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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2-12 03: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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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싸이코들의 돌발 행동으로 여겨졌던 사건들을 이제 일반인들이 저지르는 시대
-죽은 남편에 대한 신뢰와 생명의 기회를 교환하지 않는 여인에게서 희망을 발견한다
-노인들은 모든 것이 변했다는 것을 알지만 남은 사람들의 삶에 대해 말하지는 않는다


▲ 모스의 아내는 죽은 남편이 자신을 배반했다는 살인마 쉬거의 말을 믿지 않고 목숨을 건지기 위한 동전의 선택도 거부한다. 암울한 색조의 이 영화에서 이 여인은 거의 유일하게 죄악과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희망을 보여주는 캐릭터이다.


어떤 사람이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고서 이 영화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상당히 난감해 한다. 특히 그 제목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고 한다. 과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나도 이 영화의 제목을 인터넷에서 처음 보았을 때 그게 궁금했다. 대충 스토리를 보니 비교적 잔혹한 스릴러물 같은데…

 

이 영화에서 ‘노인’이란 아마 과거의 질서, 이 세상이 비교적 확실하고 안정된 질서 위에서 움직이고 있던(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었던) 그 시대를 상징하는 것 아닐까?

 

이 세계가 비록 문제가 많고 끔찍한 일도 많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이고 특이한 싸이코들(그런 싸이코들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조금씩은 있는 것이니까)에 의해 드물게 저질러지는 일들이고,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특별히 실수를 하거나 특별한 운명의 저주에 빠지지 않는 한 그런 끔찍한 일에 부닥칠 일 없이 평온하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그런 믿음을 말하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이 영화 제목의 ‘노인’은 그런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믿음이 사회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던 세대, 나아가 그런 믿음 자체를 말하는 것 아닐까…? 나는 그 사람에게 이런 내 나름의 해석을 들려주었다. 알쏭달쏭해하는 그의 표정을 보면 내 해설(이라기보다 추측 또는 짐작)에 동의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이 영화를 직접 보기로 한 것은 나름대로 그런 나의 추측을 확인해보고 싶은 이유도 있었다. 같이 영화를 보기로 한 사람들이 과연 이런 영화를 좋아할 것인지 별로 자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정말 좋은 영화라면 사람에 따라, 그의 안목의 훈련 정도에 따라 약간의 거북함이 있을지라도 크게 원망을 듣지는 않을 것 같다는 믿음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처음부터 일종의 선입견을 갖고 본 때문인지 영화의 메시지는 내가 애초에 짐작했던 것처럼 다가왔다. 영화 시작 부분 보안관 벨의 독백은, 역시 보안관이었던 자신의 아버지와 그의 동료들에 관한 일화를 전해주는 부분에서부터 지금의 시대와 과거의 시대의 간극과 거리감을 토로한다. 요즘 살인은 특별한 이유조차 없어… 너무나 변해버린 지금의 세대를 바라보며 과거의 세대들이 느끼는 거리감과 공포, 이질감 등을 표현한다.

 

영화 도입부에서 살인마 안톤 쉬거가 젊은 보안관을 죽이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도 가장 길고 자세하게 살인의 장면을 보여준다. 살인마의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 평소 ‘제도화된 폭력’ 즉 공권력을 상징했던 젊은 보안관의 저항은 무기력하기만 하다. 그 폭력 앞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몸부림과 그 몸부림이 무력하게 좌절하는 모습이 처절하다. 이 장면이 바로 이 영화가 묘사하고자 하는 현실, 이 세대을 압도하고 있는 그 잔인한 질서를 압축해 보여주었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 사회에서 가장 위력적인 폭력이자 나름대로 가장 합리적인 형태로 조직된 폭력인 공권력이 무기력하게 짓밟히는 모습이 바로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이 세대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사막에서 사냥을 하던 카우보이 르웰린 모스는 죽어 널부러진 히스패닉 갱단들의 시체를 발견한다. 마약 거래를 하다가 서로 총질을 하고 모조리 쓰러진 것이다. 총에 맞아 죽어가던 갱 한 사람은 모스에게 물을 달라고 애원한다. “물 같은 건 없어”라며 외면한 모스는 좀 떨어진 곳에서 또 다른 시체와 빳빳한 달러로 가득찬 가방을 발견한다. 가방을 들고 컨테이너 주택으로 돌아온 모스. 아내에게도 자세한 얘기를 하지 않았던 모스는 밤에 자다 말고 일어나 부엌에 가 수통에 물을 담는다. 낮에 자신에게 물을 달라고 호소하던 그 히스패닉 갱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결국 이 행동이 모스를 치명적인 위험에 몰아넣는다. 현장에서 경찰과 마주친 것이다. 간신히 몸을 피하지만 자신의 차를 두고 왔기 때문에 신분 노출은 불가피하다. 아내를 멀리 떨어진 친정으로 보내고 그는 돈을 들고 피신한다. 그리고 그의 뒤를 살인마 안톤 쉬거가 쫓는다.

 

모스가 마지막까지 냉정함과 태도의 일관성을 잃지 않고 죽어가던 히스패닉의 호소를 기억에서 지워버렸다면 모스의 처지는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어쩌면 완전범죄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스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렇게 인간적인 감정에 흔들리는 순간 그는 치명적인 위험에 빠지게 된다. 그게 이 세계, 이 세대, 이 나라가 움직이는 질서이다.

