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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11-07 13: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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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수 대법원장이 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 등 전원합의체에 참석하고 있다. 대법원은 종교적 병역거부는 `정당한 사유`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뉴시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1월 1일 종교적 양심의 자유를 내세워 군 입대를 거부하는 것을 ‘정당한 사유’라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하루 전 일제하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승소 최종판결을 내린 것에 이어 연 이틀 충격적인 판결을 내렸다. 이 문제는 적지 않은 파문을 불러일으킬 전망이다.


우선, 신앙 등 양심을 이유로 병역을 면제받은 자가 나중에라도 여호와의 증인 집단을 떠나거나 또는 병역 거부가 옳다는 신념이 바뀌면 군에 자진 입대라도 하는 것인지, 그런 경우 국가가 뒤늦게 강제로 입대시킬 수 있는지 애매하다.


사실 신앙적인 관점에서도 여호와의 증인 등의 주장은 별 근거가 없다는 지적이다. 성경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유대민족에게 내려진 뒤에도 유대민족 가운데서 ‘계명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군대에 가지 않겠다’고 한 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성경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성경에 기록이 없다면 그것은 구약 등 유대교 전승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신념이라는 이야기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구약 시대에도 유대민족은 숱하게 이방민족들과 전쟁을 했고 그 과정에서 율법 때문에 무기를 들면 안된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다윗 같은 세속 군주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전의 종교적인 존재를 겸했던 사사(Judges)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성경에서 숱하게 나오는 표현이 ‘만군 의 여호와(Jehovah of armies)’이다. 만군(萬軍), 말 그대로 여호와는 군대의 지휘관이라는 말씀이다. 성경에서는 한번도 저런 투항주의, 패배주의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싸워서 승리하시는 하나님이시고, 믿는 자들에게도 악과 싸워 이기는 하나님의 병사가 되라는 것이 성경의 메시지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여호와의 증인은 교리로 보면 구약의 율법주의에 가깝다. 그런데 집총 거부에서는 또 가장 구약의 정신에서 먼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양심적 병역거부란 표현에 담겨있는 대전제는 병역거부가 비양심적인 행위라는 판단이다. 즉, 병역거부는 비양심적인 행위인데 특별한 경우에는 양심에 따른 행위일 수도 있다는 논리가 깔려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어떤 병역거부가 양심에 따른 행위인가, 그런 특별한 예외인가 판단하는 기준이다.


그 판단 기준의 설정에서 중요한 전제는 ‘누구에게나, 언제 어디서나, 객관적으로 적용 가능한’ 기준이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법치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특권적인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증인 등 특정 종교의 신자라는 것은 이런 기준에 단 하나도 부합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국민이 병역면제를 받기 위해 특정 종교의 신자가 되어야 하나? 여호와의 증인이 되면 두번 다시 그 종교에서 빠져나올 수 없나(이 전제가 무너진다면 당연히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믿음을 상실할 때 병역에 복무해야 한다)? 그리고 도대체 신앙이란 것을 누가 객관적으로 판정할 수 있나?


현실적으로는 이 문제는 그냥 현역복무와 대체복무 사이에서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관철되어야 할 원칙이 중요하다. 대체복무가 현역복무와 동일한 정도의 신체적 정신적 부담 그리고 기회의 손실이라는 비용을 치러야 한다. 36개월 대체복무에 대해서 “보복적 입법”이라고 반발하는 의견이 있지만, 이건 당연히 보복적 입법이어야 한다.


원래 병역 의무의 이행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한 징벌로 형사처벌 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지만 이번 대법원 판결로 ‘다른 선택’도 가능하게 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 ‘다른 선택’이란 형사처벌 외에 다른 보복적 조치를 말한다. 그게 아니라면 역으로 병역 의무를 이행하는 자들에게 국가권력이 일종의 보복 조치를 하는 셈이고, 병역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자들을 포상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이건 근본적으로 국가의 존재 근거나 정당성을 부인하는, 국가의 소멸로 가는 논리가 될 수밖에 없다.


이번에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낸 여호와의 증인이 단순히 병역 의무뿐만 아니라 납세 등 국가의 존재 자체를 총체적으로 부인하는 논리를 동원했다는 게 우연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무정부주의적 논리에 대한 찬반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모든 주장과 논리, 행동은 당연히 그에 따른 비용을 수반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국가의 존재를 거부한다면 국가로부터 받는 모든 혜택의 박탈을 감수해야 한다.


양심적으로 병역을 거부한다는 자들이 보복적 입법조차 거부한다면 당연한 귀결로서 국적 포기와 건강보험, 국민연금 가입 배제, 주민등록 말소 등도 수용해야 한다. 선거권 피선거권 등도 두 말하면 입 아프다. 아울러, 대한민국 국민들이 그들의 안전을 대신 지켜주는 셈이니 거액의 국방세를 부담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게 싫다면 그들의 국적을 박탈해 해외로 추방해야 할 것이다.


“측정할 수 없는 것은 관리할 수도 없고, 관리할 수 없으면 개선할 수도 없다.”


