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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1-30 17:4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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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유럽 등과 달리 중앙권력의 강압에 반란이나 도피 불가능
-전복이 왕실에 진상하는 공물이 되면서 엄청난 가렴주구
-한반도 600년을 관통하는 국가주의, 약탈주의에 대한 성찰 필요


대가를 치르지도 않고, 동의도 받지 않고, 일방적으로 물품, 노동력, 돈을 강탈 하거나 어떤 의무를 부담시킬 수 있는 것이 국가의 특권이다. 그래서 국가의 강권과 강압은 정말로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한국은 유럽, 북미, 중국, 일본과 달리 중앙 권력의 강권, 강압에 대해 반란이나 도피가 거의 불가능했다. 지정학적, 지경학적 조건과 허구적 성왕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정말 견제 받지 않은 권력이었던 것이다(이는 북한에서 완벽히 부활하였다).

그래서 동시대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면 조선 사회의 약탈적/가렴주구적 성격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링크한 글에서 언급되는 전복, 감귤, 말 뿐만 아니다. 도자기, 종이, 고래 등 거의 모든 값나가는 재화들이 다 그랬다. 이런 재화를 대가 없이 강탈을 했으니 누가 자식에게 도자기, 종이 제작 기술을 전수하겠는가? 누가 해변에 밀려온 고래를 해체하려 하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고려청자와 이조백자에 감탄하지만 누가 만들었는지 모른다(그런 점에서 나는 도자기 명가 심수관 가를 남긴 일본 도쿠가와 막부와 그 영주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전복을 주로 채취하는 남자(해남)을 포작인으로 불렀다. 그런데 전복이 왕실에 진상하는 공물이 되면서 엄청난 가렴주구가 일어났다. 그래서 포작인이 자취를 감추었다. 듣자니 당시 제주 여자들은 포작인에게 시집가는 것을 최악으로 여겼다. 공물(전복) 할당량을 못 채우면, 할당량을 채울 때까지 그 마누라를 감옥에 집어넣는 만행을 당하기 때문이다. 이런 약탈 경제, 진상 경제로 돌아가는 국가가 존속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런 공물 진상제도를 ‘대동법’으로 바꾸는 데 100년이나 걸렸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이는 공의가 기득권을 누르는 데 걸린 시간이자, 개혁의 속도와 능력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역사에 대한 성찰반성이 정말 ㅈ도 없었기 때문에, 위안부 소녀상을 버스에 태워 돌며, “보세요 일본이 이렇게 나쁜 짓을 했어요”라고 하는 ‘진상’짓이 벌어졌다고 생각한다.

국가에 의한 일방적인 약탈과 억압 경제는 아득한 과거의 일이 아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는 최저임금, 통상임금 재판, 비정규직 관련 규제와 비급여의 급여화 등도 본질적으로 같다.

▲ 1월 26일, 올들어 처음 열린 최저임금위원회


최저임금이나 통상임금 재판 때문에 국내 공장 문 닫고 해외로 가겠다고 하면, 함부로 입 놀리지 말라 하고, 뒤에서는 표적 세무조사, 검찰수사, 표적 근로감독(고용부), 표적 무슨무슨 감독(보건복지부 등)으로 위협한다. 지자체장도 위임받은 특별사법 경찰권으로 기업(대형마트 등)을 얼마든지 못살게 할 수 있다. 그런데 국가관료가 쥐고 있는 이 치졸하지만 무서운 칼과 오랏줄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 표적 세무조사, 표적 검찰수사, 표적 감사, 표적 행정조치가 얼마나 양아치 짓인지 문제의식이 없다는 얘기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강제하고, 해고 요건과 절차를 더 강화하는 대한민국과 ‘가혹한 전복 진상 부역을 피하려고 남자들이 제주를 탈출하는 일이 많아지자, 1629년부터 1830년까지 무려 200년 동안이나 제주 사람들을 육지로 나가지 못하게 만든 출륙 금지령’을 내린 조선 왕조와 얼마나 다른지 모르겠다. 정책 자체가 나쁜 것은 둘째 문제고, 규제(강제)를 하면서 그 대가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얘기다.

