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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1-23 20:49:08
  • 수정 2019-01-24 09:5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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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국주의를 향해 달려가는 일본의 아베수상 [NK News]


2008년 중국에서 유학할 때였다. 우연히 친척집에 있었던 김구 선생님의 자서전 “백범 김구”라는 책을 읽고 감명을 받은 후 상해의 임시정부, 윤봉길 의사의 의거 장소인 훙커우 공원을 거쳐 만주를 여행하면서 봉오동, 청산리 및 독립 운동가들을 길러내던 학교 등을 찾아다녔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이 가사는 선구자라는 우리나라의 가곡이다. 한 독립 운동가의 한(恨)을 나타냈다고 했다.


특히 기억나는 일은 같이 여행하던 친척 분들과 일송정이라는 정자를 방문한 때였다. 일송정은 만주 용정이라는 한인 마을 산 꼭대기에 있었던 소나무 한 그루였다. 독립 운동가들은 때때로 몸과 마음이 지칠 때면 산꼭대기의 일송정 아래에 앉아 드넓은 만주 벌판과 해란 강을 내려다보며 독립에 대한 마음을 다잡곤 했다고 한다.


▲ 중국 용정의 산 꼭대기에 있는 일송정, 지금은 소나무 하나와 정자를 세워놓았다[옥승철]


중국 유학을 마치고 2년 뒤 2011년 당시 일본과 우리나라는 독도와 위안부 문제로 많은 갈등을 빚고 있었다. 문득 일본에 가고 싶어졌다. 일본에 가서 일본에 대해 배우고 일본의 역사 인식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교 졸업을 한 학기 남기고 일본 교환학생으로 동경에 있는 호세이 대학(법정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지피지기(知彼知己)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뭐라고... 생각하면서 피식 웃기도 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20대 초반의 굉장한 혈기였다.


[우연히 발견한 학교 옆 야스쿠니 신사]


어느 날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우연히 산책을 가다가 한 큰 신사(神社)를 발견하였다. 처음에는 어떠한 신사인가 했지만 전시되어 있는 전쟁품들을 보며 이곳이 야스쿠니 신사였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그곳을 둘러보면서 가슴속에 슬픔과 울분이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중국에서의 감정이 슬픔이었다면 야스쿠니 신사에서의 나의 감정은 내가 겪지 않았어도 내 선조들의 DNA에 각인되었던 한(恨)이었다.


▲ 야스쿠니 신사 [The Japan Times]


[일본 학생들과 위안부에 대해 토론하다]


나는 당시 일본의 정치 역사 수업을 듣고 있었다. 첫 수업에 들어가자마자 교수는 일본의 근대 역사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교수의 수업 PPT에 안중근 의사의 사진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테러리스트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당황하고 분노하였지만 그래도 일부러 일본 측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해보았다. 교수는 계속 설명하면서 2차 세계대전 때의 한국인 강제 징용은 없었으며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이 일본으로 인해 이루어졌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가장 분노케 한 것은 한국인 위안부가 자발적이고 정당하며 돈을 충분히 지급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교수는 그 증거로 위안부 모집 포스터를 보여주었다.


일본의 입장은 이렇다. 1944년 일본은 위안부를 모집하기 위해 거금을 준다고 하는 보도 자료를 뿌렸다. 그래서 많은 여자들이 자발적으로 위안부에 지원하였다. 또한 위안부가 강제 연행된 문서화된 증거가 없다는 게 핵심 논리였다. 그럼 지금까지 살아계신 피해자 할머니들의 말은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인가? 오로지 문서가 증거가 된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에 일본이 강제연행을 인정한 건 한국의 강요로 인한 것이라고 했다.


듣는 내내 울컥했다. 그때 예전에 우연히 읽었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이 생각났다.


"이 문제는 좀 민감한 사항이지만 예전에 제가 읽었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들려드리겠습니다. 그 할머니는 17살 때 일본인이 와서 군수공장에서 일을 하면 많은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할머니는 그 사람을 따라 트럭에 올라탔습니다. 트럭에는 그녀와 같은 상황의 조선인 여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들을 데리고 간 곳은 일본군인들의 진지였습니다. 그녀들은 그곳에서 강제로 하루에 많게는 30명씩을 받아야 했습니다. 도망가거나 임신이 되면 그 자리에서 칼로 찔려 죽는 건 다반사여서 그녀들은 그곳에서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했습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일본군은 위안부 증거를 없애기 위해 위안부들을 죽이려고 했지만 한 사람의 일본군 간부가 탈출하라고 미리 알려주어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들은 몸이 망가져 임신도 못하고 평생 결혼도 없이 쓸쓸히 살아야 했습니다."


같은 반의 일본 여학생들은 때로 놀라기도 했다. 그들은 내가 말한 것들에 대해 처음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 학생들은 내 말에 반신반의하였다. 하지만 내 말을 믿어주는 일본 친구들도 있었다.


이처럼 일본의 역사 교육은 철저히 일본 자국의 역사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떠한 조그마한 반성의 기미도 역사 교육에 보이지 않았다. 철저하게 우경화되고 군국주의적인 역사교육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서 이렇게 가르치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근대 역사를 정의롭지 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일본이 진실된 사과와 반성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사과와 반성은 자신의 과오를 알고 인정해야 하는 것부터 시작하는데 일본의 역사 교육에는 그들의 과오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아베의 우경화 노선은 일본의 본심이고 그들이 가고자 하는 정도이다. 언젠가는 그들은 군대를 제한하는 평화헌법(헌법 9조)을 개정하여 군대를 정식으로 보유할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크고 작은 시비와 마찰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실력을 키워야 한다]


우리나라는 그래서 강력한 국방력을 가져야 한다. 북한과의 평화의 기류로 인해 국방을 소홀히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의 더 큰 잠재적 적은 중국과 일본이다. 중국은 아예 우리나라를 대놓고 소국으로 치부하며 대통령까지 무시하고 있다.


강력한 국방력은 상대로 하여금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만든다. 세계를 움직이는 논리는 결국 현실주의의 힘이다. 일본은 얼마 전까지도 미국에서 F-35 전투기를 100대 추가 도입했다. 이 정도의 전력이면 해군력 공군력에서 중국마저 압도할 정도이다. 우리나라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일본은 우리나라가 북한과의 평화무드를 조성하여 국방력을 약화시킬 때 오히려 국방력을 강화하고 있다. 중국 또한 마찬가지이다. 아이러니에 빠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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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승철 칼럼니스트/영국특파원 옥승철 칼럼니스트/영국특파원의 다른 기사 보기
  • 평소에 북한의 개발에 관심이 있어 첫 번째 석사를 KDI 공공정책대학원에서 개발학을 전공하고 북한교통 인프라를 연구하였다. 그 후 좀 더 북한 경제개발에 관해 공부하기 위해 옥스포드에서 폴 콜리어 교수에게 북한의 개발을 통한 개혁과 개방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지금 북한의 시장경제를 태동 시키기 위한 연구를 싱가폴의 민간기관과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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