피터 드러커의 말이긴 하지만 경영 이외의 분야에도 적용 가능하다고 본다. 양심이란 게 측정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를 인정한다는 게 황당한 소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일하게 측정 가능한 방법이 있기는 하다. 그건 그 양심으로 인한 실제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다. 즉, 양심적 병역거부가 진짜 양심적 행위라는 걸 실제 인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로 인한 현실적 손해와 탄압을 감수하는 것이다. 감옥에 가고 이후 사회 생활에서도 온갖 손해를 감수하면서 신앙적 결단으로 양심의 고수에 따른 실제적 불이익을 감당하는 것이다.


이게 양심을 입증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합법화한다면서 정작 그 양심을 측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없애는 판결을 내리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일제 징용 배상 판결과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 판결에는 공통점이 있다. 대한민국에 대한 부정이라는 맥락을 깔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내적인 것도 있지만 대외 관계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한미일 동맹 및 협력관계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다. 대법원은 이 정체성을 무너뜨렸다. 국가 대 국가의 신뢰도에서도 엄청난 손실을 끼쳤지만, 가장 치명적으로 국가의 정체성을 망가뜨렸다는 점에서 그 후유증이 심각할 것이다.


양심적 병역거부 판결도 마찬가지다. 국민개병제를 근간으로 징병제를 유지해온 것은 사실상 한미일 삼각동맹과 안보체제의 중요한 축이었다. 일본이 해상전력을 바탕으로 한 공군 운용 능력에 중점을 두고, 한국은 육군 전력에 초점을 두었다. 양국의 군사력을 묶는 것은 주일 주한미군의 존재였다. 이번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 선언으로 이러한 기존 질서도 본격적인 재검토에 들어가게 됐다.


대한민국의 과거 역사를 부정하는 판결들이다. 문제는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확실한 청사진이 없는 상태에서 과거의 부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당장 한일청구권협정 부정과 징병제 부정의 대안에 대해 이 정부는 고민해본 적이 없다. 수습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유일한 경로라면 대한민국의 소멸이다. 남북연방제로 가는 것이 이들이 고려하는 유일한 해결 경로일 것이다. 문재인이 임명한 대법관들이 이번 판결을 주도했다는 것이 그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저들은 충분한 각오와 결의를 거쳐서 이런 판결을 내놓았을 것이다. 거기에 대응하는 세력은 어떤가. 아직 상황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라고 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은 무엇이 좋을까. 모병제도 좋고 대체복무제도 좋은데, 그런 논란에 앞서 먼저 합의했으면 하는 게 병역의무를 마치지 않은 자는 절대 어떤 정규 공직도 맡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 원칙은 앞으로 여성에게도 적용해야 한다고 본다. 사회적으로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는 경향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다. 가장 단적인 사례가, 여성 지위 향상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각 정당의 국회나 지방의원 비례대표 1,3,5번 등 홀수번호는 무조건 여성으로 할당하라는 강제조항이다.


국회의원 자리가 여성의 지위 향상의 목적인 것이냐? 국회의원 자리는 여성의 지위 향상을 포함한 국정 전반의 감시와 입법 활동을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국회의원 자리가 여성 지위 향상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면 왜 극소수 선택받은 여성만 국회의원이 되어야 하나? 모든 여성을 공평하게 순번을 매겨 하루씩이라도 국회의원 하도록 해야지.


소수를 위한 특권은 100% 비리와 부패, 이권유착을 만들어낸다. 여성 비례의원 자리 배정을 둘러싼 추문도 장난이 아니라고 들었다. 여성들의 지위나 권익 향상을 위해서도 결코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다.


사회적 약자들이 요구해야 하는 것은 공정한 경쟁의 질서와 생태계이다. 그리고 그 공정한 질서 안에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 그렇게 공정한 질서 위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결국 주장의 정당성도 인정받지 못하고, 지위의 향상도 언감생심 기대할 수 없다.


병역을 마치지 않은 자는 정규직 공직에 임용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에 대해 “아파서 군대에 못간 사람은?”이라는 반론이 나온다. 저런 반문에는 “몸이 불편한 사람은 특별히 배려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장애인이나 기타 신체적으로 불리한 조건인 사람을 사회가 배려해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 수단이 공직을 나눠주는 것인가? 공직이 그런 형평성을 달성하는 지표가 되는 게 말이 되나? 공직은 그런 식의 갈라먹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능력을 갖춰 공직을 맡은 자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게 맞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한답시고 공직을 그들에게 나눠주는 게 맞나?


신체적 약점 등을 극복하는 수단은 갈수록 발달하고 따라서 그들이 공직에 취임하는 진입장벽도 갈수록 낮아질 것이다. 업무에 지장이 없다면 그들의 공직 진입을 막을 이유도 전혀 없다. 하지만 본질은 그럴만한 자격을 갖춘 자가 그럴만한 자리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들에게 병역 의무를 부과해야 한다. 다만 병역 자원의 부족이라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의 기본적인 소양이라는 측면에서 필요하다고 본다. 국방의무뿐만이 아니라 교육의 권리와 의무 측면에서도 필요하다.


여성이 여성으로서 갖는 특성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그 특성이란 것도 사회와 시대적 요구에 맞게 조율될 필요가 있다. 지금 대한민국 여성들은 이런 소양에서 심각한 수준이다. 이 문제를 방치하면 앞으로 점점 더 어마어마한 국가적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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