링크한 기사를 읽으니 왜 자꾸, 조선의 양반관료사족이 부활한 듯한 자칭 진보와 자칭 공공이 휘젓고 다니는 대한민국이 오버랩 될까? 이는 한반도 600년을 관통하는 국가주의, 약탈주의에 대한 성찰, 반성이 얕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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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복은 부와 권세가 있는 사람들이나 먹던 귀한 먹거리였다. 그 전복은 말(馬), 감귤과 함께 왕족에게 진상하는 귀한 공물 중 하나였다. 제주는 척박한 화산섬으로 안 그래도 농사지어 먹고 살기 힘든데 진상품 부역 부담까지 지다보니 힘겨웠을 터. 점점 전복 등의 진상 부담이 늘고 남성의 몫이었던 진상 부역을 제주 해녀가 맡게 된다.

“미역을 캐는 여자를 잠녀(潛女)라 한다. 그들은 2월 이후부터 5월 이전까지 바다에 들어가 미역을 따고 나온다. 남녀가 뒤섞여 일하고 있으나 이를 부끄러이 생각지 않는 것을 볼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채취해 관가에서 징수하는 일에 부응하고, 그 남은 것을 팔아서 의식을 해결한다. 고생고생해서 따낸 전복을 탐관오리에게 빼앗기고 해녀들 스스로는 굶주림에 허덕인다.” – 17세기 초 아버지 인성군을 따라 불과 15살의 나이에 제주로 귀양 온 이건(李健)이 쓴 한문수필집 <제주 풍토기>, <규창집> 가운데

진상품 공출 부역이 얼마나 힘에 겨웠으면 지금도 못된 손님을 ‘진상’이라 부르나 싶다.

점점 궁궐은 물론 왕실 종친들의 전복 공출 요구를 이기지 못한 제주 남자들이 섬에서 뭍으로 탈출하는 일이 부지기수로 발생한다. 수많은 포작인들이 착취와 수탈에 가까운 진상 부역을 피해 제주도에서 전라도, 경상도 해안으로 도망쳐 나갔다. 포작인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제주도는 돌·바람·여자가 많은 삼다도란 별칭이 생긴다. 1694년 제주에 부임한 목사 이익태는 전복을 딸 남자가 부족하자 미역을 따던 해녀들에게 전복을 캐 바치도록 하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전복을 캐는 사람을 뜻하는 ‘비바리’가 해녀를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 ‘여자로 나느니 쇠로 나주(여자로 태어나느니, 소로 태어나는 것이 낫다)’라는 속담까지 생겨났다.

이렇게 가혹한 전복 진상 부역을 피하려고 남자들이 제주를 탈출하는 일이 많아지자, 1629년부터 1830년까지 무려 200년 동안이나 제주 사람들을 육지로 나가지 못하게 만든 출륙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한다. 당시 전복을 따서 진상품이나 공물로 바치는 일은 제주도뿐만 아니라 남해의 여러 섬과 해안가 백성들에게도 지워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전복을 제때 바치지 못하면 관아에 붙들려가 매를 맞아야 했다.

“해녀들은 추위를 무릎 쓰고 이 바닷가 저 바닷가에서 잠수하여 전복을 따는데 자주 잡다 보니 전복도 적어져 공출로 바칠 양이 차지 않는다. 그런 때는 관청에 불려 들어져 매를 맞는다. 심한 경우는 부모도 붙잡혀 질곡당해 신음하고 남편도 매를 맞으며 해녀에게 부과된 수량을 모두 납부할 때까지 용서받지 못한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78231&utm_campaign=share_btn_click&utm_source=facebook&utm_medium=social_share




[덧붙이는 글]
[제3의 길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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