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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11-04 17:45:11
  • 수정 2018-12-05 22: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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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0세기에 태어난 영미 문명의 영광은 많은 사람을 주인으로 만든 ‘자유’와 ‘자치’의 결과
-자유의 핵심은 사익추구. 우리 사회는 사익추구 폐단 들먹이며 자유와 재산권 억압하려 들어
-계몽주의 사상가들 ‘조국’과 ‘공화국’ 동의어로 간주. “공화국만이 진정한 조국이 될 수 있다”


▲ 어떤 재산도 안전하지 않고 언제 목이 언제 잘릴지 모르는 곳,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조국’이 없다.. [제3의 길]


나이가 들어서 새삼 ‘자유’의 소중함과 위대함을 절감한다. 자유는 소공동체의 자치이며, 그 주인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다. 그래서 자유, 자치, 주인(주체)은 삼위일체다.


18~20세기에 영국과 미국이 만들어낸 빛나는 문명은 ‘자유’와 ‘자치’에서 나왔다. 동시대에 가장 많은 사람을 주인으로 만들었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그렇다(여기에 스위스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이렇게 태어난 수많은 주인들이 개인으로, 소규모 자치체로, 기업으로 결합하여 각자의 창의와 열정을 발휘하여 자신의 욕망, 행복, 사익을 추구한 결과가 저 위대한 문명이다. 물론 자유, (지방, 교회, 상공업자 등)자치를 도덕(종교), 공화, 민주 등으로 잘 제어하였다. 공공이라는 이름으로 자유, 자치를 제한하려는 시도도 잘 제어했다.


그런 점에서 영·미와 프랑스, 독일, 일본의 격차 뒤에도, 대한민국과 북한의 엄청난 격차 뒤에도 자유, 자치와 인민/국민의 ‘주인됨’이 있다는 것을 절감한다.


오래된 생각인데, 최근 유치원 관련 논란을 보면서(어떻게 유치원이 사익추구의 수단이 되나 운운) 다시 우리 사회의 자유 정신 내지 자유 가치의 빈곤을 절감한다. 분권만 있고, 주민이 주인 행세를 하는 자치는 없고, 오직 지자체장의 선정만 있는 지방자치분권 담론을 보면서도 절감한다.


자유는 한마디로 행복/욕망/사익 추구의 자유요, 신체의 자유요, 거주이전의 자유요, 직업선택의 자유요, 종교의 자유요,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하고, 결사할 수 있는 자유다. 자유의 토대는 재산권의 보장이다. 이건 헌법에 명기되어 있으니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이 모든 자유가 자주와 위대한 수령의 선정에 짓눌려있다.


자유의 핵심이 사익 추구라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는 매우 생소한 개념처럼 보인다. 사익 추구의 폐단을 들먹이며, 너무 쉽게 자유와 재산권을 억압하려는 생각이 들끓는다. 유은혜 발언과 유치원 문제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왜 그럴까?


중국과 한국 등에서는 여전히 ‘자유’ 보다는 ‘좋은 통치(정치)’가 압도했다는 생각이 든다. 식민지 시대에는 자주(독립)가 압도했고, 독재 시대에는 민주가 압도했고. 자주는 민족 전체가 노예적 삶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이고, 민주는 곧 ‘좋은 통치’를 의미했다. 다 좋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 문화, 전통에 자유, 자치, 주인됨의 소중함이 각인되어 있지 않으니, 너무 쉽게 권력=통치에 몸과 마음을 맡겨버렸다. 한마디로 권력의 노예됨 내지 권력 바라기에 너무 익숙하다. 그리고 자유와 자치를 연결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지방자치분권이 민주화의 핵심으로 여겨지지 않는 이유다. 민주화는 좋은 대통령 뽑기로 좁아졌다.


자유, 자치, 주인/주체라는 초등학교를 거쳐 정의, 민주, 공화라는 중고등학교로 진학해야 하는데, 초등학교를 거치지 않고 바로 상급학교로 진학해 버렸기에, 정의, 민주, 공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북한에서는 자유, 자치, 주인/주체를 내면화 하지 않고, 자주(민족해방)와 좋은 통치로 가니, 아주 야만적인 체제가 만들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최근 들어 미국, 일본에 대한 대중적 정서를 보면서, 또 북한과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대중적 시각을 보면서, 대통령과 권력을 바라 보는 대중적 시각을 보면서도, 우리가 너무 오래, 이민족이나 권력의 ‘노예’로 살아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민주화운동이 ‘바다에 한 쟁기질’ 같다는 느낌도 동일한 뿌리에서 나왔다.


얼마 전에 모리치오 비롤리의 <공화주의>를 읽었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대목이 많았다. 공화주의는 자유를 지키고 심화하고 확장하는 이념이다.


프랑스에서 발간된 <백과전서>에 따르면 ‘조국'(patrie)이란, 우리가 태어난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성원으로 하고 그 법이 ‘우리의 자유와 행복’을 지켜주는 그런 자유국가를 의미한다. 계몽주의 정치사상가들은 ‘조국’이라는 단어와 ‘공화국’이라는 단어를 동의어로 간주했는데, 공화국만이 진정한 조국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167쪽).


<백과전서>의 상기 항목을 작성한 사람은 몽테스큐의 입장을 따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동양적 전제주의 치하, 즉 법은 없고 오직 군주의 의지만이 있는 곳, 군주의 변덕을 찬양하는 것 말고는 다른 규칙이 없는 곳, 공포 말고는 다른 통치원리가 없는 곳, 어떤 재산도 안전하지 않고 언제 목이 언제 잘릴지 모르는 곳, 이런 곳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조국’이 없다.” (168쪽)


여기부터는 내 생각인데, 조국통일 운운하는 자들이 말하는 조국은 조국이 아니다. 조상의 나라가 조국은 아니라는 얘기다.



[덧붙이는 글]
[제3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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