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겨울 밥상은 아무래도 구운 김과 동치미이다.
김은 생김의 그 짙은 고동색이 사라져 초록빛이 드러날 정도로 잘 구운 것이어야 한다. 기름소금을 발라 구운 것도 싫다. 그냥 불에 잘 구우면 그걸로 끝이다. 굽지 않은 생김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많고, 작게 잘라서 기름과 소금으로 간을 해서 몇 장씩 포장한 조미김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아니다. 조미김은 그냥 안주로나 집어먹으면 몰라도 밥에다 먹을 물건은 아니라는 생각을 바꾸지 못한다.
하긴 김이라는 어휘도 나에게는 별로 다감하지 못하다. 어렸을 때는 김이 아닌 ‘해우’였다. 나중에 나이 들어 저 단어가 한자어 해의(海衣)의 전라도식 발언일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됐다.
김보다 훨씬 절실한 기억이 동치미이다. 어렸을 적에는 동치미를 특별하게 좋아해본 기억이 없다. 그냥 김치처럼 겨울이면 당연히 밥상에 올라오는 반찬이었다. 잘 구운 김을 가위로 6장으로 나누어 잘라서 거기에 더운밥을 얹고 그 밥 가운데에 자장 국물을 조금 적신 후 김을 말아서 입에 넣고, 숟가락으로 동치미 국물을 떠서 입에 넣는다. 김과 더운 밥알, 그리고 간이 배인 자장 국물을 함께 씹는 맛과 함께 동치미 국물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감촉.
우리나라 사람들이 탄수화물 중독이라고 하는데, 나에게는 밥알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그 느낌이다. 거기에 어떤 반찬이 조화되느냐가 그 중독의 핵심이다. 겨울에는 김과 동치미가 원탑이다.
동치미의 존재감은 국물이 역시 압권이지만 무도 빠트리면 서운하다. 통무를 가운데만 여러 개 칼집을 내서 넣었기 때문에 그 크기가 부담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그 통무를 잘게 채치듯 썰고 뜨거운 밥에 넣고 자장 국물로 간을 맞춰서 비벼먹으면 그 또한 겨울철 밥도둑의 반열에 들어간다.
집에서 동치미를 담그지 않기 때문에 어쩌다 음식점에서 만나게 되는 동치미 국물로만 갈증을 달랬다. 실은 잊고 있었던 그 갈증을 음식점 동치미를 만나면서 되살렸다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하지만, 그 국물은 갈증을 되살렸을뿐 해소 즉, 해갈하지는 못했다. 갈증을 더 간절하게 했던 것 같다.
어머님이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하신 적이 있었다.
니들 외할머니가 그냥 무하고 소금, 마늘, 파 그런 것만 갖고 동치미를 담과도 얼마나 시원하고 맛있는지 아냐? 그거 먹으먼 요즘 사이다 그런 것 못먹어야~
나는 물론 그 동치미 맛을 모른다. 지금 내 그리움의 출발점은 돌아가신 어머님이 담궈주셨던 그 동치미인데, 어머니에겐 또다른 그리움의 원천이 있었던 것이 당연하겠지.
나는 끝없는 그리움의 원천이 어딘지 찾아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나마 고향 근처에서 동치미를 비슷하게 담궈서 보내주는 집에 의존한다. 그래도 감사하다. 겨울 아침에 목을 적셔주는 이 동치미가 있다는 사실이. 끼니마다 줄어드는 동치미 통을 보면서 올 겨울에는 동치미 값으로 얼마나 지출해야 하나, 서투른 계산을 해보면서.
지역평등시민연대 대표, 정치 담론집 <호남과 친노> 저자. 호남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이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으며, 인종주의적 호남 혐오와 반기업과 반시장 정서를 동시에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 사회의 전근대성의 극복이라는 과제도 이런 고민의 연장선에서 바라본다. '제3의 길' 공동대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