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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4-16 16:07:36
  • 수정 2019-04-18 10:5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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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 11일 오후(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을 마치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내외와 환담하고 있다. 【워싱턴(미국)=뉴시스】


'완전한 비핵화'는 북한 핵 폐기이며 국제적으로 확립된 일반적 핵 폐기 절차는 '핵무기. 물질. 시설 리스트 신고'--사찰을 통한 검증'--불능화--폐기 순의 로드맵으로 진행됩니다.


북한이 이러한 핵 폐기 절차를 '강도적 요구'라고 주장하는 것은 핵 폐기를 하지 않으려는 속셈입니다.


구대열 이화여대 정외과 명예교수가 4월 11일 한미정상회담 결과를 보고 쓴 글이 제가 생각했던 것을 그대로 정리하였기에 여기에 게시합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에게 기대를 걸고 장시간 기차로 하노이를 간 김정은이나 비행기로 워상턴 디 씨로 간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 '노달'을 한 것이 닮았다고 쓴 것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김정은은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제의를 받아줄 것으로 확신하고 갔으며 문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 측근들을 직접 설득하고 미국 무기 수입이라는 환심을 사는 제의로 트럼프 대통령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국제질서와 국제적으로 확립된 절차가 지켜지기를 기대합니다. 김정은은 물론 문대통령도 북한 핵 폐기 협상과 최근 미.중 간 무역전쟁에서 보듯이 힘이 바탕이 된 국제정치의 현실을 배웠으면 합니다.


1년 동안 북한이 한국과 세 번, 미국과 두 번 정상회담을 하면서 ' 북한식 완전한 비핵화' 용어 합의로 마치 북한 핵 폐기를 할 듯이 상대방을 속이려고 한 것이 드러났는데도 또 '오지랖 중재자 행세말라'는 북한의 망신을 당하면서 국제적으로 확립된 절차를 바꾸려는데 동조하려는 당국자의 속셈이 무엇일까요?


진정으로 대화로 북한 핵 폐기를 하려면 남북한과 미국 당국자는 최소한 남북한이 합의한 '한반도의 비핵화에 공동선언'(1992.1. 20)', 미.북 제네바 기본합의문'(1994. 10.21), '9.19 6자 공동성명'(2005. 9. 19)을 읽어보고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대화로 북한 핵 폐기를 해결하지 못하게 되면 한국은 미국 핵 무기를 빌리거나 독자적으로 핵을 만들어야 합니다.


다음은 구대열 이화여대 정와과 명예교수의 글입니다. 구 교수는 이대(梨大)정외과 명예교수로 국제정치학 박사(런던 LSE)이기도 하며 한국일보 사회부, 외신부기자(한국일보 견습 22기)를 역임했습니다. 저서로는 “삼국통일의 정치학", "제국주의와 언론" 등이 있습니다.


[우리의 正義는 어디 쯤 있을까?-문재인 대통령의 訪美유감]


이번 문재인 대통령의 미국 방문((2019.4.11.)을 보면서 별의별 생각이 들더군요. 무엇보다도 ‘왜 가나?’, 그리고 ‘왜 갔나?’였습니다.
성과가 없을 게 뻔한데 대통령이 앞장서 왜 스타일을 구기나요?


60시간을 들여 평양에서 하노이까지 왕복 기차유람을 한 김정은과 닮았다고나 할까요?


김정은은 뭔가 큰 걸 건질 수 있다고 믿었고 또 북한에게는 경제여건상 시간이 절박했기 때문에 며칠간 철마 쇼를 벌였지만 문대통령의 태평양 나들이는 조금만 사려있는 인사라면 섹스피어의 코미디 ‘Much Ado about Nothing’(헛소동)처럼 씨끌벅적 소동을 벌였지만 아무것도 얻는 게 없을 게 뻔하지 않았던가요?


아니 미국에서는 별 주목을 끌지 못했으니 떠들썩하지도 않았지요. 그냥 우리에게 씁쓸한 여진만 남겼지요.


방문 전 미국에서 나오는 뉴스에서 긍정적인 것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현직 관료들은 물론이고 의회에서 조차 한미관계나 한국의 북한정책에 대해 불신에 찬 소식들 뿐이었죠. 심지어 문재인 정부가 그렇게 강조하던 상해임정 100주년 기념일인 4월 11을 회담일로 잡은 것부터 심상찮았습니다.


‘대한민국은 우리가 1945년 해방시켜 1948년 세워 준 나라인데 그걸 무시한다고?’라면서 문대통령이 방미를 원한다면 이 날 밖에는 시간이 없다고 했다면 지나친 추측일까요?


그런데 우리 대통령은 김정은이 즐기는 톱다운(top down) 방식으로 트럼프를 설득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톱다운 방식이란 정상적인 외교에서는 별종입니다.


실무진에서 사전에 모든 걸 조율해야죠. 정상(頂上) 간의 결정은 전시 등 긴급한 상황에서나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도,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보듯이, 루즈벨트나 처칠이 국무성이나 외무성과 상의 없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보좌관들이 실무자들의 견해를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미 국무성은 루즈벨트가 국무성의 의견을 타진하지 않았지만 ‘한국조항’은 미국의 외교전통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평하죠.


처칠은 한참 뒤에 엉뚱한 말을 합니다. 종전 후 ‘내 나이 74세가 되기까지는 한국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다(I'd never heard of the bloody place till I was seventy-four)’라고 말하죠.


