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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2-02 17: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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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는 다양한 문명이 거래하고 소통하는 강력한 교통 인프라. ‘고대의 고속도로’ 명칭 얻어
-육지라면 고정적인 거버넌스 시스템 구축 가능하지만, 바다로 떨어진 지역이라면 이게 어려워
-그때그때 거래하는 관계에서 ‘계약의 정신’이 사회 내부에도 작용하고 법치와 ‘개인’이 나타나


서양문명에도 다양한 요소가 섞여 있고, 동양문명도 마찬가지지만 지리적인 요소만 따져보면 서양문명은 지중해의 산물, 동양문명은 황하의 산물이 아닐까 가끔 생각해본다.

 

지중해는 세계적으로 매우 드문 형태를 띤 바다이다. 광대한 영역을 연안에 포괄하고 있으면서도 또 지중해 연안 각 지역의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다. 사실상 서양의 내해(內海)인데, 내해 치고는 규모가 어마어마하고 포괄하는 지역이 광대하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지중해가 포괄하고 있는 지역은 서쪽의 스페인부터 프랑스, 이태리, 그리스, 터키, 이스라엘 등 중동지역, 이집트 그리고 과거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한 광대한 아프리카 북부 해안 지역 등이다.

 

지중해는 이렇게 다양한 문명과 생활권이 서로 거래하고 소통하는 가장 강력한 교통 인프라였다. 그래서 지중해를 ‘고대의 고속도로’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럽의 지형을 살펴보면 각 문명권이 육로를 통하는 것보다 지중해 바닷길을 통해 교류하는 것이 훨씬 더 물류와 교통의 효용성이 높았을 것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해상 수송은 한꺼번에 대규모 물량을 처리할 수 있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에는 인력이나 가축을 이용한 수송보다 선박을 이용한 수송의 효율이 훨씬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중앙집권적 권력이 유지하는 치안 기구가 없는 당시 상황에서 육로 수송보다 해상 운송이 도적떼 등의 위협으로부터 더 안전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지중해가 가진 또다른 혜택은 이 천혜의 고속도로가 도로의 기능 외에 자연 방어막의 역할도 수행했다는 점이다. 육지로 침입하는 외적은 사실 그 시기나 규모의 제약이 별로 없다. 수송 효율은 떨어지지만 그 이동의 인터벌이나 수단의 제약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상 이동은 일단 선박 건조에서부터 적지 않은 비용과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동하는 병력의 규모도 육상보다 제약이 크다.

 

이런 점에서 지중해는 고속도로의 역할 외에 정반대의 기능도 했다. 즉, 지중해 연안 각 지역이 나름대로 독자성을 갖고 발전할 수 있는 천연 방어막의 역할을 한 것이다. 외적의 잦은 침입을 막아주는 환경을 지중해가 만들어준 것이다. 물론 지중해 각 지역에서도 끊임없이 해상 원정과 침략, 약탈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일시적인 약탈이나 파괴에 그쳤지, 장기적인 주둔이나 점령으로 이어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외적들은 한번 휩쓸고 들어와 물자를 약탈하고 사람들을 납치해 노예로 팔기는 했지만 그곳에 계속 눌러살기는 어려웠다. 육지라면 고정적인 거버넌스 시스템의 구축이 가능하지만, 바다로 떨어진 지역이라면 이게 어렵다. 사실 한국과 일본, 중국 해안 지역의 문명들도 고대에 이것과 비슷한 관계를 구성했던 것으로 짐작한다.

 

즉, 지중해 연안 지역의 문명들은 case by case로 그때그때 상호 교통하고 거래하는 것이 기본이었지, 상시적인 거버넌스 체계에 묶이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침입이나 약탈 등도 본질적으로는 이런 상호 교통과 거래의 연장이자 변형된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상시적인 거버넌스 체계가 아니고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거래하는 이 문화와 관행은 서양 문명의 중요한 특징을 만들었다. 계약이라는 강력한 사회적 장치가 바로 그것이다. 일상적인 관계로 묶이지 않는 상호 관계에서는 거래의 내용과 지켜야 할 조건 등을 서로가 합의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그런 계약이 없으면 관계는 이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굳이 상대방에 얽매일 필요도 없다.

 

▲ 지중해는 고대의 고속도로이자 방어막 역할을 했다.


고속도로이자 방어막 역할을 하는 지중해가 있기 때문에 마음에 안드는 조건을 제시하는 놈들은 쫓아내거나 외면하는 것이 가능하다. 깡패같은 놈들이 쳐들어올 수도 있지만 사실 그런 침입에 드는 비용에 비해 약탈하는 재화가 더 크다는 보장도 없다. 비교적 상호 자유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상호 합의하는 계약이라는 장치가 서로에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이 계약은 각 국가와 국가, 문명과 문명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한 문명과 사회 내부의 관계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즉, 왕과 귀족, 귀족과 평민, 평민과 노예 사이에도 일종의 계약 관계가 성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스나 로마 등 서양 문명에서 왕정에서 귀족정, 민주정 그리고 다시 제정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면 비교적 상호 합의와 계약의 정신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리스나 로마의 군대는 기본적으로 재산을 가진 농민이나 시민들이 자신의 돈으로 무장을 하고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전장에 나간다는 개념이다. 그래서 노예들이나 무산 계급들은 병역의 권리(?)가 없었다. 이런 시스템 역시 계약이라는 사회적 장치가 없으면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다. 서양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은 바로 이 병역의 특성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병역에 복무한다는 것은 그 사회에서 지킬 것이 있고, 그 사회의 주인이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유럽 국가들에서 병역이라는 것이 전쟁의 비참한 결과와는 별개로 명예로 높이 평가받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었다. 사회에서 가장 앞선 지위에 있는 자들이 직접 병역의 주인공이 되는 분위기가 문명과 사회적 분위기에 주는 영향은 어마어마하다. 병역에서 빠지는 사람들을 ‘신의 자식’으로 우러러보고, 병역을 제대로 마친 사람들이 ‘어둠의 자식들’ 취급을 받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와는 극단적으로 대조된다.

 

이 계약의 정신이 확대된 것이 법의 정신이고 나아가 철학적 사회적 의미에서의 ‘개인’을 낳게 된다. 원래 계약이라는 것은 상호 준수해야 할 규율이기 때문에 법치로 이어지는 도로의 포장재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계약은 근본적으로 상호 합의하는 개인끼리의 관계라고 봐야 한다. 거기에서 비로소 ‘개인’이 만들어진다. 여기서 개인이 단순히 이기적인 존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책임의 기본 단위이고 여기에서 사회적 규율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크게 봐서 이 모든 것이 바로 지중해가 서양 문명에 준 선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론 다른 요소들도 서양 문명에 영향을 주었겠지만 우연적 요소가 아닌 필연적 요소라는 점에서 고려해보면 지중해라는 자연 환경의 영향이 가장 결정적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덧붙이는 글]
['제3의 길' 轉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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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역평등시민연대 대표, 정치 담론집 <호남과 친노> 저자. 호남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이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으며, 인종주의적 호남 혐오와 반기업과 반시장 정서를 동시에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 사회의 전근대성의 극복이라는 과제도 이런 고민의 연장선에서 바라본다. '제3의 길'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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