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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1-26 14:46:30
  • 수정 2018-01-26 14:4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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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시대 선각자들은 일본,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선진문명을 접한 사람들
-청와대/여의도 정치인들의 식견이 삼성전자 등 기업 임직원보다 뛰어날까
-문명과 지성, 덕성 앞선 집단이 이끌지 않으면 이 나라는 퇴보 면하기 어렵다


조선 태종과 세종시대 조선 문명이 융성했던 이유가 뭘까? 조선 문명의 짧은 봄과 중종 이후 망국까지 길고 긴 겨울의 이유가 무엇일까?


조선 문명의 봄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원나라 문명과 일체화된 때문 아닐까? 문익점의 목화씨, 최무선의 화포, 안향의 주자학, 성균관 시스템 등. 한글도 몽골제곡과 원나라가 발전시킨 문명(거란 문자 영향을 많이 받았다)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안다. 정화의 원정을 가능하게 한 선박건조 기술과 항해술도 원나라 문명의 토양 위에 꽃핀 기술일 것이다. 세종시대에 꽃핀 수많은 기술과 제도도 원나라 문명의 토양에 부국강병을 절실히 필요로 하던 난세(대륙의 지각 변동기)의 필요가 결합되었기 때문 아닐까?


하지만 그 이후 조선은 망국의 그날까지 이데올로기적 이유로 중국 문명도, 일본 문명도, 유럽 문명도 흡수하지 못했다. 지금 북한은 핵과 미사일에 국력을 쏟아붓는 것처럼 조선은 소중화 또는 동방의 군자국이나 예의지국에 지고지선의 가치를 부여한 듯하다. 부국강병의 가치는 영정조 시대에도 외면당했다. 대륙의 패자에게 머리만 잘 조아리면, 그럭저럭 사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구한말과 식민지의 선각자들은 대부분 일본,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선진문명을 접한 사람들이다. 독립운동가들도 있고, 개신교인도 있고, 친일/친미/친러파도 있고, 자치론자/민족개량주의자도 있고, 공산주의자/무정부주의자도 있다. 어쨌든 이들은 당시 조선에서 견문이 탁월한 사람들이었다.


▲ 상해 임정의 실제 중심인물이었던 도산 안창호


상해 임정의 실제 중심 인물이던 안창호도 1894년에 개신교 선교사를 통해 미국/기독교 문명을 접했고, 1902년에 도미하고 1907년에 귀국하여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평양·서울·대구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두고, 평양 마산동에 자기회사(磁器會社)를 설립하였다. 그의 탁월한 식견을 높이 산 이토 히로부미가 안창호에게 직접 조각(組閣)을 요청하기도 했다.


1910년에는 테라우지 통감부가 내각 조직을 제의하기도 했지만 안창호는 이를 일축하고 해외로 망명하였다. 위해위(威海衛)·북경·청도를 거쳐 상해·블라디보스톡 등지를 유랑하고. 북만주 밀산현(密山縣)에 무관학교를 세우려 했으나 실패하고 러시아·독일·영국 등을 거쳐 미국 뉴욕에 도착하였다. 그는 아마 한국 최초의 세계일주 여행자일 것이다.


상해 임정이 미주, 하와이, 연해주, 북간도, 서간도에 거주하는 동포 300만 명에게 세금을 걷고, 국내 거주민과 연결하는 연통제·교통국 등의 제도를 확립하고 국민개납(皆納·세금)주의, 국민개병(皆兵)주의, 국민개업(皆業)주의를 명시한 것은 안창호의 인품과 통찰력 외에도, 그가 일찍 접한 당대 최고 문명에 대한 견문이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미소 짓기, 우스개(유머) 사상, 단아하게 집 꾸미기, 무실역행과 충의용감, 이상촌 사업 등도 그런 견문의 결과였을 것이다.


베트남의 호치민 역시 당대 어떤 베트남인보다 넓은 견문을 가지고 있었다. 아시아, 유럽, 남미, 북미를 다 누볐던 것으로 안다. 1930년대 초에는 부산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을 다녀가기도 했다. 마르크스 레닌 저작은 말할 것도 없고, 공자, 맹자에 목민심서까지 탐독하였다. 선원, 요리사, 호텔 보이 등 수십 개의 밑바닥 직업을 거쳤다. 호치민의 리더십은 그의 성실성과 인격, 덕망 외에도, 당대 최고 문명을 몸에 익혔고, 사회의 밑바닥을 숱하게 기었고, 실물 경제을 만져봤기 때문이 아닐까?