처칠은 1874년생이므로 1948년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김정은이나 문대통령은 트럼프 한 사람만 ‘당신이 최고다, 당신이 노벨상을 받아야지’ 등 좋은 말로 추켜세우고 구워삶으면 관료들의 입장과는 다른 그들이 원하는 것들 얻을 수 있다고 믿은 겁니다.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던가요?
이젠 국제정치를 인간의 지식체계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봅니다.


사회과학이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초기 인류가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면 모든 별들이 제자리에 있는데 몇 놈만이 다른 별들 사이로 휘젓고 다니는 걸 알게 됩니다. 방랑자라는 planet(행성)입니다. 수, 금, 화, 목, 토성입니다.


인간의 지식체계는 이같이 자연과학, 인문학 등으로 나누어 발전된 것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축적되면서 발전된 것입니다. 사회과학은 ‘사회’의 덩치가 커져 인간의 관리능력, 즉 정치에서 벗어나 그 자체의 동력으로 움직이면서 태동합니다.


고대에는 세종이나 연산군 같은 군주 개인의 힘만으로 사회를 바꿀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산업혁명과 더불어 사회영역이 커지면서 정치가 사회를 완전히 장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 프랑스에서는 사회학(sociology), 독일에서는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 등이 나타나며 20세기 들어 미국에서 사회과학으로 통일된 것입니다.


국제정치는 다른 학문과는 다른 기본 개념체계가 있습니다.
물리학의 에너지나 경제학의 재화와 같이 힘/권력(power)이 기본 개념입니다.


국제사회에서 힘은 고유한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국제정치는 강대국들이 지배합니다. 한국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해박한 지식을 가진 김대중 대통령이 (아들) 부시 대통령에게 한국문제를 ‘강의’해도 듣지 않습니다.


부시는 미국의 관점에서 한국문제를 보기 때문입니다.


‘반미 좀 하면 어떻습니까?’라고 외치던 노무현 대통령도 미국에 다녀온 뒤로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미국이 설계하고 가꾸어 온 국제질서 속에서 경제성장을 이룩한 한국의 대통령이 말이 쉽지 ‘반미’ 좀 할 수 있던가요?


북한에 유류를 불법 선적한 선박문제도 간단치 않습니다.


일단 유엔리스트에 오르면 이에 관련된 한국 회사나 금융사, 은행들은 세계 금융망에서 차단됩니다. 그 결과가 무엇일까요? 망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이번에도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로부터 ‘강의’와 ‘훈계’를 좀 들었을 겁니다. 일제시대 중국에 있던 독립 운동가들이 장개석으로부터 ‘강의’와 ‘훈계’를 들은 것처럼 밀입니다. 트럼프처럼 논리적이지 못한 사람이 강의를 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러나 행동으로 보여주었을 겁니다. 단독회담 시간을 2분, 5분 준 것으로 충분한 강의가 되지 않은가요? 당신 말 듣기 싫다는 메시지 말입니다.


그러고 속으로는 ‘한국이 중재자라고? 중재를 아무나 하나? 비스마르크와 같이 오스트리아나 러시아보다 힘이 센 나라나 하는 것이지, 한국의 중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누가 손해를 본단 말인가?
잠자코 우리 편에서 거들고 따라오기나 해’라고 했을 겁니다.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은 우리가 북한에 제시할 수 있는 최고의 카드이죠. 핵 폐기에 대한 최소한의 보장도 없이 이걸 왜 쉽게 주어버릴 겁니까?


그 다음에는 뭘 줄 건데요? 미국이 한마디로 ‘안 된다!’했기에 다행입니다.


사회정의를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세분화되어 각 분야의 체계를 발전시켰습니다.


지금이라도 경제는 경제논리로 풀어가고 국제정치는 국제정치논리를 이해하며 풀어가야 할 것입니다. 19세기 영국은 ‘영국의 정의가 세계의 정의(British justice is world justice)’라고 했고 9.11 이후 부시는 ‘미국의 기준이 세계의 기준(American standard is world standard)’이라고 했습니다.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당태종은 황위를 위해 태자인 형과 동생을 죽이고 동생의 정처를 후실로 삼습니다. 그리곤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살해했다는 구실로 고구려를 침범하죠.


국제정치에서 정의라는 깃발은 허구죠.


러시아가 유럽의 이익을 위해서 터키와 싸우자고 했을 때 비스마르크는 '누가 유럽인데?(Who is Europe?)’이라고 반문합니다.


유럽을 내세워 러시아의 이익을 챙기려한다는 비판입니다.


미국과 영국의 2차 대전 후 한국의 ‘독립능력’을 논의할 때 미국은 미국의 전쟁노력에 기여할 수 있는 정도가 독립능력이라고 엉뚱한 기준도 내세우죠. 우리 편이 되어 적극적으로 우리를 도와야 독립을 주겠다는 겁니다.


모택동도 중간에 서서 양쪽을 저울질하지 말고 한쪽을 적극 지원하라는 일변도(一邊倒) 정책을 내세웁니다. 과연 이것이 정의일까요?


그러나 세계사는 실러의 말과 같이 이같이 힘이 지배하는 세계의 심판의 결과입니다.
(Die Weltgeschichte ist das Weltgericht.)
우리의 정의는 어디 쯤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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