 

안톤 쉬거가 사막의 주유소 주인 노인에게 동전의 앞뒷면을 알아맞히라고 강요하는 부분이 나에게는 이 영화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장면이었다. 쉬거가 땅콩을 다 먹고 내려놓은 봉지가 뒤틀리며 소리내는 모습은 쉬거의 희생자들이 잔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상징해 보여준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헐리우드 영화에서 우리가 익숙해진 영화적 장치들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장치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철저하게 배신한다. 영화의 주인공처럼 느껴지는 모스가 쉬거의 추격을 피해 살아남고 결국 그 돈을 안전하게 간직하는 식의 해피엔딩(?)을 우리는 습관처럼 기대하기 쉽다. 하지만 영화는 모스의 죽음조차 우리에게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보안관 벨이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목격하고 모스의 시체를 발견하는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그 시체조차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이것은 감독의 명백한 선택의 결과, 의도가 담긴 기법으로 느껴진다.

 

보안관 벨이 친구와 대화하는 내용은 과거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이 세상에 대해 기본적으로 갖게 되는 신뢰와 기대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몇몇 싸이코들의 돌발 행동이라고 여겨졌던 사건들이 이제 일반적인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다. 소수의 좀비가 아니라,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좀비가 되어버린 시대인 것이다.

 

한 줄기 빛조차 보이지 않는, 완전히 닫힌 상황을 보여주는 듯한 이 영화에서 내가 유일하게 어떤 희망의 메시지를 봤다면 그것은 마지막 부분, 쉬거가 모스의 아내조차 죽이는 장면에서였다. 이 장면은 쉬거의 폭력성이 가장 극단까지 치닫는 장면이며 쉬거가 나름대로 고수해온 ‘살인의 철학’이나 ‘살인의 원칙’ 같은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모스를 해치우고 돈까지 찾은 마당에 쉬거가 모스의 아내까지 죽일 ‘이유’는 없다. 모스의 아내도 그렇게 묻는다. “이럴 이유가 없잖아요?” 하지만 이것은 쉬거가 가장 싫어하는 대답이다. 쉬거는 바로 그 ‘이유’를 부정하기 위해 살인을 하고 특히 동전 던지기를 하여 그 결과에 따라 희생자의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그 ‘이유’란 것이 거부의 대상이며 살인 행각의 배경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쉬거는 그 이유, 이 세상이 의지하는 ‘합리성’과 대비되는 자신의 원칙에 의거해 살인을 한다. 자신이 모스에게 선택의 기회를 줬고, 모스가 좋지 않은 선택을 했기 때문에 그 선택의 결과에 따라 자신의 원칙을 충실하게 관철시킨다는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쉬거는 모스의 아내에게 이것을 설명해준다. 자신은 모스에게 아내를 살릴 기회를 줬고, 모스는 그 기회를 져버리고 아내를 배신했다고. 그리고 모스의 아내에게 역시 ‘선택’하라고 요구한다. 동전의 앞뒷면을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하지만 모스의 아내는 남편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쉬거의 말을 부인한다.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동전 선택도 거부한다. 그리고 쉬거에게 오히려 반박한다. “선택은 동전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해야 하는 것”이라고.

 

나에게 이 장면은 이 영화에서 유일한 희망의 메시지로 느껴졌다. 아내는 이미 죽어버린 남편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으며, 50%에 이르는 생명의 기회를 포기하고 살인마의 강요를 뿌리친다. 비록 모스의 아내는 죽었(겠)지만, 이것은 패배가 아니다. 영화 첫 부분, 주유소의 노인이 비록 목숨을 건지기는 했지만 쉬거의 압도적인 폭력과 공포 앞에서 굴복한 것과 대조적이다. 이 부분은 사람이 살았음에도 공포 자체였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여자는 죽었지만 그 장면은 희망이었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쉬거는 모스의 아내를 죽이고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팔의 뼈가 튀어나올 정도로 중상을 입는다. 자전거를 타고 다가온 소년들에게 돈을 주고 그는 소년의 옷을 사서 팔을 감싼 채 그 자리를 떠난다. 그의 뒤에서 소년들이 돈을 놓고 다투는 대화는 이 세상이 움직이는 질서 즉 합리성의 본질적 한계와 그런 한계가 필연적으로 쉬거 같은 괴물을 새로운 세대에서도 계속해서 낳을 것을 예고하는 것 같다.

 

영화 마지막 부분, 은퇴한 보안관 벨의 꿈은 이 영화의 전체 주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벨의 아버지는 아들을 버려두고 말을 타고 어두운 산길을 앞질러 가버린다. 아버지가 가진 등불은 그리 밝지 못하다. 아들은 자신도 이제 아버지에게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자신의 뒤에 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이 늙은 보안관의 꿈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이 세상이 결정적으로 변화했다는 사실을 느낄 뿐이고 자신은 그 세상을 바꿀 힘이 전혀 없다는 것을 느낄 뿐이다. 그리고 제목이 말하는 메시지가 다시 남게 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덧붙여>

 

(1) 영화를 보면서는 느끼지 못했는데, 이 포스트 쓰느라 등장인물들 이름 찾아봤더니 이 영화가 배경음악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왜 못 느꼈을까? ^^

(2) 영화를 보고 나서 비록 이 영화가 좋은 영화라 해도 사람들이 이해하기 그리 간단치 않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같이 영화 본 일행이 대개 동의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왜 인기일까? 아마 논리나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미국 애들이 현실 속에서 피부로 느끼는 어떤 현실감 같은 게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다.



[덧붙이는 글]
['제3의 길' 轉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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