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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11-29 17:30:15
  • 수정 2018-12-05 21:5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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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 책 표지 [조평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1918~2008)의 <수용소 군도>를 읽어보셨나요?
저자가 소련 공산 전체주의 체제 하에서 겪은 경험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여 전파한 대표적인 "사미즈다트" 문학입니다.


소련 공산주의의 붕괴는 솔제니친의 기록과 문학적 천재성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사실 과언이 아닙니다.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비롯한 자유세계의 지도자들이 이 문헌을 통해 공산주의의 위선과 치명적 위험을 직시하게 되었으니까요.


올해 솔제니친 탄생 100주년(12월 11일)을 맞아, 총 3권으로 나누어져 있던 이 책이 단일권 버전으로 영국에서 새로 출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서문(foreword)을 지금 한국에서도 약 10만부가 팔린 <12가지 인생의 법칙>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조던 피터슨이 썼습니다. 조던 피터슨은 유투브강연을 통해 이미 전 세계적으로 가히 '피터슨 현상'이라고 불릴 만큼의 폭발적 돌풍을 일으키고 있지요.


<수용소 군도>는 물론이지만, 이 조던 피터슨의 서문도 그 자체로 매우 파워풀한 호소력이 있습니다.


특히 아직도 마르크스주의를 동경할 뿐만 아니라, 광화문 한복판에서 우리민족의 학살자인 김정은을 환영하며 "난 공산당이 좋아요"라고 외치는 것이 부끄럽지 않게된 한국사회에 꼭 들려주고 싶은 문헌입니다.


그래서 이 서문의 일부를 번역, 요약하여 공유합니다.




[조던피터슨의 <수용소군도> (2018) 서문에서]


도대체 왜 멀쩡한 사람들 사이에서 공산주의의 철학을 찬양하거나 마르크스의 업적을 칭찬하는 것이 용납되는가? 어떻게 마르크스의 교리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서구의 '폐해'를 본질적으로 정확히 진단하는 것이라고 여전히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그 교리가 도대체 왜 "진보적"인 것이고 동정 어린 맨정신의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이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공산주의 흑서>에 따르면 소련체제의 억압으로 자국민 2천5백만명이 죽었다. 마오의 중국에서는 6천만명이 죽었다.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중국은 다시 그 독재적 압제로 회귀할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공포는 2백만명의 시체를 남겼다. 겨우 유지되고 있는 쿠바 정치체제에서는 국민들이 먹거리를 찾기도 버겁다. 베네주엘라는 이제 병원에서 아이의 죽음을 '아사'라고 기록하는 것이 불법이 되었다. 그 어떤 정치적 실험도 [마르크스주의 만큼] 광범위하게,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매우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는 다양한 나라에서 시도되고 이렇게 완전하고 처절하게 실패한 경우가 없다.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여전히 그들의 이념을 동정심이나 자비심으로 자랑하는 것은 단순한 무지(그러나 변명할 수 없는)에서 비롯된 것일까? 혹은 성공한 이들에 대한 밑도끝도 없는 질투일까? 아니면 인류 자체에 대한 증오와 비슷한 그 무엇일까? 도대체 얼마 만큼의 증거가 필요한 것일까? 왜 우리는 계속 진실로부터 눈을 피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단순히 지적교양이 부족한 탓일 수도 있다. 그저 이해를 못하는 지경일 수도 있다.... 아마도 우리는 당장의 필요에 대한 숙고와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열의에 매몰되어 그 유토피아적 비전의 한계와 위험성을 숙고하지 못한는 것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 어떤 완벽한 미래, 즉 완전히 평등하고 영원한 형제애가 가득한 상태에 대한 가설이 그 어떤 희생이라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을 쉽게 상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신성한 천상의 궁극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모든 수단도 용납될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요구된다는 것을 말이다. 궁극의 유토피아를 추구한다는데 너무 큰 희생은 있을 수 없다. (특히 타인에게 그 희생이 청구된다면 더 그렇다.) 분명한건 우리 모두가, 적어도 심리학적으로, 인생의 의미를 제공하기 위해서 그런 어떤 미래의 지향성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


