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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3-15 10:3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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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가치가 서로 통용되고 교환될 수 있도록 단일한 기준을 제시한다
-사람들은 돈 때문에 온갖 범죄가 발생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돈이 불화와 오해, 갈등과 폭력 예방
-미개한 정신이나 행동방식은 돈의 질서와 규칙, 시장 원칙, 자본주의 질서를 부인하는 데서 나오는 것

가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은 돈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특별한 공부나 연구를 통해서 얻은 결론은 아니다.
 
다만, IT 분야의 가치를 확산시키는 핵심 개념으로 떠오른 정보 플랫폼이라는 관점에서, 인류가 만든 최초의 그리고 최고의 플랫폼이 돈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플랫폼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가치가 서로 통용되고 교환될 수 있도록 단일한 기준을 제시한다. 그 기준에 합의한 사람들은 바로 ‘세계’로 가는 문을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신만의 공간이 아닌, 다양한 사람들이 상호 소통하고 교류 협력하는 ‘세계’가 플랫폼을 통해 열리는 것이다. 인류라는 개념이 바로 이 플랫폼을 통해서 비로소 완성된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이 플랫폼이 있기에 수많은 불화와 오해, 갈등과 폭력이 예방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사람들은 돈 때문에 온갖 범죄가 발생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돈 때문에 수많은 범죄와 부조리를 없앨 수 있었다는 점을 간과한 판단이다. 돈으로 교환 가능한 가치가 늘어나면서 인간들은 쓸데없는 갈등과 오해, 그리고 불편을 피할 수 있었다.
 
고대부터 중국의 비단과 로마의 유리그릇을 서로 교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돈의 역할이다. 이게 없다면 인간 세상의 교류도 있을 수 없고 대부분의 요구를 전쟁과 폭력으로 해결해야 한다. 실크로드의 위대함은 사실상의 돈이라는 플랫폼의 가치로 인해 형성된 것이다.
 

▲ 양한 사람들이 소통하고 교류 협력하는 ‘세계’가 플랫폼을 통해 열린다.


인간 사회가 진화한다는 것은, 좀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과거에는 돈으로 살 수 없었던 가치와 재화, 서비스들을 돈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변화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발언에 거부감 생기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비인간적인 생각이라고 성토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보자.
 
사람들의 수명은 갈수록 길어지지만, 사실상 정상적인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연배는 남녀 모두 65세 내외라고 한다. 그 이후의 삶은 어떤 광고 문안마따나 ‘유병장수(有病長壽)’의 비극이 되기 쉽다.
 
심지어 치매가 걸려 자식도 알아보지 못하고 벽에 똥칠하고 온갖 사고 일으키는 노인네를 감당할 수 있는 가족이 있을까?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은 인간성이 각박해진 현대에 들어와 생긴 말이 아니다. 오랜 세월 우리 조상들이 경험을 통해 절감한 교훈이 담긴 속담이다.
 
그럴 때 돈으로 살 수 있는 노인 케어서비스야말로 구원의 손길이다. 요양병원 등이 제공하는 서비스에 불만도 많지만 사실 그 불만의 근본을 따져보면 돈으로 정확하게 가치를 평가해야 할 서비스에 다른 작위적인 요소가 개입해 생긴 문제인 경우가 많다.
 
모든 것을 돈으로 거래한다는 변화가 인간성의 상실을 의미한다고 여전히 믿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늙고, 치매에 걸린 부모를 요양병원에 격리시키는 결정을 불효 내지 비인간적인 조치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인간을 폐품 취급한다는 항변도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요양병원 서비스가 생기기 이전보다 그 이후에 노인들의 처지나 생활 조건은 훨씬 나아졌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건강이 나쁘고 생활이 불편해진 노인네들을 모실 수 있는 요양병원이 생기기 전에 그 노인네들을 자식이나 친척들이 모두가 지극정성으로 모셨을까?
 
정말 그랬다면 대한민국은 진정으로 동방예의지국이자 효자효녀의 천국이었겠지만 역사적으로 그런 적은 없다. 그랬다면 유교 이념을 국가의 근간으로 삼은 왕조 시절부터 굳이 효자효녀를 기려서 기록하고 기념할 이유도 없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디모데전서 6:10)’라고 말한다. 맞는 말씀일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저 말씀은 돈이란 것이 얼마나 인간 삶에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얼마나 큰 효용을 갖는지 보여주는 것 아닐까? 그 돈의 위력을 인정하는 것과, 그 돈의 위력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얘기이다.
 
몇달 전 최영미 시인이 어떤 호텔에 기거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 대가로 자신이 가진 시인으로서의 명망성도 제공할 수 있겠다고 했을 때 찬반 여론이 들끓었다. 내 기억에는 비난하는 목소리가 더 컸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 내 솔직한 감상은 ‘최영미 시인이 똑똑하다’는 것이었다. 다른 분야의 인물도 아니고, 이 세계의 물질성과 그 냉정한 과학 원리를 부인하기 쉬운 인문학의 결정판인 시의 세계를 다루는 지식인이 저런 발언을 하다니! 새삼 최영미 시인을 다시 보게 되었고, 흔하디 흔한 감상주의자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호텔의 쾌적한 주거 서비스와, 시인의 명망성을 교환하는 게 뭐가 나쁜가? 거기에 어떤 부도덕이 있나? 시장은 일상적인 투표이자, 계약이다. 거기에 강제나 폭력, 사기가 개입하지 않는 한 그 거래는 무조건 정당하다.
 
새삼 관심이 생겨 시인의 페이스북을 살펴보고, 이 분이 지난 겨울 촛불시위에 열심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스스로 긍정했던 그 시장질서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정신이 촛불시위의 핵심이라는 것을 이 시인이 알았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자신의 정신과 논리 안에 내재하는 모순을 파악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탁월한 지성인이라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최영미 시인은 호텔 서비스와 자신의 가치를 교환하자는 발언을 통해 그 모순을 해결하는 도정에 이미 접어들었다고 나는 판단한다.
 
돈은 인류가 만든, 역사상 최고의 정보 플랫폼이자 가치 플랫폼이다. 지금 온갖 첨단 기법과 서비스를 갖춘 플랫폼도 위대하지만, 그 모든 플랫폼의 원형이자 그 가치의 원천을 제공하는 플랫폼이 바로 돈이다.
 
자본주의는 인류 역사상 저 돈의 기능이 사회 전반에서 전면적으로 관철되고 긍정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자본주의적 질서의 정착을 반대하고 방해하는 작동도 매우 거세다.
 
소위 자본주의와 시장의 폐해를 시정한다는 명목으로 돈의 정상적인 기능을 방해하는 끈질긴 시도가 좌파들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돈의 정상적인 기능을 방해하여 자본주의 자체의 성격을 훼손한 결과가 흔히 자본주의의 폐해라고 부르는 결과를 낳고 있다. 공황에 대처한다며 시장의 정상적인 작동을 방해하여 실은 대공황의 극복을 늦춘 케인즈식 접근이 대표적이다.
 
우리가 흔히 미개하다고 부르는 정신이나 행동방식은 대개 저 돈의 질서와 규칙, 시장의 원칙을 부인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좌파의 발호와 집권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미개의 상태, 전근대의 상태로 복귀하고 있다. 여기 대한 근원적이고 철저한 수술이 없으면 대한민국의 미래도 없을 것이다.
나는 돈이 별로 없다. 하지만 돈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돈의 유용성과 그 어마어마한 과학, 인류사의 진보에 기여한 몫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이야말로 한 인간으로서, 나름 일종의 지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진정한 패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제3의 길' 轉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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