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18-03-15 18:36:35
기사수정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 능력이 결국 인권과 자유, 민주주의의 대전제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북한체제에 대한 환상은 인류가 쌓아온 지혜와 경험의 축적 즉 문명 자체 부인하는 관점에서 출발
-자연에 대한 지배능력, 생산력을 극대화하는 것이 인류에 대해서 우리 사회와 개인이 짊어진 의무


<에스콰이어>란 매체에 라종일 선생의 발언이 소개됐다. 개인적으로는 이 분의 발언과 생각이 좀 한심하게 느껴진다.

 
이 분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기본적으로 동일하며, 둘 다 자연을 최대한 착취해서 최대 소비를 구현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행복으로 여긴다고 말한다.
 
생태주의적 관점을 기반으로 말하는 건데, 이 분이 간과하는 게 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 능력이 결국 인권과 자유, 민주주의를 낳는 대전제라는 사실이다. 표면적으로는 자연을 착취(?)해서 최대 소비를 하면서 인간이 행복하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물질적 생산력이 바로 인간을 자연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만든다는 것을 라종일 선생은 간과한다.
 
자연에 대한 지배능력이 없는 인간과 인간사회는 정확하게 그 정도만큼 자연에 의해 지배받는다. 자연에 의한 지배는 인간사회에서 현대인들이 흔히 가장 비인간적이라고 표현하는 형태로 현실화된다.
 
그게 뭐냐고?
 
인간을 자연의 한 요소 또는 부품으로서 쉽게 소모하는 것이다. 권력자의 장례식에 순장용으로 쓰이기도 하고, 기계를 대신해서 근력의 힘으로 온갖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일을 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심지어 권력자의 취향에 따라 맹수의 먹이로 던져지기도 한다.
 
인권은 인간의 생산력 수준과 정확하게 정비례 관계이다. 인간 사회의 생산력 수준이 낮다는 것은 한 인간이 생산해낼 수 있는 가치가 그만큼 보잘 것 없다는 얘기이고, 인간은 그가 생산해낼 수 있는 가치만큼 대접받는다. 이것은 인류 역사에서 한 치도 벗어나본 적이 없는 법칙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왜 인권 감수성이 예민해지고 심지어는 동물들의 권리에까지 관심이 이어지는 줄 아는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생산해는 물질적 가치가 커졌기 때문이고 평균적으로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생산해낼 수 있는 가치가 커졌기 때문이다.
 
이런 기본적인 전제를 무시하면 얼마든지 ‘북한 사회가 인류 문명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이 나오게 된다. 지금 주사파 등 북한체제를 빨아대는 사상의 기본 바탕이 바로 이것이다. 본질적으로 살펴보면 인류가 오랜 세월 쌓아온 지혜와 경험의 축적 즉 문명 자체를 부인하는 관점으로 간다.
 
간단히 말해서 반문명을 지향하는 세계관이라는 얘기이다. 그건 즉, 반인간을 지향한다는 것과 궁극적으로 같은 의미이다.
 

▲ 동물은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지만 인간은 이 세계를 재생산한다.


라종일 선생에게 묻고 싶다.
 
인류가 자연을 최대한 착취하는 게 안타까운가? 자연은 유한하기 때문에 그런 착취가 결국 인류문명의 종말을 앞당긴다고 보는가?
 
인간이 아무리 자연을 아껴쓰고, 착취하지 않는다 해도 본질적으로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자연을 변화시키는 존재라는 점이다. 즉, 동물은 자기 자신을 재생산할 뿐이지만 인간은 이 세계를 재생산하는 존재이다. 자연을 변화시키는 것이 인간의 근본 속성이라는 얘기이다. 이걸 포기한 인간은 더 이상 인간 존재가 아니다. 그냥 동물의 일종, 자연의 일부분일 뿐이다.
 
라종일 선생을 비롯한 생태주의자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지점이 그것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가장 비인간적인 상태 즉 인간 실종의 상태이다.
 
설혹 인류가 자연을 착취하지 않고 가늘고 길게 생존을 유지한다고 해도 결국 인간은 종말을 맞는다. 왜냐? 자연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결국 좀더 빨리 종말을 맞느냐 늦추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역설적으로 인간이 자연에 대한 지배능력을 극대화할 때 인간의 존재는 좀더 연장될 가능성이 크다. 인간이 자연에 대한 지배능력을 갖지 못할 때 인간은 자연에 잠재돼 있는 활용 가능성에 전혀 접근할 수 없게 된다. 즉, 분명히 존재하는 자원조차 활용할 수 없게 된다는 얘기이다.
 
인간이 자연에 대한 지배능력 즉 생산력을 극대화했을 때 인간의 생존 연한이 10억년이라고 가정하자. 그렇지 않았을 때는 오히려 1만년 이내로 줄어들 것이라고 본다. 지구에 잠재돼있는 자원을 활용할 지혜와 기술력 즉 생산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인류의 생산능력이 극대화될 경우 지구를 벗어나 또다른 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자연에 대한 지배능력, 생산력을 극대화하는 것이 인류 전체에 대해서 우리 사회와 개개인이 짊어지고 있는 의무이다. 우리만 살고 끝낼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점에서 인류를 끝내지 않을 의무가 있는 것 아닐까?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우리보다 선대의 인류가 고생해서 쌓아온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물이 싫다면 혼자서 그걸 거부하면 된다. 그것은 개인의 실존적 선택이다. 하지만, 인류 전체의 선택 가능성을 죽이는 것은 범죄 행위이다. 그것은 자신의 실존적 선택의 권리를 넘어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성경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신 것이 제국주의적 논리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유치하고 천박한 해석이다. 하나님의 저 말씀은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살아라. 너희에게 주어진 인류와 사회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는 뜻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덧붙이는 글]
['제3의 길' 轉載]
TAG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hytimes.kr/news/view.php?idx=374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정기구독
교육더보기
    게시물이 없습니다.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