기독교는 자기 자신의 희생을 설파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 바로 세상의 고통과 악의는 각 개인의 책임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 각자는 스스로의 인간성에서 그러한 부끄럽고 불필요하고 분개할만 하고 치명적인 것들을 고통을 무릅쓰고 희생시켜, 각자의 자발적으로 짊어진 존재적 무게를 들고 본래의 오르막 길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물질주의적 유토피아를 꿈꾸는 자들은 천국을 이루기 위해 타인 - 어떤 가해자나 희생자나 억압자나 특권층 - 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고집해왔고 여전히 그렇게 고집한다.


하지만 이쯤되서는 이런 냉소가 가능하다. "과연 신의 도성(City of God)이 진짜 목적인가? 아니면 모든 이와 모든 것을 희생의 장작더미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진짜 목적인가? 다가올 인간 형제애라는 가설은 그저 포장이자 기만이 아닌가?" 어쩌면 유토피아가 아니라 그 공포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도대체 무엇이 말이고 무엇이 수레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이 어두운 질문들은 1억 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죽어나간 바로 이 시점에 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자비심으로 옷 입혀진 이 유토피아적 비전이, 매우 거부하기 어려운 매력이기 때문에, 끔찍한 폭력을 미묘하고 교활하게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우리곁에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 격차는 동물들과 식물들, 그리고 도시들 간에 냉혹한 현실이다. ... 격차는 모든 현실의 구조에 깊게 자리잡고 있으며, 이것은 결코 어떤 주제넘은 이념에 감명받아 자유와 안정과 생산적인 민주주의들을 갈아엎는 것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다. 이러한 필연의 격차와 수반된 고통 속에서 그나마 조금이라도 부를 창출하였던 체제는, 유대-기독교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즉 그 무엇보다 근본적인 자유와 신성과 개인의 궁극적 책임을 상위에 두는, 서구문명에 있었다.
...


유토피아적 비전의 위험은, 비록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논쟁이 있더라도, 이미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1917년에 마르크스주의자가 될 변명이 있었더라도 (물론 당시에도 오래 전에 도스토예브스키와 니체가 그 교리의 지옥과 같은 폐해에 대해서 경고한 바 있었다.) 지금은 결코 그 어떤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이는 상당 부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과 <수용소군도> 덕분이다. 우리는 이 저자의 분노와 용기, 그리고 정의와 진리를 향한 막을 수 없는 헌신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려야 한다. 솔제니친은 소비에트 국가의 재앙이 바로 그 마르크스주의 유토피아적 비전의 속임수와 떼어낼 수 없는 인과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는 그 무시무시한 공산주의 실험을 위해 어떤 고통의 값이 치뤄져야 했는지 정성껏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다시는 우리가 그런 재앙을 맞지 않도록 경계할 수 있는 지혜를 남겨주었다.


적어도 우리는 그의 글에서, 단순한 선의만으로는 우리를 선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겸손함을 얻어야 한다. 그러면 그 의도들이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용서할 수 없는 역사적 무지와 의도적인 맹목, 그리고 우리 안에 숨겨진 복수와 공포와 파괴를 향한 무한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르크스 전체주의 이념의 화염을 통과한 수많은 이들의 시련을 기억하고, 그 교훈에서 여전히 이 세상을 끔찍하고 무자비하게 주름잡는 고통과 악의에 대해 모두가 개인적 책임을 지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이제 마땅한 겸손으로 이 위대한 문학적, 도덕적 천재를 통해 우리 스스로를 바꿀 수 있는 수단을 얻게 되었다. 이 주어진 교훈을 받아드릴 열망과 의지를 가질 수 있도록 우리 모두는 각자의 신에게 간절히 구해야 한다. 우리가 만약 이 끔찍한 피비린내와 고문과 번민을 통해 드러난 교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완고하고 경솔하고 변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신이 영원히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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