중국의 주은래와 등소평의 안목도 일찌기 프랑스 유학을 통해 접한 유럽 문명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모택동은 유학파가 아니었지만, 북경도서관 사서였다. 그가 중국을 장악하긴 했지만, 인간을 개조하겠다고 문화대혁명 같은 짓을 해서 중국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것은 책을 통해서 세상을 배운 탓인지도 모른다.


지금 북한의 참상을 보면, 김일성이 당대 선진 문명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는 사실과 무관치 않은 것 같다. 김일성의 주요 활동무대는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소련의 변방(몽골 근처)이었다. 기독교 문명을 접하긴 했으나 시장경제, 산업, 기업 문화 등은 경험할 수 없었다. 마르크스 레닌/스탈린/모택동 저작이야 좀 봤겠지만, 동서양 고전의 지혜도, 미국과 유럽 문명도 흡수하지 못했던 것으로 안다.


김대중과 김영삼이 본격 등장하기 전, 1950~70년대 한국 정치를 주름잡았던 사람들은 꽤 일찍 선진문명을 맛봤던 사람이었다. 이승만, 윤보선, 장면, 조봉암, 신익희 등. 또 당시에는 북한이든 남한이든, 여당이든 야당이든 부국강병에 대한 컨센서스는 확실했다. 조선 사대부들처럼 국제관계에 도덕을 들이대지는 않았다.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국제정치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을 끌어가는 문재인과 더민당 의원들, 야당의 지도자와 의원들의 혈관에 흐르는 것은 앞선 세대보다 더 뒤떨어진 2류 문명과 빈약한 지성과 황폐한 덕성 등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엄청나게 열린 사회다. 책과 인터넷, 해외여행과 유학 등을 통해 해외문물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대화, 토론, 숙의 등을 통해 이런 경험을 정련하고 종합하고 숙성시키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다. 특히 간접체험은 한계가 있다. 특히 시장, 산업, 기업이라는 실물을 접하지 않았다면 더욱 그렇다.


식민지 시대 선각자들의 견문은 당시 사회 기준으로 상위 1% 중에서도 1% 수준이었을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 정치를 끌어가는 사람들의 견문은 어떤 수준일까? 삼성전자와 현대기아차나 해외 수출을 하는 중소기업 사무관리직 등을 상대로 청와대/여의도 정치인들이 경제와 사회와 미래에 대해 토론한다면? 삼성과 현대와 중소기업 사무관리직 등의 식견이 훨씬 탁월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나라 기업, 특히 제조업은 오래 전부터 세계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법률, 의료, 금융, 방송통신 등 규제산업은 닫혀있다. 이것은 이 분야 출신 전문가(문재인, 노무현 등)들의 안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노조간부의 고민 내용은 회사 간부(사장, 이사, 부장 등)의 고민 내용의 1/10도 안될 것이다. 시민단체 출신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한반도는 식민시대보다 오히려 1950~80년대가 닫힌 시대였다. 불행히도 지금 대한민국 정치와 정책담론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이 닫힌 시대에 청년기를 보냈다. 게다가 1980년대부터는 대한민국의 국가적 화두는 고도성장과 부국강병이 아니었다. 개방화, 자유화의 시대는 외환위기로 끝났고, 1980년대 이후 근 30년 간 민주화의 시대가 되었고, 2010년 전후해서는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국가가 화두가 되었다. 한국과 체질과 환경이 너무나 먼 북유럽 소국을 모델로 한 화두였다.


청와대와 여의도를 장악하여 대한민국을 끌어가는 선수들의 혈관에 흐르는 문명과 지성의 후진성이 여간 걱정스럽지 않다. 어느 사회든 몸에 체화된 문명과 지성, 덕성이 가장 앞서 있는 집단이 끌어가면 발전하고, 그렇지 않으면 퇴보하는 것이 역사적 경험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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