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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1-26 18:47:17
  • 수정 2018-01-26 19: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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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제, 좌파 쪽에서 먼저 주장하지만, 우파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특이한 점
-기존 복지제도의 복잡성과 비효율성 타파 목표… 현실 정치에서 실패, 대처와 레이건 등장
-핀란드 ‘완벽한 복지’의 부작용 해소 위해 실험계획 진행, 복지 수혜자 자존심 배려 아니다

온 국민에게 일정액의 돈을 일률적으로 그냥 주자는 기본소득제 논의는 좌파 쪽에서 먼저 주장하고 있지만, 우파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평등주의 성향의 좌파 지식인들은 수혜자들에 대한 ‘낙인 효과’를 방지하고, 노동계층의 협상력을 높여 줄 것이라는 이유로 이 제도를 선호한다. 한편 투명하고 단순화된 복지제도를 원하는 자유주의자들도 이 제도에 별 거부감이 없다. 기본소득제야말로 복잡한 복지 시스템 대신 관료의 재량권이 최소화된 복지제도이기 때문이다.

▲ 핀란드는 2천명에게 매달 560유로를 지급한다는 기본소득 실험계획을 발표했다.


기본소득제의 역사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1516년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는 소설 <유토피아>에서 “훔치는 것 말고는 목숨을 부지할 다른 어떤 방법도 없는 사람은 아무리 가혹한 형벌로도 막을 수 없다. 절도범들을 끔찍한 형벌로 다스리고 있지만, 그보다는 모든 사람에게 약간의 생계수단을 제공하여 목숨 걸고 훔치는 절박한 상황을 없애는 것이 훨씬 나은 방법이다”라고 썼다.

그 후 계몽주의 사상가 토마스 페인(Thomas Paine, 1737~1809),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 1772~1837), 자유주의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 등이 권리로서의 기본소득제 논리를 개발하는데 일조하였다.

20세기에 와서는 노벨경제학상(1976) 수상자인 자유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1912~2006)이 1962년에 ‘부(負)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자본주의와 자유>, Capitalism and Freedom)를 제안함으로써 기본소득 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제임스 토빈(James Tobin, 1918~2002) 같은 좌파(미국에서는 liberal이다) 학자들이 제안한 기본수당(basic allowance)과 궤를 같이 하면서 그 영향력이 가히 폭발적이었다.

프리드먼이나 토빈이 기본소득 제도 도입을 주장한 것은 모두 기존 복지제도의 복잡성과 비효율성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제안은 현실 정치에서 모두 실패했고, 영국과 미국에서는 대처와 레이건이 등장했으며, 유럽대륙에서는 사회민주주의가 후퇴했다.

지난 2016년 6월 스위스는 기본소득 도입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국민투표를 기획한 시민단체 BIS의 체 바그너 대변인은 “앞으로 로봇으로 인해 임금을 받지 못하는 많은 노동자들이 생겨날 것이다. 기본소득은 이런 무임금 일자리를 보다 가치 있게 만들어줄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직업을 선택할 때 돈 이외에 다양한 조건을 고려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로봇과 인공지능이 이끄는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불안감이 기본소득 제안의 근거임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러나 투표율 46.3%(246만여명)에 찬성 23.1%, 반대 76.9%로 이 제안은 부결되었다.

스위스에서 기본소득 도입안이 부결된 2016년, 같은 해 8월에 핀란드 정부는 2천명을 대상으로 매달 560유로(약 70만원)를 지급한다는 내용의 기본소득 실험계획을 발표했다. 조건 없이 돈을 주면 국민들이 일을 더 많이 하고 싶을 것이라는 핀란드 정부의 설명은 우리를 얼핏 다소 당황하게 만들었다. 공짜 돈이 생기면 일을 적게 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그러나 우리의 상식을 배반하는 이 의문은 너무나 잘 갖추어진 핀란드 복지제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세계 1위 휴대폰 제조사이던 노키아가 몰락하고, 최대 교역국이던 러시아가 EU의 경제제재를 당하면서 교역시장도 축소되자, 핀란드는 2012년 이후 마이너스 성장이 계속되었다. 실업률이 9.5%(2016)에 이르렀고, 특히 청년 실업률은 22% 수준을 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완벽한 복지제도 때문이었다.

경제 사정이 나쁘다 보니 새로 생기는 일자리의 상당수는 저임금 일자리이다. 파트타임이나 임시직으로 버는 돈의 액수는 실업수당과 별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 일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놀면서 실업수당을 챙기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 그래서 실업률이 치솟고, 놀고먹는 젊은이가 늘어난 것이다. 따라서 핀란드가 추진하는 기본소득 실험의 핵심은 돈을 버는 사람에게도 준다는 데 있다. 기존 실업급여는 파트타임이라도 일자리를 얻게 되는 경우 지급이 중단되지만, 기본소득은 일자리를 얻더라도 계속 지급된다. 당연히 일을 하면 소득이 더 늘어나고, 당연히 젊은이들은 더 큰 소득을 위해 일을 더 하게 될 것이다.

2년 동안의 실험이 끝나는 2018년이면 실험결과의 분석이 나온다. 기본소득을 받은 쪽에서 의미 있는 취업 증가세가 나타나면, 이 제도가 일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것이 입증될 것이다.

핀란드 정부가 기본소득 실험을 하는 목적은 일하는 사회를 만들고, 사회보장 시스템을 개혁하기 위한 것이지 단순히 복지 수혜자의 자존심을 살려주기 위한 보편적 복지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 국민들은 알아야 할 텐데…

(이영환 in 『오래된 새로운 전략』을 읽으며 든 생각)


['3의 길' 轉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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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자 '제3의 길' 칼럼니스트 박정자 '제3의 길' 칼럼니스트의 다른 기사 보기
  • 상명대 명예교수.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학사, 석사, 박사.

    역서 :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 ‘현대세계의 일상성’, ‘사상의 거장들’ 외 다수.
    저서 : ‘빈센트의 구두’,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 ‘시선은 권력이다’, ‘마그리트와 시뮬라크르’, ‘잉여의 미학’, ‘이것은 정치 이야기가 아니다’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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