줄기였다. 그런 초원 위를 비행기는 몇 시간이고 계속 날아갔다.

아마 그 역방향 즉 동쪽으로 날아가는 코스라면 그렇게 오랜 시간 마음껏 초원의 모습을 감상하지는 못했으리라. 하지만 비행기가 태양의 이동과 같은 방향을 향해 날아갔기 때문에 나는 마치 태양의 엄호를 받는 것처럼 그렇게 길게길게 서쪽을 향해 날아가며 한없이 그 초원의 향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실 수 있었다.

실제로 그래본 적은 없지만 마치 경비행기를 타고 풀밭 위를 아주 낮게 저공비행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시베리아 초원이 마치 넓은 운동장이고 나는 그 위 십여 미터 위를 기분좋게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비행기 타는 것을 좋아한다. 그 뒤 미국으로 12시간 이상 그것도 깜깜한 밤에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을 날아갈 때도 나는 무조건 좋았다. 일행들이 모두 녹초가 되어 잠들어도 나는 굶주린듯이 비행기 창가에 늘어붙어 창밖의 모습을 살피곤 했다. 멀리 비치는 달과 별, 그리고 창가 가까이 스쳐지나가는 구름을 들여다보곤 했다. 눈 아래 저 멀리 바다의 모습도 내게는 지칠 줄 모르는 감동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1991년 7월 내가 서쪽으로 날아가면서 본 그 시베리아 대초원의 모습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나는 그렇게 쏘련으로 들어갔다.




[덧붙이는 글]
['제3의 길' 轉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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